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구 전 현대차 최고기술경영자(CTO)가 지난 21일 서울 현대모터스튜디오에서 1970년대 생산된 포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니는 '한국 자동차의 마에스트로'로 불리는 그가 포니부터 에쿠스에 이르기까지 34년간 개발한 차 35종 중 '첫 자식'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970~80년대를 산 한국인이라면 뇌리에 각인된 장면이 있다. 새로 깔린 전국의 도로를 메운 경쾌한 직선미의 자동차. 흑백 화면 같던 전쟁의 폐허를 딛고 허리띠를 졸라맨 나라의 경제 성장이, 마침내 내 가족의 알록달록한 행복과 활기로 치환되고 있다는 실감. 막 태동한 중산층 가정마다 가족사진 배경으로 내세운 재산 1호. 바로 현대차가 만든 첫 국산 자동차 ‘포니(Pony)’다.

포니를 탄생시킨 현장의 주역은 이충구(78) 전 현대차 사장이다. 이 ‘포니의 아버지’는 1969년 입사해 2002년 최고기술경영자(CTO)로 퇴직할 때까지 34년간 포니부터 스텔라·아반떼·쏘나타·그랜저·에쿠스 등 35종의 신차 개발을 진두지휘해 ‘한국 자동차의 마에스트로’라 불렸다. 2019년에는 자동차 분야 최초로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가 됐다. 최근엔 한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3대 자동차 수출국에 오르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첫 책 ‘이충구의 포니 오디세이’를 펴냈다.

이 전 사장은 “포니 신화는 중화학공업과 수출 산업 육성이라는 국가 비전을 제시한 대통령, 현장 기술자들을 최고로 대우하며 그 꿈을 실현시킨 기업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엔지니어들이 한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준 리더들 덕에 나도 한눈팔지 않을 수 있었다”며 “그 시절 이야기가 목표를 잃고 위축된 젊은이들에게 작은 영감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1969년 경부고속도로 구간 중 두 번째로 개통된 수원~오산 구간 개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축하 샴페인을 도로에 뿌리고 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된 경부고속도로는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조선일보 DB

◇포니는 왜 탄생했나

–포니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1974년 저를 포함한 현대차 엔지니어 다섯 명이 난생처음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갔습니다. ‘한국의 첫 고유 모델 차를 개발하라’는 특명을 받았죠. 당시 한국은 자동차를 어떻게 만드는지도 몰랐어요. 유럽 본고장에 가서 밑바닥부터 기술을 배워오라고 했습니다. 첫 국산 고유 모델을 만들어 국내 차 수요를 충당하는 것은 물론 해외 수출까지 하겠다는,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였어요. 현대차가 1967년 창립됐고, 저는 1969년에 입사한 6년 차 스물아홉 살 대리였는데 그런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겁니다.”

–당시 우리 자동차 산업 수준은 어땠나요.

“자동차를 직접 만든다고 하니 모두 ‘말도 안 된다’ ‘미쳤다’고 했어요. 그때 한국은 군소 업체 몇 곳이 6·25 때 유엔군이 남기고 간 트럭·버스를 개조하거나 수입 부품을 조립해 굴리는 수준이었죠. 현대도 미국 포드의 코티나 부품을 들여와 하루에 두세 대 조립하고 있었습니다. 울산만 공장은 비만 오면 뻘밭이 되고 지붕에서 물이 샜어요.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고 1968년 경인고속도로,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깔았지만 여전히 전국 도로의 80%는 비포장이었습니다. 자동차 불모지였죠.”

–그런 나라 젊은이들이 외국에서 신기술을 배워오려니 어려움이 많았겠군요.

“외국인들은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몰랐고, 우리는 자동차 도면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서로가 ‘맨땅에 헤딩’이었죠. 우리는 이탈리아 장인들이 설계·디자인을 하는 걸 종일 들여다보면서 닥치는 대로 배우고, 수없이 따라 그리고 적었습니다. 말이 안 통해 몇 번씩 묻고, 밤새워 사전을 뒤져가며 기록했어요.”

