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찾은 '국립농업박물관'의 야외 경작지에 업사이클링 작품인 허수아비가 벼 베기 체험 행사 전 호위 무사처럼 황금 들판을 지키고 있다. 행사 후 논밭은 월동 준비에 들어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언덕을 따라 이어진 아담한 다랑이 논 사이로 걸으니 벼 낟알을 쪼던 참새 떼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참새보다 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니 이번엔 밀짚모자에 허름한 옷을 걸친 허수아비가 배시시 웃는다. 경기도 수원 중심부 서둔동에 있는 농업 복합 문화 공간인 ‘국립농업박물관’의 가을 풍경이다. 농촌진흥청이 있던 부지에 지난해 12월 개관한 국립농업박물관은 1년도 안 돼 수원 도심의 힐링 명소로 떠올랐다. 줄여서 ‘국농박’ ‘농박’이라 불린다.

황금 들녘에서 농심을 헤아려보기 좋은 시기다. 정조대왕의 ‘농업 혁신 도시’였던 수원, 그중에서도 농업의 역사와 흔적을 만날 수 있는 서수원으로 떠났다. 출발점은 국립농업박물관이다.

◇사투리 난무(?)하는 ‘입말 요리’ 교실

“강원도 사람들에게 옥수수는 거의 주식이나 다름없었지 뭐. 이렇게 옥수수로 기정떡을 만들고, 쇤 호박(늙은 호박)을 쪄서 저녁 대신 먹으면 속앓이(배탈)가 없으니 좋아! 이래이래(이렇게)~ 찰옥수수, 메옥수수 갈아서 콩 좀 넣고 칡잎에 싸서 찐 기정떡은 ‘배리~’ 하면서 ‘배틀~’ 한 맛이 나고…. 특히 갓 딴 생옥수수를 갈아 넣으면 옥수수 풋내도 나고 달쿰한 맛이 나. 칡잎이 없으면 호박잎으로 싸도 좋고, 싸 먹는 잎에 따라 향이 달라지니 만들어 먹는 재미가 있지.”

지난 19일 국립농업박물관 교육동 1층 요리 교실. 강원도 평창 진부면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는 김을순씨가 차성자씨와 함께 요리 선생님으로 나서 옥수수 기정떡 요리법을 구수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음식 ‘입말 음식’을 도시 주부들에게 전수하는 이색 요리 클래스였다. 김씨가 사투리나 생소한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진행자가 ‘입말’을 쉽게 풀이해주었다. 이날 참관한 입말 음식 전문가이자 ‘입말 한식’의 저자 하미현 작가는 “’배틀하다’는 ‘비틀하다’의 사투리로 약간 비릿하면서도 감칠맛이 있다는 뜻”이라고 덧붙였다. 옥수수 기정떡과 함께 메밀 ‘닭반대기’도 소개했다. 닭반대기는 닭고기와 채소를 섞어 ‘완자’나 ‘동그랑땡’처럼 만들어 찐 음식. ‘반대기’는 ‘넓게 펴서 만든다’는 뜻이다.

지난 19일 '국립농업박물관' 교육동 요리 교실에서 열린 '농박과 함께하는 식(食)나는 요리 체험'. 강원도 진부에서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부 김을순씨가 요리 선생님으로 나서 구전 음식인 '옥수수 기정떡'의 요리법을 정겨운 사투리로 전수하고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시연 후 참가자 20명이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이 이어졌다. 저마다 낯선 모양의 기정떡에 신기해하는 눈치. 박지애(42)씨는 “그동안 먹은 기정떡 모양과 맛이 달라 신선하면서도 재미있었다”고 했다. 박씨와 함께 참가한 신성남(49)씨는 “농부에게 입말로 토속 요리를 배우니 강원도 현지에서 익히는 것처럼 생생하다”며 좋아했다.

