일러스트=한상엽

만담가 신불출은 한국 최초의 ‘국민 예능인’이었다. 신영일, 신흥식 등 본명도 증언과 기록마다 다르고, 출생 연도도 남한은 1905년, 북한은 1907년으로 다르게 기록된다. 사망에 대해서도 북한 자료에는 그가 뇌출혈로 투병하다 1971년 사망했다고 하지만, 요덕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탈북한 전직 배우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1960년대 초 종파주의자로 숙청돼 1976년쯤 요덕수용소에서 영양실조로 사망했다고 한다. 신불출이라는 예명 외에 자연인으로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는 점은 오늘날 연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불출이 ‘국민 만담가’로 떠오른 것은 1933년 오케(OKEH)레코드에서 발매한 ‘익살맞은 대머리’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후였다. “영감: 방정맞은 여자 앞에서는 행여 조심해야 한단다. 만일 잠을 자다가 다듬잇돌로 잘못 알고 디립다 방망이질을 해대면… /소녀: 영감님 대가리는 다듬잇돌 대가리. 방정맞은 여자 옆엔 못 잔다누나 /영감: 하하, 어디 그뿐이냐? 해수욕을 갔다가 어부들이 문어로 잘못 알고… /소녀: 영감님 대가리는 문어 대가리. 어부 있는 해수욕장 못 간다누나~”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유머 코드였지만, ‘신불출 만담회’는 군중들을 불러모으는 흥행 보증 수표로 자리 잡았다. 행사가 열릴 때마다 주최 측은 ‘바람잡이’로 그를 섭외하려고 열을 올렸다. 웃음 지을 일이 드물었던 일제강점기, 신불출은 ‘입담’과 ‘웃음’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해방 후 신불출은 창씨개명과 징용을 소재로 한 만담을 무대에 올렸다. “오란다 해서 다 나가면, 그게 어디 불출입니까? 난 근로봉사에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았어요. 이름이 불출이니까요. 징용에 나가라 해도 나가지 않았어요. 이름이 불출이니까요.” 이어서 신불출은 경찰이 강요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로 창씨개명했다고 밝혔다. 경기민요 ‘양산도’의 후렴구 “에라 놓아라”에서 따온 이름으로 “될 대로 돼라”라는 뜻이었다. 경찰이 난색을 짓자, 이번에는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고쳤다. ‘현전(玄田)’을 합자(合字)하면 ‘축(畜)’, ‘우일(牛一)’을 합자하면 ‘생(生)’으로 ‘축생(畜生)’이 된다. ‘가축의 아들’이라는 한국어도 좋은 뜻은 아니지만, 일본어 ‘칙쇼(畜生)’는 한국어 ‘×새끼’에 해당하는 욕이다.

하지만 창씨개명 이후 태평양전쟁기에도 ‘조선담우협회’ ‘조선연예협회’ ‘조선연극문화협회’ 산하 ‘이동연예 신불출반’ 등 친일 관변 단체 회원 명부와 활동 기록 등 ‘공식 문헌’에서 그를 지칭하는 이름은 여전히 ‘신불출’이었다. 더욱이 이런 조직에 신불출이 이름만 올린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신불출은 좌익 편에 섰다. 수동적 동조자가 아니라, 조선공산당(조공) 박헌영의 최측근 이강국의 문화 분야 핵심 조직원으로 맹활약했다.

1946년 6월 10일부터 사흘 동안 조선영화동맹과 예술통신사는 20주년을 맞이하는 ‘6·10만세운동 기념 연예 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만세운동 기념’은 허울일 뿐이었고, 사실상 ‘찬탁 선동 집회’였다. 신불출은 둘째 날인 11일 국제극장 무대에 올라 ‘실소(失笑) 사전’이라는 만담을 공연했다. ‘국민 만담가’의 공연을 보려고 좌우익 가릴 것 없이 관중들이 운집했다. 하지만 ‘우익 관객들’은 시작부터 울분을 삼켜야 했다. 행사 서두에 ‘재일 조선인 연맹’에서 제작한 ‘조련 뉴스’가 상영되었는데, 스크린에 재일 동포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연호하는 장면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게 좌익 집회에 참석하게 된 우익 관중들은 태극기를 들고 무대에 오른 신불출의 만담에서 폭발했다.

