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서울 서초구 잠원스포츠파크 실내 테니스장. 파란색 코트를 뛸 때마다 하나로 묶은 포니테일과 테니스 스커트가 찰랑거렸다. 20~30대 테니스 동호인 50여 명이 채를 들고 코트에 섰다. 이곳은 가로 23.78m, 세로 10.97m 테니스 코트 3개가 있는 곳. 평소라면 4명씩 경기를 하고 있겠지만, 이날은 ‘경기 없는 테니스 대회’였다. 아직은 게임을 뛸 수 없는 ‘테린이(테니스+어린이)’들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기간에 서울 성동구에 문을 연 실내 교육 시설 ‘테니스 포레’의 2주년 행사였다. 게임으로 승부를 가리는 대신, 10초 동안 라켓 들고 사이드 스텝, 뒷걸음질로 오는 공 넘기기 등으로 진행됐다. 김세희 아나운서는 “공이 잘 맞을 때 느낌을 사랑한다”며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고 했다. 다비드 피에르 잘리콩 한불상공회의소 회장은 “테니스를 오래 쳤지만, 이렇게 젊은층이 다양한 방법으로 테니스를 즐기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했다.
◇테니스 3.0 시대
MZ세대 사이에서 테니스 열풍이 불고 있다. ‘골린이(골프+어린이)’에 이은 ‘테린이’의 등장이다. 현재 국내 테니스 인구는 약 60만명. 올해 테니스 시장은 3600억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카드가 발표한 테니스 이용 금액 통계에서는 20~30대가 전체의 약 60%를 차지했다.
테니스는 유럽에서 탄생한 ‘귀족 스포츠’다. 19세기 영국 버밍엄에서 변호사인 해리 겜과 그의 친구 아우구리오 페레라가 라켓을 개발했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사교 모임을 위해 배워야 할 필수 스포츠지만, 국내에서는 늘 골프에 밀렸다.
국내 1차 테니스 붐은 1980년대 시작됐다. ‘국내 테니스의 전설’ 이형택 선수가 등장했고, 아파트 단지마다 테니스장이 만들어졌다. ‘동대문 테니스 매장 거리’도 생겨났다. 그러나 1998년부터 테니스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US오픈에서 박세리라는 골프 스타가 양말을 벗으며 탄생했기 때문이다. 모든 스포츠는 ‘스타’가 있어야 흥한다. 그 후 아파트 단지에는 테니스 코트 대신 실내 골프 연습장이 들어섰다.
2차 테니스 열풍이 분 것은 2018년 호주오픈 단식에서 정현 선수가 세계 1위 노바크 조코비치를 꺾고 4강에 진출하면서다. 테니스 코트마다 ‘제2의 정현’을 꿈꾸는 학생들이 넘쳐났다. 그러나 6개월 정도 지나자 자연히 2차 붐도 사그라들었다.
현재의 테니스 3차 붐은 스타 없이 코로나 기간에 일어났다. MZ세대가 테니스를 ‘힙한 운동’으로 재발견했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등에서는 ‘테니스타그램’ 같은 태그를 달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게 유행이다. 올해 엠브레인 조사에 따르면, 테니스를 접해본 사람은 13.0%에 불과하지만, 향후 테니스를 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비율은 59.5%였다. 전현무, 엑소, 기안84 등 테니스를 치는 유명인들이 늘어나는 것도 유행에 한몫했다. 이제 ‘테니스 3.0′ 시대다.
◇총리급만 예약 가능하다?
“11/17(금) 20-22시, 서울시립대 웰니스센터, 혼복 2시간, 여자 1명, 구력 3년 이상, NTRP(테니스 실력 레벨) 3.0 이상.”
퇴근하기 전, 네이버 카페 ‘테니스 친구 찾기’에 글이 올라왔다. 혼합 복식 경기 2시간을 하는데 여자 멤버 1명을 구한다는 뜻이다. 하단에 적힌 전화번호로 연락했다. 여전히 멤버를 구한다는 말에 서울시립대로 향했다. 차 트렁크에는 늘 테니스 채와 테니스 옷, 테니스화가 준비돼 있다.
골프를 치고 싶다면 멤버부터 모으지만, 테니스를 치고 싶다면 코트 예약이 우선이다. 서울시의 공공 테니스장은 62개소, 그중에서도 경기를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곳은 더 적다. 각자 칠 수 있는 시간대도 비슷할 터, 예약 창이 열리는 날이면 테니스인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일명 ‘테강 신청(테니스 수강 신청)’. 유능한 클럽 회장이란, 좋은 테니스 코트를 좋은 시간대에 예약할 수 있는 사람이다.
