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병통치라잖아. 밑져야 본전이니 해봐요.”
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구 안산 황톳길. 쌀쌀한 가을 아침에 신발과 양말을 벗고 흙을 밟자 소름이 돋았다. 발가락을 오므린 채 끝없이 밀려드는 맨발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패딩 점퍼 껴입은 부부, 털모자 쓴 노모를 부축한 중년 남성, 아기 발을 벗겨 풀어놓은 엄마들이 묵묵히 흙길을 오갔다. 맨발로 접신(接神)한 지구의 기운이 지치고 병든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간절한 마음들. 조용한 숲은 거대한 기도 도량을 방불케 했다.
생소한 느낌에 발을 못 떼는 기자에게 60대 여성 최모씨가 “처음이면 살살 걸어보라. 발을 땅에 대기만 해도 자기장인가 원적외선인가가 몸으로 들어온다”고 말을 걸었다. 관절염 때문에 전동 휠체어를 타고 산에 올라왔다는 최씨는 자신의 발을 들어 보이며 “난 맨발 걷기 8일 만에 굽었던 발가락이 펴졌고, 어제는 처음으로 진통제와 수면제를 안 먹고 잤어요”라고 했다. 기자도 이날 1시간 남짓 맨발로 걸은 뒤 초저녁부터 잠이 쏟아졌다.
맨발 걷기 열풍이다. 맨발로 걷기만 해도 불면증·우울증, 두통·요통, 고혈압과 당뇨병, 말기암 등 각종 난치병과 만성질환을 고쳤다는 ‘간증’이 이어진다. 전국 지자체마다 맨발 걷기 길 조성에 불이 붙었고, 황토 산지에선 흙 쟁탈전이다. 그간 게르마늄 팔찌부터 오일풀링, 요가·명상, 올레길 걷기, 간헐적 단식 등 각종 건강법 바람이 불었지만 요즘 맨발 걷기의 인기는 강도가 사뭇 다르다.
이날 안산에서 만난 이들에게선 생생한 ‘맨발 신화’가 쏟아졌다. 뇌종양 투병 중인 박모(26)씨는 “방사선과 항암 치료도 받았지만 맨발 걷기 덕에 예후가 좋은 것 같다”며 “오늘도 대형 병원 진료 직전까지 ‘맨발’ 하러 들렀다”고 말했다. 두 살 아들을 데려온 30대 주부는 “아이 아토피 때문에 생후 6개월부터 전국의 좋다는 흙길을 찾아다니며 맨발 걸음마를 시켰다”며 “이후 아토피는 물론이고 감기 한번 안 앓았다”고 했다.
당뇨병 환자 함모(75)씨는 “똑같이 걸어도 맨발로 걸으면 효과가 다르더라”고 했다. 매일 운동화 신고 걸을 땐 공복 혈당 수치가 100을 넘었는데, 똑같이 걸어도 발을 벗었더니 수치가 80대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비만과 고지혈증이었다는 50대 금융사 임원은 “아파트 단지에 맨발 걷기 길이 생겨 매일 퇴근 후 걸었더니 두세 달 새 10kg이 쑥 빠졌다”면서 “간헐적 단식을 병행한 덕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맨발 걷기를 할 때 동물 분변이나 상처에 의한 감염을 막기 위해 파상풍 예방 주사를 맞는 경우도 급증했다.
한편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도 늘었다. 한 신장병 환자는 “주말엔 뒷산, 평일엔 학교 운동장을 맨발로 열심히 걸었는데 두 달 만에 수치가 더 나빠졌다”며 “주치의가 ‘피로와 탈수 때문’이라며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고 했다. 어느 학부모는 “아토피 앓는 딸이 맨발 걷기 40일 만에 얼굴에 진물이 흐르며 악화됐다”며 “동호회에선 ‘명현 현상(치유 과정서 오는 이상 반응)’이니 꾹 참고 계속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쨌든 맨발 건강법은 대세다. 맨발길 조성·관리는 선거로 심판받는 지자체마다 민생 복지의 가늠대가 됐다. 서울 서초·양천·노원·동작·성동구 등은 최근 맨발길 확장 사업을 속속 발표했다. 안산 황톳길도 두 달 전 문을 연 ‘신상’이다. 이날 서대문구청 직원들은 전북 고창, 경기 파주 등에서 공수해온 새 황토를 수레째 싣고 와 덧깔고 물을 뿌려 다졌다. “흙이 찰기 있어야 걷기 효과가 높아진다는 주민 지적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발 씻는 세족장도 두 군데 있지만 최근 입구에 한 곳 더 설치했다. 서울의 한 구청은 이달 초 개장을 목표로 새 황톳길을 만들었는데, 공사 현장을 매의 눈으로 감시하던 맨발인들이 “합성 부직포 위에 흙을 올리면 효과가 없다”고 항의해 이걸 고치느라 개장을 늦췄다고 한다.