1974~1977년 포니 프로젝트 당시, 이충구 전 사장이 이탈리아에서 매일 기록한 작업 일지들. 고려의 문신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처럼, '이대리 노트'는 현대차의 개발 청사진이 되며 전설적 자료가 됐다. /정시행 기자

매일 반복되는 도면 정리와 일지 작성은 이 전 사장이 도맡았다. 이렇게 1년간 이탈리아 기술 노하우를 빼곡히 볼펜으로 적은 노트들은 ‘이(李) 대리 노트’로 불렸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목화씨처럼, ‘이 대리 노트’는 귀국 후 신차 설계에 필요한 시설을 구축할 기초 자료이자 후배 엔지니어들의 개발 지침서가 됐다. 컴퓨터도 로봇도 없던 시절, 한국 자동차 입국(立國)의 청사진이 된 이 전설적 자료는 올해 현대차가 헤리티지(heritage·유산) 프로젝트로 마련한 기획전 ‘포니의 시간’에도 전시됐다.

◇충청도 방앗간집 막내의 꿈

–포니는 글로벌 프로젝트였죠?

“포니 설계와 디자인을 이탈리아가 맡았다면, 플랫폼과 섀시 기술은 일본 미쓰비시, 대량생산 시스템은 미국 포드의 협력을 받았습니다. 남들이 백 년에 걸쳐 구축한 자동차 생산 환경을 2~3년 만에 따라잡아야 했어요. 한국은 포니 탄생과 함께 세계에서 아홉째로 자동차 고유 모델을 보유한 나라가 됐습니다.”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1975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포니가 처음 등장했습니다. 당대의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종이접기를 형상화해 동양미를 살린 최첨단 디자인도 파란을 일으켰어요. 고무된 정주영 회장은 ‘내년부터 포니를 대량생산하겠다’고 대국민 약속을 했어요. ‘포니 정’ 정세영 사장은 ‘포니가 남산을 못 올라가면 우리는 망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이 만 29세 대리 시절인 1975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첫 출품한 포니 앞에 선 모습. 그는 퇴직 17년 뒤인 2019년 자동차 분야로는 국내 처음으로 국가 과학기술 유공자가 됐다. /현대차

포니가 첫 출시된 1976년에만 1만726대가 팔리며 국내 승용차 시장에서 44%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당시 판매가는 228만9000원이었다.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30평형 분양가가 865만원, 전문직 월급이 10만원대일 때였다. 포니는 이듬해 중남미를 시작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 등 60여 국으로 수출됐다. 각국 대리점마다 대기 고객이 줄을 섰다. 울산 공장은 연간 10만대, 30만대로 생산 라인이 쑥쑥 증설됐다.

포니는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그런 상징성 덕에 단종된 포니를 아직 간직하고 모는 사람이 전국에 1600명쯤 된다. 중고 한 대에 수천만~1억원대를 호가한다. 이 전 사장은 “포니 만들 때 인생의 희로애락을 최대치로 경험하다 보니, 무슨 일이 어떤 순서로 일어났는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며 “이후 신차 개발 때마다 라면 먹으며 밤을 새워도 행복했다”고 말했다. 다만 “아내가 아이들 낳고 키울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한 게 유일한 회한”이라고 했다.

–어릴 때부터 기계를 좋아했습니까.

“1945년 충북 영동의 방앗간집 7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방앗간 기름때와 먼지, 덜컹거리는 소리가 신기했어요. 6·25 피란길에 셋째 누이가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섯 살 나를 업어주던 열 살 누이의 등이 아직도 기억나요. 그런 공포를 겪은 민초들은 오히려 삶의 의지가 더 불타올랐던 것 같아요. 그게 저에겐 카메라, 자동차 같은 기계였습니다.”

–자동차를 공부할 환경이 됐나요.

“1963년 서울공대에 처음 개설된 자동차 전공 1기로 입학했습니다. 학교엔 어디선가 기증받은 지게차 1대뿐이었죠. 그걸 서로 몰아보려고 안달하니, 교수님이 변속기 하나를 더 구해왔어요. 변변한 전공 서적도 없었습니다. 청계천 중고 책방을 뒤져 미군 차량 정비 매뉴얼이나 포드차 매뉴얼을 구해 읽었죠. 졸업 후 ROTC로 입대해 수송병과에 배치됐습니다. 군대에는 민간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한 차종과 정비 기술이 있었어요. 대학서 해소하지 못한 갈증을 군에서 풀었죠.”