추운 겨울이 되면 몇 안 되는 ‘실내 테니스장’의 인기는 더 치솟는다. 대표적인 곳이 올림픽공원, 서울시립대, 잠원스포츠파크, 코오롱 스포렉스, 양재시민의숲 등이다. 냉난방이 되는 귀뚜라미 크린 테니스코트는 ‘테니스 코트의 에르메스’로 불린다. 1시간에 5만5000원으로 비싸지만, 예약을 못 해 안달이다. 일부 코트는 “총리급 아니면 예약이 안 된다”는 말도 있다. 서울시립대 코트는 학생들과 교직원에게 먼저 예약을 오픈한다. 테니스 모임마다 시립대생과 교직원의 인기가 높은 이유다.
◇테니스의 묘미는 뒤풀이
그러다 보니 테니스는 클럽이나 동호회 가입이 필수다. 연 단위로 코트를 예약해 놓기 때문이다. A동호회는 ㄱ테니스장을 토요일 오전 10~12시 사용하고, B동호회는 ㄴ테니스장을 일요일 오후 2~4시 사용하는 식이다. 여러 클럽에 가입해 놓고 내가 원하는 시간대에 원하는 코트에 가서 경기한다. 클럽 내 연애를 할 경우, 다른 클럽으로 도망가기 힘들다는 뜻이다.
테니스는 혼자 연습할 수 없는 운동이다. 1인당 차지하는 공간도 넓다. 271㎡ 면적 코트를 둘 혹은 넷이 쓴다. 골프처럼 나란히 걷거나, 카트를 함께 타고 움직이는 경우도 없다. 테니스를 치기 위해 만나면 보통 ‘인사하기→랠리하기→경기하기→집에 가기’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대부분 ‘뒤풀이’에서 싹튼다.
테니스에 빠져 발톱이 빠져라 치러 다니던 시절, 주변에서 이런 문의가 들어왔다. “나도 테니스 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시작할 수 있어?” 그럼 나는 되묻는다. “테니스를 잘 치고 싶은 거야? 테니스를 통해 연애를 하고 싶은 거야?” 전자일 경우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치는 코치와 빡겜(빡센 게임)으로 유명한 클럽을 소개해준다. 만약 후자라면 멋진 남녀가 많은 클럽으로 안내한다. 코치에게 배우지 않아도, 클럽 내 회원들이 테니스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곳의 묘미는 ‘뒤풀이’. 전체가 아닌 몇 명에게만 카카오톡으로 시간과 장소가 전달된다. 이곳에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한다. 사건은 밤과 술 때문에 벌어지는 법이다.
주요 테니스장마다 단골 뒤풀이 장소들이 있다. 잠원스포츠파크는 잠원역 근처 ‘이모네포차’다. 아나고회, 삼치구이 등이 맛있다. 잠원에서 주로 테니스를 치는 그룹 노을의 강균성 등이 좋아한다. 서울시립대 근처 뒤풀이 장소는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에 있는 ‘한옥정’이다. 가수 성시경이 테니스를 치고 가는 단골집이다.
◇스타 선수 나와야 인기 지속
테니스를 시작한 건 2017년이었다. 친구가 “한남테니스장에 수업 예약해놨으니 가자”고 해서 따라나선 것이 계기였다. 첫 관문은 신발이었다. 서울 시내 어느 스포츠 매장을 가도 테니스화가 없었다. 수소문한 결과 아디다스 이태원점에 한 켤레가 있다고 했다. 흰 바탕에 초록색으로 예쁘게 장식된 테니스화를 샀고, 그날 이 신발은 황토색으로 변했다. 한남테니스장은 클레이코트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휠라, 헤드 등 스포츠 브랜드뿐만 아니라 이탈리안 브랜드 ‘구찌’, 뉴욕 디자이너 브랜드 ‘유나양’, 박윤희 디자이너의 ‘그리디어스’ 등에서도 테니스 제품이 나온다. ‘테니스 포레’는 자체 브랜드도 만들고 있다. 테니스를 배우지 않아도, 옷부터 사는 이들도 늘어났다.
실내 테니스 코트들도 많아졌다. 경기가 아닌 수업을 위한 반코트가 대부분이다. 대한테니스협회에 따르면 전국 실내 테니스장은 2021년 기준 700여 개로 코로나 이전보다 6배 늘었다.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무인 테니스장이나 스크린 테니스장도 생겨났다. ‘릴리어스’처럼 스마트폰으로 배울 수 있는 앱도 출시됐다. 테니스 예능 프로그램도 탄생했다.
테니스 3.0 시대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골프 인기가 식으면서 중고 거래 플랫폼에 골프채 매물이 쏟아지던 지난해 말 같은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현재 테니스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재미를 붙이기까지 진입 장벽이 높다. 1~2시간 테니스 치자고 골프처럼 먼 곳을 다녀올 수는 없다. 테니스 코트가 있는 펜션이나 캠핑장도 부족하다. 조민정 테니스 포레 코치는 “인프라가 더 좋아져야 하고, 스타 선수들이 나와야 이 인기가 지속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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