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마순사는 학생 떼를 제지하려고 말고삐를 휙 돌린다. 그와 동시에 도청 편에서는 별안간 으악! 소리가 들리자 후두두 후두두 콩 볶는 소리가 바로 발 밑에서 나듯이 난다. 그 한순간이 지나니까 사방이 괴괴하여졌다. (…) 그러나 기마순사에게 길이 막혀 갈팡질팡하던 학생들만은 그 고함과 총소리에 피가 다시 끓는지, 말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틈을 족제비처럼 살살 빠져서 굳게 닫힌 철창문을 바라보고 단숨에 뛰어들어간다”(염상섭, ‘그 초기’, 1948)
1937년 만주로 이주한 소설가 염상섭은 압록강 건너편 국경도시 안둥에서 해방을 맞았다. 귀국길에 신의주에 머물던 염상섭은 ‘도청 밖’에서 ‘학생의거’를 목격했다. 3년 후 그 사건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반면, 월남 후 종교인, 사상가, 재야 운동가로 활동할 함석헌은 의거 당일 평북인민위원회 교육부장으로 ‘도청 안’에서 참상을 체험했다. 그때의 악몽을 글로 옮기기까지 그에게는 26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출근해서 좀 있다가 정오쯤 되니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 총소리가 몇 방 탕탕 하고 났다. 방을 뛰어나와 정문 앞을 나가니 저기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오는 것이 보였다. 보안부장 한웅이란 놈, 그 부하 차정삼이란 놈이 “쏴라! 쏴라!” 다급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 학생들은 티끌을 차며 도망했고, 문 앞까지 들어왔던 몇이 꺼꾸러졌다. (…) 다가가 보니 셋이 넘어져 있지 않나. 까만 교복에 모자를 쓴 채 엎어진 것도 있고, 자빠진 것도 있었다. 쓸어안아 일으켰다. 죽었구나! 죽었구나!”(함석헌,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1971)
공산당과 소련군의 학정에 맞서 신의주 6개 중등학교 3500여 학생이 일제히 들고일어난 ‘신의주 학생의거’는 ‘해방 100일’을 맞은 1945년 11월 23일에 발생했다. 그날은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 15명이 미군 수송기편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한 날이기도 했다. 공산당 보안대와 소련군의 강압적 진압 결과, 학생 20여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다.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유형되었다. ‘신의주 반공학생의거’로도 일컬어지는 이 사건은 1956년 10월 소련의 압제에 맞서 일어난 ‘헝가리 혁명’보다 11년 먼저 일어난 ‘세계 최초의 반소·반공 운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신의주가 처음부터 ‘반공의 도시’는 아니었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신의주와 용천군 일대는 땅이 평탄하고 기름져 쌀 생산이 많은 부유한 고장이었다. 유학생도 많았고, 기독교가 번성했다. 한반도 대부분에서 그랬듯, 해방 직후 이 지역 학생들도 소련군과 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조선을 해방해준 군대’로서 소련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점령지에서 살인·방화·약탈·성폭행 등 갖은 범죄를 자행하면서 여론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런 소련군을 두둔하고, 노동자, 농민을 앞세워 사유재산을 위협하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도 싸늘히 식어갔다. ‘공산당 앞잡이’로 불리던 용천군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용흡은 용암포 유일의 수산학교를 “유산계급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은 필요 없다”며 폐교하고, 교사를 접수해 공산당 당원 훈련소로 사용했다.
11월 18일, 용암포 구세국민학교 교정에서 ‘시민대회’가 열렸다. 좌익 주최였는지, 우익 주최였는지 ‘시민대회’의 성격에 대한 증언은 엇갈리지만, 그 행사에서 학생 대표로 단상에 오른 한 수산학교 학생이 공산당이 당원 훈련소로 쓰고 있는 수산학교의 반환을 요구하며, 공산당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는 증언은 일치한다. 시민들이 연설에 호응하면서 시민대회는 ‘반공 시위’로 옮겨붙었다. 놀란 이용흡이 신의주로 도주하려 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학생 시위대 20여 명은 요구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신의주로 가는 길목에서 이용흡을 기다렸다. 그때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농민조합원 100여 명이 꽹과리를 치면서 다가왔다. ‘적색 농민들’은 몽둥이와 망치로 학생들을 마구 구타했다. 유지들이 말리자 “너희는 자산가 즉 우리의 적”이라며 덩달아 구타했다. 12명의 학생이 중상을 입었고, 말리던 제1교회 홍석황 장로가 사망했다.
‘용암포 사건’이 신의주 학생 사회에 알려지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신의주 6개 중등학교 대표들은 11월 23일 정오 사이렌 소리에 맞춰 6개 학교 학생 3500명을 3개 반으로 나누어 제1반 도인민위원회, 제2반 도공산당 본부, 제3반 시보안서를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제일공업학교 적색 교사의 밀고로 공산당은 학생들의 거사 정보를 미리 알고 대비했다.
예정된 시간, 학생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 한 손에는 붉은 기를 들고, 스탈린 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공격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반소·반공이 목적이 아니라 “공산주의라는 미명하에 숨은 악덕 분자의 숙청”이 목적임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돌멩이와 몽둥이로 무장한 10대 학생들을 공산당은 기관총, 따발총, 전투기까지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신의주 학생의거 이후 월남한 평안중학 학생 김삼문은 1946년 4월 서울에서 거행된 ‘서북사건 진상보고회’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평안중학 행렬이 신의주에 이르렀을 때 시내에 총소리가 은은하고 검은 연기가 충천함을 보고, 우리는 학생의 피를 직감했습니다. 이때 비행장으로부터는 비행기 두 대가 우리들에게 사격을 하고, 그 후 보안서원을 만재한 화물자동차 두 대가 출현하여 또 사격을 해왔습니다.”(조선일보, 1946.4.4)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즉각 신의주로 김일성을 대표로 한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다. 김일성은 “사건의 책임은 학생들도 아니고 인민정치위원회나 공산당도 아닌, 배후에 있는 일부 불량한 ‘반동분자들’에게 있다”고 발표했다. 의거 이후, 좌파와 우파가 공존하던 북한에서 ‘반동분자 숙청’이라는 명목 아래 대대적인 우파 탄압이 시작되었고, 80만을 헤아리는 ‘반공 청년’의 대규모 월남이 본격화되었다. 12월 6일에는 의거 당시 학살당한 신의주 제일공업학교 4학년생 박태근군의 모친이 아들의 유골을 안고 월남했다.(동아일보, 1945.12.8)
대한민국 정부는 1957년 11월 23일을 제1회 ‘반공학생의 날’로 지정해 신의주에서 희생된 학생들의 얼을 기렸다. 1968년 제12회 ‘반공학생의 날’에는 자유총연맹 구내에 ‘학생반공의 탑’을 건립하고, 희생당한 박태근군의 유골을 안장했다. ‘반공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공포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폐지되었다.
<참고 문헌>
기광서,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운동의 실상’, 동북아연구 제34-2호, 2019
연정은, ‘해방 직후 북한 내 ‘반동분자’ 등장과 그 인식의 변화’, 역사연구 제25호, 2013
염상섭, ‘그 초기’, 백민 제4-5호, 1948
조동영,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반공의거’, 북한, 1985.8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한국학생건국운동사’,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1986
함석헌,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 사건’, 씨알의 소리, 197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