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선창’·1941)
‘선창’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데뷔 2년 차 신인 가수 고운봉은 일약 조선 최고의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에서 80년 이상 수많은 가수가 무대에 올렸고, 노래방 애창곡 순위에서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1997년 조영출의 유족들이 소송으로 저작권을 회복하기까지, 이 노래의 작사가는 고운봉의 형 고명기로 등록돼 있었다.
1913년 충남 아산 탕정에서 태어난 조영출은 와세다대 불문과 출신 엘리트 시인, 극작가였다. 1934년 ‘서울노래’를 작사한 이래 조명암, 금운탄, 이가실, 김다인 같은 예명으로 ‘세상은 요지경’(1939), ‘꿈꾸는 백마강’(1940), ‘목포는 항구다’(1942) 등 히트곡 수십 편을 작사했다. 1948년 월북할 때까지 작사한 550여 편 중 조명암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만 424곡이었다.
일본인 조선 가요 애호가 사이토 초지는 매달 발매되던 오케레코드 신곡 음반을 수집했는데, 레코드 라벨에는 십중팔구 ‘조명암 작사’라고 인쇄돼 있었다. 그는 조명암이 어쩌면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작사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조명암은 한 사람이었고, 놀랍게도 그가 다른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이 130여 곡 더 있었다. 조영출 다음으로 다작(多作) 작사가였던 박영호는 ‘짝사랑’(“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1937), ‘오빠는 풍각쟁이’(1938), ‘번지 없는 주막’(1940) 등 120여 편을 발표했다. 조영출과 박영호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3분의 2를 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후 조영출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선연극동맹 등을 조직하고 좌익 문예 운동을 주도했다. 일찍이 김일성을 흠모한 조영출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다룬 희곡 ‘독립군’을 창작해 1946년 3·1절 기념 공연으로 동양극장에 올렸다. ‘독립군’은 김일성을 극화한 첫 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조영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하는 남조선 대표 일원으로 선출돼 월북했다. ‘김일성 장군’의 품에 안긴 ‘환희’와 ‘감격’을 그는 이렇게 시로 옮겼다. “아아, 감사하여라/ 쏘베트 인민의 은혜여/ 아아, 행복하여라/ 이 땅에 솟은 자유의 태양이여 (…) 나의 조국은 이제/ 그 이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으로’, 1948) 김일성은 조영출이 월북해 처음 무대에 올린 가극 ‘꽃신’(1949)을 관람하고 “작품이 아주 좋다.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렇듯 민족적 정취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치하했다.
1946년 박영호가 월북한 데 이어 조영출마저 월북하자, 남한 가요계는 공연 레퍼토리의 3분의 2가 금지곡으로 지정될 위기에 처하는 대혼란에 빠졌다. 음악인들은 가사의 일부를 개사하고, 작사가를 ‘바꿔치기’하는 등 궁여지책으로 일부 작품의 금지곡 지정을 막았다.
6·25 남침을 앞두고 조영출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을 담아 전시 가요 ‘조국보위의 노래’를 작사했다. “정의의 총칼로써 원쑤를 무찔러/ 공화국은 영원히 부강하게 살리라/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인민의 조국을 지키자 목숨으로 지키자” 남한 구석구석 인민군의 총구가 향하는 곳마다 이 노래가 함께했고, 지금도 대표적인 인민군 군가로 애창된다.
1950년 6월, 서울이 인민군 손에 떨어지자, 조영출은 ‘인민군 종군 작가’로 2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았다. ‘울며 헤진 부산항’(1940), ‘서귀포 칠십리’(1943), ‘고향초’(“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1948) 등 히트작 수십 곡을 함께 만든 작곡가 박시춘을 만났을 때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두 사람은 7~8년 전 다수의 ‘군국 가요(친일 가요)’를 함께 만든 흑역사도 공유했다. 조선인이 창작한 군국 가요 62편 중 조영출이 작사한 작품이 40편이었다. 그중 박시춘과 함께 만든 작품이 ‘아들의 혈서’(1942), ‘결사대의 아내’(1943), ‘혈서지원’(1943) 등 12편이었다.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혈서지원’)
박시춘은 조영출에게 월북 이후 그의 작품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일부 작품은 작사가를 바꾸고, 가사 일부를 변경해 불리기도 한다고 알려주었다. 조영출이 일제 말기 조선인의 처지를 영국의 식민지 노예로 신음하던 인도 인민의 심정에 빗대 작사했던 ‘인도의 달밤’도 그중 하나였다. “아 인도의 달이여/ 마드라스교회의 종소리 울리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인도의 달밤’) 작사가 유호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신라의 달밤’(1949)은 신인 가수 현인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전후에도 조영출은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만고의 영웅이신/ 절세의 혁명가이신/ 아아 김일성 원수이시여/ 당신은 우리 인민들 속에/ 광명으로 오셨습니다/ 행복으로 오셨습니다”(‘수령이시어 만수무강하시라!’·1968) 김일성은 그를 만날 때마다 ‘조령출’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낙관적으로 살고, 운동을 많이 하라”며 건강까지 챙겨주었다.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조영출은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 북한 예술 분야 최고위직을 두루 지냈다.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 등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남한에서 조영출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올랐다. 그러나 북한에서 조영출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친일 이력을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의 친일 이력을 파헤치거나 문제 삼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과 ‘경애하는 지도자’가 아끼는 작가의 흠결을 들춰내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반역이었다.
1992년 대한민국 문공부는 조명암의 작품 61편을 해금해 음반 제작과 판매를 허용했다. 1994년 방송심의위원회는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조명암을 비롯한 월북 작가 작품 64편을 포함한 방송 금지곡 847곡을 해제했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조영출 시와 노래비’(‘고향초’), 충남 예산 덕산온천에 ‘고운봉 노래비’(‘선창’), 목포 유달산에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 제주도 외돌개 해안에 ‘서귀포 칠십리 노래비’ 등 대한민국 곳곳에는 작사가 조영출의 ‘예술혼’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다.
<참고 문헌>
김효정, ‘조명암 대중가요 연구’, 낭만음악 제13-2호, 2001
이영미, ‘일제 말 대중가요의 해방 후 개작 양상과 그 의미’, 대중음악 제3호, 2009
이영훈,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휴앤스토리, 2021
이준희, ‘일제시대 군국가요 연구’, 한국문화 제46호,
장유정·주경환, ‘조영출 전집1: 대중가요’, 소명출판, 2013
정우택·주경환, ‘조영출 전집2: 시와 산문’, 소명출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