이날 행사는 박물관 1층 중앙에 전시된 하미현 작가의 ‘땅으로부터 온 레시피’(~11월 5일)의 연계 교육 프로그램 ‘농박과 함께하는 식(食)나는 요리체험’이었다. 이정연 국립농업박물관 교육체험팀 선임은 “국립농업박물관은 급속한 도시화와 고령화로 사라져가는 우리 농경 음식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입말 음식을 발굴하고 기록하며 재연하고 있다”며 “요리 체험 교실은 전국 8도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활용한 입말 음식을 시연·시식해보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달의 주제는 우리 땅에서 자란 옥수수와 메밀을 활용한 구전 음식. 참가자들은 곡식별로 우리 입말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보고 같은 작물을 활용한 해외 음식 ‘토르티야와 살사’ 만드는 법을 배웠다. 살사 소스 시연회에선 우리나라 전통 조리도구인 ‘확독(돌확)’이 등장했다. 입말 음식 요리팀의 유정인씨는 “확독은 곡식 등을 가는 데 쓰는 도구로 ‘믹서’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립농업박물관'의 기획 전시 '땅으로부터 온 레시피'(~11월 5일)에 대해 설명하는 입말음식 전문가 하미현 작가. 하 작가는 10년 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입말 음식을 연구해 기록으로 남겨오고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이정연 선임은 “이번 요리 체험의 경우 지난 9월 9일 전시와 연계한 문화제 행사 때 시연 후 선보이는 체험 수업으로 행사 한 달 전 박물관 홈페이지로 신청자를 받았는데 1분 만에 마감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며 “12월 중 열릴 요리 체험 3회 차 수업은 11월 20일 이후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을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기획 전시인 ‘땅으로부터 온 레시피’는 우리 땅에서 나는 다섯 가지 곡물을 주제로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음식을 소개하는 전시다. 쌀, 팥, 수수, 옥수수, 메밀 총 다섯 가지의 곡물을 중심으로 각 곡물의 생산자와 각 곡물을 활용한 음식 이야기, 곡식과 관련된 부엌 물건들을 전시한다. 소반 모양의 대형 상에는 곡물을 표현한 농부의 입말과 항아리, 농부의 손 글씨 레시피 등이 눈에 띈다. 곡식에 얽힌 농부들의 사연을 읽노라면 마음이 가을처럼 풍요로워진다. 국립농업박물관에선 요리 체험 교실 외 ‘홈 가드닝’, 베란다 텃밭을 가꾸는 ‘베란다 파밍’ 체험과 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벼 베기 체험 등 이색 행사(사전 신청)를 진행한다.

그래픽=김하경

◇다랑이 논·식물원 한곳에

1만8000㎡ 규모 국립농업박물관은 ‘농업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을 주제로 전시동, 식물원, 교육동, 체험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농경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선 ‘농(農), 문화가 되다’ 전시(~11월 5일)가 기다린다. 농업의 역사 관련 전시물을 비롯해 숟가락, 밥알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도 볼거리다.

'국립농업박물관'의 기획 전시 '농(農), 문화가 되다'전(~11월 5일)에선 우리 밥상에 오르는 식재료와 식문화를 주제로 한 예술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제철 작물을 재배하는 야외 경작 시설 ‘다랑이 논밭’(2000여 ㎡)은 지금 배추와 무 등 월동 작물이 차지하고 있다. 구경하며 산책하다 보면 잠시 시골길을 걷는 듯하다. 논밭 곳곳에 세워둔 허수아비는 여러 사람이 협업해 만든 업사이클링 작품.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운 허수아비를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다. 물고기 양식과 수경재배를 결합한 생산 방식을 관찰할 수 있는 ‘아쿠아포닉스’, 폭포전망대, 곤충관 등의 시설을 갖춘 식물원은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니 꼭 들러볼 것. 1월 1일과 명절 당일,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무료 관람.

◇王心 깃든 ‘축만제’와 ‘만석거’

수원은 정조가 혁신적 농업 정책을 실험하고 펼친 무대였다. 정조는 백성이 물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축만제’ ‘만석거’ 등과 함께 수원화성 주변 동서남북에 저수지를 축조했다. 그중 1799년 정조 23년에 ‘여기산’ 아래 당시로선 최대 규모로 축조한 축만제는 국립농업박물관에서 걸어서 10여 분쯤 걸리니 이어가 볼 만하다. 축만제(祝萬堤)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 표석도 남아있다. 이 축만제를 중심으로 농업의 기반이 마련돼 일제강점기엔 ‘권업모범장’, 해방 후엔 서울대 농과대학과 농진청이 설립되는 과정을 거치며 수원은 농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이런 역사적 의의를 뒤로하고 지금은 수원화성 서쪽에 있는 저수지라 해 ‘서호저수지’로도 불리며 시민의 휴식 공간인 ‘서호공원’으로 애용된다.

수원화성 축성 당시 농업용 저수지로 성 밖에 축조된 '축만제' 일대는 세월이 흘러 철새들의 낙원이 됐다. 중대백로를 비롯해 때에 따라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물닭 등을 관찰할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축만제 남측에 있는 '항미정'은 독립운동 결사체인 '서호 구국민단' 이야기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저수지는 철새들의 낙원이기도 하다. 둘레길을 걷다 보면 고고한 자태로 선 중대백로부터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물닭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따금 흰뺨검둥오리, 가마우지 등이 저수지를 새까맣게 뒤덮거나 하늘을 나는 장관도 ‘목격’할 수 있다. 서호저수지 둘레길 산책로를 걷다 보면 만나는 ‘항미정(杭眉亭)’은 1831년 화성 유수 박기수가 세웠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 결사체인 서호 구국민단을 조직하거나 비밀리에 준비 모임을 하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바라보는 ‘서호낙조’는 수원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세월이 흘러 시설물에 가린 전망이 아쉽다.

