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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초·후추·가죽·커피 원두의 풍미가 검은 과실 향과 함께 느껴집니다. 부드러운 탄닌과 뚜렷한 산도, 긴 여운이 주는 균형감은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 와인도, 이탈리아 와인도 아닙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된 ‘수퍼 투스칸’ 테누타 산 귀도 사씨카이아 2020입니다.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 1층에 있는 에노테카 파노라마룸에서 이 와인을 접한 건 와이너리 ‘테누타 산 귀도’의 창업자 마리오 인치자의 손녀 프리실라 인치자 델라 로케타와 함께였습니다. 현재 오너가 3세로 총괄 매니징을 담당하는 그가 4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기 때문인데요.
사씨카이아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이 좋아한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퇴근하고 집에서 한 잔씩 혼술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이건희 삼성그룹 명예회장은 명절을 기념해 사씨카이아를 계열사 사장과 임원들에게 선물했다고 하고요.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즐겨 마신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만든 그들은 왜 사씨카이아를 좋아한 것일까요?
유럽에서 와인의 역사를 거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원전 몇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유럽에서 와인은 전통주입니다. 지역마다 특색 와인이 있고, 주민들은 그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각국은 그 전통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규칙을 만들어 놓습니다.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자국의 땅에서 그 나라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와 비슷한 개념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역의 귀족이었던 마리오 인치자는 프랑스 와인도, 이탈리아 와인도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토스카나 지방 볼게리 지역의 영주의 딸 클라리스 델라 게라르데스카와 결혼을 하고 소유하게 된 약 30㎢의 땅 중 0.01㎢에 포도나무를 심으면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와인은 땅과 포도나무가 만들어 낸 마법입니다. 이탈리아 땅에 프랑스 포도 품종인 까베르네 쇼비뇽과 까베르네 프랑을 심은 것입니다. 이 나무 덩굴은 그의 친구였던 듀크 살비아티의 밀리아라노에 있는 사유지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와인 업계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가가 공인한 등급을 잘 받아야 합니다. 이 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토착 품종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사씨카이아는 이 규칙을 깨고 탄생한 와인입니다. 프리실라는 “처음에는 팔려고 만든 와인이 아닌, 가족과 친구끼리 마시려고 만든 와인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가문의 땅에서 대부분의 매출을 차지하는 사업은 생태 보존과 승마입니다. 와인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혀는 솔직하고, 소문은 빠릅니다. 마리오는 와인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고, 1971년 ‘사씨카이아 1968′이 세상에 공개됩니다. 이것이 사씨카이아의 첫 번째 빈티지입니다.
내로라하는 브랜드들이 즐비한 와인업계에서 처음 나온 신생 와인이 주목받긴 힘듭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취향대로 만들어 나라의 인증 등급도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978년 와인 매거진 ‘디캔터’가 실시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사씨카이아는 1위를 차지하며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1985년 빈티지는 로버트 파커, 제임스 서클링에게 100점 만점을 받습니다. 2015년 빈티지 역시 와인스펙테이터 1위 와인에 선정되고, 2016년 빈티지 역시 로버트 파커로부터 100점을 받으며 이탈리아 최고 와인에 등극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씨카이아의 명성은 최근에 완성된 것입니다. 이탈리아 정부도 1992년 와인 등급에 대한 규칙을 바꿨고, 1994년 사씨카이아에 최고 등급인 DOC를 부여합니다.
프리실라는 그 비결을 “매년 우수한 품질을 만들기 위해 기술적으로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국내 경영자들이 관심을 가진 부분도 이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와인은 취향의 물건입니다. 역사와 평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없을 때,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술’입니다.
두 번째는 고급스러운 브랜드 가치입니다. 사시까이아 2020은 40만원 전후의 비싼 와인입니다. 프리실라는 “고급 와인은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이라며 “사치품 가격은 공개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 제안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은 그 가격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필품을 싸게 파는 것은 쉽습니다. 필요한 누군가가 살 테니깐요. 그러나 사치품을 비싸게 파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객이 그 가격을 납득해야만 가능합니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브랜드들은 비싼 가격을 고객에게 납득시키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사씨카이아처럼 신생 브랜드들은 제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야 가능합니다.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이건희 회장이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던 궁극적인 단계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지속 가능성입니다. 현재 각국 와이너리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기후 변화입니다. 와이너리는 기본적으로 농업입니다. 포도 농사를 잘 짓지 않고 와인을 잘 만들 수 없습니다. 특히, 포도는 기후에 민감한 작물입니다. 그러나 프리실라는 “우리 포도밭은 기후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우선순위는 와인을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프리실라 집안은 소유하고 있는 땅 중 4%만 와인 재배에 사용합니다. 그 외 대부분의 땅은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땅의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도 이용하지 않는 숲과 습지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 야생 동물을 관찰하고, 승마를 타기 위해 옵니다. 프리실라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환경”이라며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책 없이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래 산업을 위해서라도 자연을 존경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이 땅은 바다에 가깝고, 대지가 높아 지구 온난화 영향이 적은 편이라고 합니다. 좋은 와인을 만드는 건 땅과 햇볕, 그리고 바람입니다.
프리실라는 10살 때 크리스마스 가족 식사에서 사씨카이아를 처음 맛보았다고 합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은 고기와 단단한 치즈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음식 중에는 사슴 고기라고 하는데, 그만큼 맛과 향이 진한 고기가 어울린다고 하더라고요.
‘테누타 산 귀도’에서는 단 세 가지 레드와인만 만듭니다. 가장 비싼 것이 사씨카이아, 그리고 세컨 와인으로 불리는 것이 ‘귀달베르토’, 가장 막내동생이 ‘레 디페제’ 입니다. 가장 최신 빈티지 기준으로 ‘레 디페제 21′은 4만원 이하, ‘귀달베르토 2021′도 6만원 전후입니다. 풍부한 과일향과 스파이시함 등 강렬한 맛의 조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가장 맛있게 마시는 방법은 1시간 전에 코르크를 열어놓는 것이라고 하네요.
음식 가격을 생각하지 않고 이 와인을 밖에서 저렴하게 마시는 방법은 워커힐 호텔입니다. 1층 에노테카 매장에서 구입한 후, 호텔 어느 식당이든 가져가면 콜키지가 무료라고 합니다. 호텔 연말 행사를 준비하시는 분들께는 좋은 팁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동안 사씨카이아 와인은 그 인기에 비해 물량이 부족하면서 ‘짝퉁 와인’이 시장에 돌기도 했었는데요. 진짜 사씨카이아는 병에 각인이 새겨져 있습니다. 직접 병을 만들면서 새겨 넣는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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