확신이 강할수록 영토를 넓히고 싶은 법. 갈등도 생긴다. 문화재청은 지난 3월 전국 모든 조선왕릉에 ‘경내에서 유교 예법에 어긋나는 맨발 보행을 금한다’는 안내문을 붙였다. 왕릉이 조용히 흙길 걷기 좋다는 소문이 나자 맨발 동호회가 단체로 찾아오고 화장실에서 흙발을 씻는다는 민원이 빗발쳐서다. ‘맨발걷기 국민운동본부’ 같은 민간 단체는 “우리 모두 맨발로 태어났는데 왜 천시하냐” “불결한 건 맨발이 아니라 신발”이라며 철회를 요구했다.
미국에서도 1994년 설립된 ‘맨발 걷기 생활 소사이어티’란 단체가 논란을 일으킨 적 있다. 일부 회원들이 “인간의 발을 24시간 해방시켜야 한다”며 학교와 직장, 지하철과 공항, 백화점 등을 맨발로 다니고, 운전도 맨발로 하자고 주장해서다.
왜 맨발 걷기일까. 기본적으로 걷기 자체는 검증된 최고의 운동이다. 별다른 준비물이나 기술이 필요 없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기분도 전환된다. 떠들썩하게 놀고 마시던 등산 문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미니멀 산행’인 맨발 걷기가 떴다는 분석도 있다. 맨발의 지압·마사지 효과도 분명 있다. 김범수 인하대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맨발로 걸으면 발과 발가락의 반사·감각 신경이 살아나고 근육이 강화된다”면서도 “전체적 건강에 도움 될 수 있지만 맨발이 필수라곤 할 순 없다”고 말했다.
맨발 옹호가들이 한발 더 나간 게 일명 어싱(Earthing), 즉 접지(接地)에 의한 자연 치유 효과다. ‘지구는 음전하가 풍부한 천연 항산화제다. 인체는 전자파와 활성산소 등 각종 독소로 오염돼있는데, 지구의 자유전자가 맨발을 통해 들어와 몸을 충전시키면 염증이 완화되고 유전자가 치유된다’는 논리다. 오랫동안 기(氣) 연구가들이 주장하던 대체 의학 이론과 비슷하다.
이 ‘접지 만능주의’를 신봉해 맨발 걷기는 물론, 설거지할 때도 ‘물 자기장’을 접하려 고무장갑을 안 낀다는 이들도 생겼다. 맨발 걷기 할 때 지구 자기장을 더 잘 흡수하게 해준다는 ‘접지 밴드’까지 불티나게 팔린다. 전자공학 교수와 의사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학계에서 검증된 적 없는 이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말기 전립선암 환자가 맨발 걷기 두 달 만에 완치됐다’ 같은 소문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은 “객관적인 추적 관찰 사례는 없다” “다른 치료법 등 복합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인다. 한 의사는 “낫는다는 강력한 믿음을 가지면 실제 몸이 좋아지는 플라시보 효과 아니겠냐”고 했다. ‘맨발로 사는 아프리카 마사이족이나 야생 동물은 성인병을 앓지 않는다’는 맨발 단체 주장에 대해선 “마사이족과 동물들 평균 수명이 얼마죠?”라고 되묻는 의사도 있었다. 참고로 마사이족 수명은 40년 정도다.
족부 전문의인 이영구 순천향대 부천병원 교수는 “요즘 맨발 걷기를 무턱대고 하다 봉와직염·족저근막염·지간신경종 등이 생겨 병원을 찾는 환자가 갑자기 늘었다”며 “당국이 맨발 걷기를 규제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특히 당뇨 환자는 발에 감각이 없어 상처가 나도 잘 모르는데, 맨발로 걷다 잡균에 감염돼 발을 절단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면역력이 약해진 암 환자, 발바닥이 얇아진 노인도 맨발 걷기가 독이 될 수 있다”며 “마사지를 원하면 집에서 지압판이나 수건으로 발을 꾹꾹 눌러도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