“이 태극기 좀 보시오. 태극기의 사괘는 소·중·영·미 4개국의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라고 말해 주고 있소. 태극의 상부는 적색이고 하부는 감색이올시다. 세월이 흐르고 비바람이 불어 태극기가 물에 젖으면, 위에 있는 붉은 색깔이 녹아 흘러 감색 부분까지 불그스레해지는 것이 자연 현상이오. 남한도 곧 공산국가가 될 것이외다.”

우익 관중 200여 명은 “태극기를 모욕 말라!” “조공 일파의 음모를 분쇄하라!” “적색 괴뢰 만담가 신불출은 사죄하라!”며 무대 위로 뛰어올랐다. 성난 군중은 신불출을 끌어내려 마구 구타했다. 이어서 태극기를 무대 위에 다시 걸고 관중 모두 기립하여 국기 배례, 애국가 봉창, 순국선열 추모 묵도를 올렸다. 국제극장 사주(社主)가 무대에 올라 사과했다. 신불출은 전치 4주의 부상을 입고 ‘백인제 외과’에 입원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우익 진영에서는 한목소리로 신불출과 조공을 비난했다.

“독립된다니까 너도나도 함부로 뛰고 이 판에 정치적 색채를 띠지 않으면 한몫 끼지 못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 적지 않은 모양. 만담하러 다니는 신불출이란 자까지 날뛰니 이름 그대로 과연 불출(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로군. 이자는 해방 이전에는 악독한 왜놈 경찰의 괴수 미와라는 자의 수양아들로 기괴한 입담으로 징병, 학병, 징용 등의 권고 만담하러 다니어 소위 황민화 운동의 앞잡이 노릇 하던 버릇을 잊은 듯이 해방 후는 진보적 민주주의 미명 아래 지랄발광. 인민공화국 선전하러 다니더니 (…) 제가 무엇을 안다고 천둥벌거숭이 모양으로 주책을 떠는지. (…) 불출이거든 불출대로 그냥 있지 웬 방정을 그리 떠노. 제2 신불출, 제3 신불출이나 나지 마소.”(조선일보, 1946.6.13.)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신불출 역을 연기하고 있는 김종국. /SBS

이틀 후 신불출은 병상에서 체포돼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후 태평양사령부 포고 제2호 치안 교란, 연합군 비방 등 위반 혐의로 기소돼 ‘2만원 벌금 혹은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김두한은 196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나는 광인(狂人) 신불출의 만담을 중지시키고 뚜들겨 주었다. 나의 주먹에 얻어맞아 피를 토하는 신불출을 사살하려고 했지만 다시는 그러한 일은 않겠다고 하므로 일단 놔주었다. 그러나 신은 이튿날 아침 나에게 총격을 받아 왼팔이 관통되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신불출은 총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 사건으로 실제 구속된 가해자는 국학전문학교 재학생 강덕수, 주학건, 박창진 등이었다.

태극기 모독 사건 이후 무대에서 퇴출된 신불출은 이듬해 월북했고, 북한에서 미국과 남한 정부를 풍자하고 조소하는 공연을 이어갔다. 6·25전쟁 때는 선전·선동 공연을 위해 전선을 누볐다. 그는 진심으로 공산주의 조국을 사랑했지만, 전후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그 역시 숙청돼 그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버렸다. 신불출이 바라던 자신의 묘비명은 “잘 죽었다”(삼천리, 1936.11)였다. 그의 공산주의 조국은 그 ‘소박한’ 바람조차 들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김경희, ‘신불출 문예활동과 그 의미’, 국문학연구 제12권, 2004

김두한,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 연우출판사, 1963

반재식, ‘만담 백년사’, 백중당, 2000

배선애, ‘동원된 미디어, 전시체제기 만담부대와 만담가들’. 한국극예술연구 제48집, 2015

엄현섭, ‘신불출 대중문예론 연구’, 비교한국학 제17-3호, 2009

이승희, ‘배우 신불출, 웃음의 정치’, 한국극예술연구 제33집,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