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자율형사립고 입시 실패, 2019년 대학 입시 실패, 2021년 목표 학점 취득 실패, 2022년 장학금 실패….
서울 명륜동의 대학 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조금 독특한 이력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연도별 실패의 순간을 떠올리며, 당시의 감정을 서술하는 공란을 채워나갔다. 이름하여 ‘실패 이력서’다. “나는 내가 꽤 담대한 사람인 줄 알았다. 생각보다 겁이 많았다. 멘털이 한 번 흔들리니 걷잡을 수 없었다… 센 척하는 대신 단단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실패는 생각하기 나름. 다시 도전하는 사람과 좌절에 머무는 사람이 있을 뿐.” 이력서를 영어로 ‘CV’라고 하는데, 라틴어 Curriculum Vitae의 약자다. ‘삶의 경주’를 뜻한다. 넘어지지 않고 완주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성균관대학교가 지난주 ‘실패 기념 주간’을 진행한 이유다. 자신의 실패를 나뭇잎에 적어 ‘실패 나무’에 붙이는 등의 행사가 열흘간 펼쳐졌는데, 특히 ‘실패 이력서’는 2010년 과학 잡지 ‘네이처’에 실린 “누락된 진실을 상기시키고 다시 시작할 영감이 될 수 있다”는 실패 기록의 효용성에 바탕해 올해 처음 시도한 것이다. 신입생 이채은(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씨는 “대학생은 취업이나 금전 문제 등의 여러 실패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지만 대응 경험은 부족하다”면서 “대학에서 실패를 격려해준다면 당황하지 않고 좀 더 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성공 어렵다, 하지만 실패도 어렵다”
성공을 편애하던 대학이 달라지고 있다. “시행 착오의 경험을 나누고 실패에 대한 부정적 정서 대신 학생의 자아 탄력성을 키우자”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성균관대 학생성공센터 측은 학생 344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분석도 병행했다. 문항은 두 개였다. 어떤 일을 못 해내고 있을 때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는가.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걱정하는가. ‘그렇다’고 답한 비율이 각 51%, 58%를 차지했다. ‘그렇지 않다’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자신에게 가혹하고, 남의 눈에 예민한 ‘모범생’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대학 측은 결과 보고서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도전 의지 상실 예방을 위해 개인적 차원의 믿음을 키워주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실패 수용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교수진도 나섰다. 총장을 포함한 각 분야 교수 6명이 자신의 실패 경험을 고백하는 영상을 촬영해 유튜브에 공개한 것이다. 사법고시가 아니라 교내 ‘사법고시 준비반’ 시험조차 패스하지 못했던 남궁주현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사 과정 시절 정부 관료 앞에서 보고서 수치를 발표하다 백분율이 맞지 않아 “박살이 났다”는 김민아 사회복지학과 교수…. 만화가의 꿈을 꺾었고 미대 시험에도 낙방했던 손세형 건축학과 교수는 이렇게 조언했다. “성공은 너무 어렵다. 인생은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아니다. 이루지 못한 것이 실패가 아니라 거기에 주눅들어 다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실패라고 한다면, 실패도 성공만큼이나 하기 어려운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말자.”
◇힘들 때 일류는 웃는다
지난 1일 밤, 공부 도사들이 모인 대전 카이스트에서는 ‘망한 과제 자랑 대회’가 열렸다. 실패의 경험을 10분 내외의 스탠드업 코미디 형태로 풀어내는 자리였다. 대학원생 문진우(생명과학과)씨가 무대에 올랐다. “‘이러다 암 걸리겠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연구하던 중이었습니다. 주제가 ‘폐암의 뇌 전이’였는데요, 정말 쓰러져버렸죠.” 2018년 여름 우뇌에서 직경 1㎝짜리 혈관종이 발견됐다. “건강이라는 인생의 과제를 망쳐버린 겁니다. 만 24세 뇌질환 환자. 이제 뭐 해먹고 살지? 기왕 망한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보자. 교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연구 좀 더 해보겠다고. 결국 일주일 전에 박사 논문 심사까지 잘 마쳤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별거 아니에요.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낡은 티코로 유라시아 횡단하려다 좌절(박정수), 과외로 번 돈 주식으로 날린 사연(배서연) 등 10명의 실패기가 박수와 환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날 행사는 지난 2일까지 2주간 운영된 ‘실패 주간’ 일환으로, 실패 경험을 분석해 시사점을 도출하려 2021년 교내에 설립된 ‘실패연구소’가 처음 주최한 것이다. “실패는 누구나 겪습니다. 성공을 자랑스레 말하는 것처럼 성공의 밑거름이 되는 실패 또한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날 무대가 차려진 창의학습관 로비에서는 ‘실패 사진전’도 함께 열렸다. 일상에서 포착한 실패의 순간 10여 점이 글귀와 함께 놓여 있다. 흰색 운동화 사진, 제목이 ‘그때는 큰 일인 줄 알았지만’이다. “새 신발이 흙탕물에 엉망이 됐다. 열심히 닦아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작은 얼룩들이 계속 신경에 거슬렸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지금, 얼룩 따위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실패 역시 그런 것 아닐까.”
◇실패 축하합니다, 도전하셨군요
교육 강국 핀란드의 명문 알토대학교는 실패의 명소다. ‘세계 실패의 날’(10월 13일)이 태동한 곳이기 때문이다. 2010년, 핀란드를 대표하는 통신 장비 업체 ‘노키아’가 휘청대던 무렵이었다. 위기가 닥치자 인재들은 ‘안전’으로 노선을 변경했다. 도전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자 당시 이 대학 창업 동아리였던 알토이에스(AaltoES) 멤버들이 청년 창업 확산을 위해 실패를 독려하는 날을 제안한 것이다. 유명 기업인이 학교를 찾아 자신의 실패와 교훈을 털어놓는 등의 행사가 잇따랐고, 기업 문화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세계적 모바일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으로 유명한 핀란드 스타트업 수퍼셀은 프로젝트가 좌초할 경우 해당 직원과 팀을 위해 고급 샴페인을 깐다. ‘실패 축하 파티’다. 창업자 일카 파나넨(45)은 “만약 한 해 동안 실패보다 성공이 많다면 실망할 것”이라며 “모험을 안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영감을 얻은 ‘실패박람회’가 2018년부터 정부 주도로 매년 열렸다. “국민의 재도전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였다. 각 분야 참여자들이 공유한 실패 경험을 통해 정책 의제를 발굴하는 행사로, 지난해에는 30건의 아이디어가 지자체 정책에 반영됐다. ‘실패박람회’는 올해부터 ‘재도전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실질적 지원 방향으로 전환됐다. 공공·민간기업과 협업해 12개 지역 중장년 및 청년층에게 맞춤 컨설팅 및 네트워크 등을 제공한 것이다. 그러나 내년에도 ‘재도전 프로젝트’가 가동될지는 미지수다.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예산 등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