1980년대 부산의 한 가족이 가장이 운전하는 포니 택시에 기대어 찍은 가족 사진. 1970~80년대 포니가 국내 승용차와 택시 시장을 석권하면서 이런 '포니 가족사진'이 유행했다. 포니는 '한강의 기적'이 중산층 가정의 행복으로 치환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당대의 경제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현대차

◇王회장의 영구차를 만들다

그의 자동차 인생은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을 빼고 말할 수 없다. 이 전 사장은 ‘왕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애정, 기술에 대한 호기심, 긍정적 사고 등을 고리로 깊은 동질감과 존경심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난 방앗간 출신이고, 그분도 쌀가게를 하다 기술에 눈떴다”며 “정 회장은 25세에 아도서비스(현대차의 전신인 수리업체)를 빚지고 창업했다. ‘다른 사업은 구조조정해도 자동차만은 키운다’는 애착이 컸다”고 회상했다.

–정 회장은 어떤 기업인이었습니까.

“직원들 사이엔 ‘저분만 믿고 가면 된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신입 사원과 씨름도 하고, 본인이 어릴 때 가출한 이야기도 하면서 동반자 의식을 심어줬어요. 사회와 국가가 잘돼야 한다고 항상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이봐, 해봤어?”라며 무모한 일을 밀어붙인 리더십으로 기억하는데요.

“그런 막무가내는 아니었습니다. ‘그건 왜 그렇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라고 끝없이 물어보면서 섬세하게 끌어가셨어요. 그분은 질문의 귀재였습니다. 리더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고민하고 물으니, 우리도 진심으로 고민해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책상물림 임원들에겐 호랑이였지만, 현장 기술자들은 극진히 대우했어요. 기술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 아셨던 거죠.”

–의외입니다.

“차는 2만개 부품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차장 시절 40g짜리 차 부품을 넣네 빼네 하는 문제로 회장과 논쟁한 적이 있어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더라고요. 그 후 회식을 하는데 비서실장이 ‘자질구레한 걸로 말대꾸했으니 넌 구석에 숨어 있어’ 했어요. 그런데 회장이 ‘그놈 왔나?’ 하며 절 찾았습니다. 술 한 잔 따르라더니 ‘잘 해!’ 하며 등을 두드려줬어요. 결국 그 문제는 제 의사가 관철됐습니다. 정 회장이 기술 파트에 ‘마음껏 저질러보라’며 전권을 줬기 때문에 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일했습니다.”

지난 2001년 서울 청운동을 떠나는 아산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장례 행렬. 정 회장을 위한 첫 에쿠스 영구차는 이충구 전 사장이 직접 제작했다. 그는 정 회장 영정을 '대통령 것보다 더 크게 만들어' 밤새워 걸었다고 했다. /페이스북

이 전 사장은 2001년 정 회장이 위독해지자 직접 에쿠스로 영구차를 제작,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국산 고급 영구차가 없을 때였다. 그는 “평생 한국 기업과 나라에 헌신한 분을 미국산 리무진에 모실 순 없었다. 영정 사진도 대통령 것보다 크게 만들어 걸었다. 나는 그게 정의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생전 정 회장을 처음 본 사람들은 ‘대기업 총수의 옷과 구두가 저게 뭐냐’고 수군댔어요. 신세진 사람에 대한 씀씀이는 후했지만 유독 자신에겐 엄격했어요. 빈한한 청년 시절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발인 날 청운동 자택에 들어갔더니 그분 방에 낡은 금성 TV 한 대가 있더군요. 그걸 보고 또 울었습니다.”

◇혁신·성장 막으면 미래도 없다

–현재 글로벌 첨단 기술 경쟁을 보면, 과거 한국 경제를 일으켰던 근면과 돌진만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경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무조건 열심히만 해선 넘을 수 없는 벽이 분명 있습니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아주 미세한 감성의 차이가 큰 격차를 만들어내요. 지금 세계 자동차 수출업계는 일본과 독일, 한국의 3파전입니다. 독일과 일본은 오랜 세월 축적된 기초과학과 공학 기술의 수준도 뛰어나지만, 기술 장인을 우대하고 실험 정신과 실패, 재도전을 용인하는 풍토도 남달라요. 자동차 산업은 그런 국력의 총체를 겨루는 분야입니다. 한국이 그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더 이상 발전이 힘들 겁니다.”