'서호공원' 둘레길에서 바라본 '축만제' 일대 풍경. 도시화로 아파트가 둘러싸인 도심 가운데 있는 정조시대 저수지는 농업용수 공급의 기능 대신 힐링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수원화성 밖에는 축만제 외에 '만석거' '일월저수지' 등 공원화된 인공 저수지가 여럿 남아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축만제와 함께 차로 1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만석거’도 가 볼 만하다. 일대가 ‘만석거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만석거는 장안문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한 대유평에서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 만든 저수지다. 만석거의 물로 해마다 대유평은 풍년을 이뤄 수원의 백성은 풍요로움을 누렸다고 전해진다. 경치도 좋아 시인 묵객들에게 수원추팔경 중 하나인 ‘석거황운(石渠黃雲·만석거 벌판이 황금 물결을 이룬 풍경)’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수원화성이 완성되던 해인 1796년에 정조가 편액을 내렸다는 만석거의 ‘영화정’은 정조가 수원에 방문할 때마다 거쳐 갔다하는 관문. 영화정은 일제강점기에 소실됐다가 1996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복원됐다. 축만제와 만석거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의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등재됐다.

◇가을꽃 구경 ‘일월수목원’

국립농업박물관과 축만제에서 차로 10분 남짓 떨어진 ‘일월저수지’도 지나칠 수 없다. 1941년 농업용 저수지로 조성된 일월저수지 역시 일월공원을 곁에 두고 있어 산책로 겸 나들이 명소로 인기다. 지난 5월 ‘일월수목원’이 개관하며 인근 국립농업박물관과 함께 ‘필관(필수 관람) 코스’로 주목받고 있다. 논이었던 기존 지형과 저수지 특성을 활용해 자연주의 정원으로 꾸민 수목원은 천상의 화원 같다. 입구엔 ‘제13회 대한민국 조경대상’에서 공공부문 산림청장상, ‘2023 대한민국 국토대전’ 문화경관 분야 국토교통부 장관상 수상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일월수목원'의 전시 온실에서는 뉴질랜드와 호주 식물을 비롯해 선인장 등 건조기후대 이국 식물들이 반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핑크뮬리, 수크령 등 가을꽃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일월수목원'의 야외 정원. 일몰 무렵 일월저수지 위로 해가 질 때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일월저수지와 이어진 듯 꾸민 야외 정원 덕분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시원한 개방감이 느껴진다. 일몰 무렵엔 저수지 위로 노을이 더해져 감성적 풍경을 선사한다. 10만1500㎡ 규모 수목원엔 2016종 42만9000여 본의 식물이 깃들어 자란다. 전시온실에 들어서면 건조기후대를 주제로 한 식물과 꽃이 반긴다. 호주와 뉴질랜드 식물 존에는 ‘방크시아’와 물병 모양의 ‘물병나무’, 캥거루 앞발을 닮은 ‘캥거루포’ 등도 만날 수 있다. 크고 작은 선인장이 이어지는 사막정원을 지나면 ‘오아시스 가든’이 나온다. 야외 정원에선 수원 지역의 식물을 비롯해 수원화성을 짓는 데 기여한 다산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정원’도 있다. “다산의 시에 등장하는 식물들을 주로 심었다”는 게 수목원 측의 설명이다. 습지원에 이르면 수변 식물뿐 아니라 오리 등 조류를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월수목원 홈페이지에서 ‘투어 프로그램’ 신청 후 방문하면 더 알차게 둘러볼 수 있다.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 또는 연휴인 경우 그 다음 날 휴관)과 수목원에서 정한 기타 휴관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운영하며 관람료는 성인 기준 4000원(주차료 별도).

◇'화서공원’엔 은빛 억새 군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은 발걸음 할 때마다 다양한 정취로 다가온다. 서수원 여행의 마침표를 찍으려면 수원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부근 ‘화서공원’과 ‘서북각루’로 갈 일이다. 화서문과 화서공원 일대는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 이맘때면 은빛 억새가 바람결에 파도친다. ‘동북공심돈’ 외성 부근과 함께 가을 ‘수원화성 억새 맛집’으로 꼽힌다.

이맘때면 억새가 군무를 추는 '서북각루'는 '동북공심돈'과 함께 '수원화성 억새 맛집'으로 꼽힌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억새가 반짝거리는 아침도 좋지만, 해 질 녘 풍경이 더 서정적이다. 성벽을 따라 억새 군락을 내려다보며 걷다가 화서문 부근에서 다시 서북각루 방향으로 성벽과 억새 군락 사잇길을 걸어볼 것. 길을 잃어도 좋을 만큼 호젓한 운치에 더해 태평성대를 꿈꾼 왕의 도시가 억새 너머, 발 아래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