–모험과 실패를 용납 않는 문화가 약점이 되는군요.

“해외시장에서 자국 기업이 리콜을 한다고 해봐요. 독일·일본 언론과 국민은 ‘이것도 기술과 산업 발전의 한 과정’이라며 담담히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우리 기업을 너무 거칠게 공격해요. 돈도 주고 추켜세웠는데 뭔가 꼬인다 싶으면 바로 돌변해요. 기술은 실패를 털고 나갈 때 발전합니다. 그 과정이 지겹고 불안하니 건너뛰고, 완성된 남의 기술만 사온다? 그런 생각을 가진 기업과 나라는 망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뜨거우면 쿨한 과학을 제대로 할 수 없어요.”

현대차가 '헤리티지 프로젝트' 일환으로 최근 복원한 포니 쿠페의 모습. 49년 전 포니 쿠페를 설계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와 다시 손 잡고 미래적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1990년 단종된 포니가 33년만에 돌아왔다. /현대차

–과학이 이념 투쟁에 질식되는 면도 있지요.

“포니 성공 후 우리는 ‘포니2(엑셀)’를 만들어 대망의 미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1986년 첫해에 16만대 넘게 팔렸어요. 그런데 3년 뒤부터 싸구려 차란 혹평이 이어지더니 10년의 암흑기가 왔습니다. 만들기 편한 기존 방식에 안주하다 ‘감성 기술’ 트렌드를 놓친 겁니다. 또 다른 원인은 1987년 노조 결성이었습니다. 당시 작업 현장 모랄(morale·사기)이 엉망진창이었어요. 회사가 밖에서 전쟁을 치를 여력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기능공들이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와도 노조 기세에 눌려 축하도 못 했어요. 미국·일본 등 여느 선진국에서 자동차 노조가 한국처럼 장기 투쟁을 벌여온 경우는 없습니다.”

이 전 사장은 “잘난 사람 발목 잡는 문화, 정치와 이념이 과학기술 위에 군림하는 문화를 그대로 두면 한국의 미래는 암울하다”며 “타협과 배려, 도전과 혁신이 존중받는 풍토, 그리고 공정한 자유 경쟁을 독려하는 ‘생각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몰입은 최고의 기쁨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공계 최고 인재들이 기초과학과 공학에 뛰어들었다면, 지금은 돈 잘 버는 의대가 인재 블랙홀이 됐습니다.

“의대 열풍이 나쁘다고 보지는 않아요. 우수한 의사가 많아지면 국민 건강을 높이고 의료 관광 대국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국내에서만 경쟁하는 소비성 산업엔 한계가 있습니다. 초대형 미래 먹거리, 국부 창출은 새로운 과학기술에서 나오니까요. 영국·독일·프랑스가 발전한 배경, 미국이 최강대국인 이유도 기술 혁신에 기반한 산업 발전이죠.”

이충구 전 사장이 서울 현대모터스튜디오에서 1974년 당시 포니 설계 도면 앞에 앉았다. 그는 "동료들과 밤새워 라면 끓여먹으며 작업할 때 더없이 신나고 행복했다"며 "인생 최고의 기쁨은 몰입의 기쁨"이라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불확실한 것을 꺼리고 도전하지 않는 젊은이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퇴직 후 서울대·카이스트·국민대에서 교수를 했는데, 요즘 학생들은 옛날보다 훨씬 우수한데 너무 쉽게 답을 구하려 하더군요.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하고, 누군가가 자기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기 바라는 것 같아요. 제가 살아보니 인생 최고의 기쁨은 몰입의 기쁨이에요. 알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해서 무엇 하나요. 지금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과정에 몰입하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아질 텐데요.”

–과거 고도 성장기와 달리 저(低)성장 시대엔 보장되지 않은 길에 몰입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이 대리’가 포니 프로젝트를 이끌었듯, 지금 세대도 그런 모험에 도전할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는 행운아였어요. 마음껏 도전하고 곧 결실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모두 비슷하게 가난하니 남과 비교해 좌절할 것도 없었고요. 그런 시절을 누린 선배로서 후배 세대에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기술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엔지니어의 길은 언제나 외롭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누군가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낄 때, 진정 행복한 엔지니어가 완성됩니다. 이게 답이 됐으면 좋겠네요.”

'포니의 아버지' 이충구 전 현대차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