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 후 철거한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에 병력과 중화기를 다시 투입했다. 밤에 경계근무를 서는 장면도 포착됐다. 우리 군은 대응 조치를 하면서 대북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올해는 정전 70주년이자 한미 동맹 70주년이다. ‘사진으로 읽는 군인 백선엽’(오동룡 엮음, 청미디어)이라는 책이 다음주에 서점에 나온다. 백선엽(1920~2020)은 6·25전쟁 때 기념비적 승리를 이끈 대한민국 최초 4성 장군. 백선엽 사진집은 처음이고, 1000장이 넘는 사진이 수록된다. 백 장군의 사진이 많이 남아 있는 까닭은 6·25 때 미군과 연합작전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순간이 담긴 사진 몇 컷을 뽑아 ‘아무튼, 주말’이 먼저 공개한다. 6·25전쟁 발발부터 다부동 전투, 인천 상륙작전, 서울 수복, 평양 탈환, 1·4 후퇴 등을 거쳐 정전 협정과 국군 포로 귀환까지다. 1920년생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축하의 글에 “백선엽 장군은 절박한 때 필사의 의지로 항전했고, 그의 전략과 전투가 실패했다면 대한민국의 존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나 같은 사람을 대신할 사람은 많았으나 그를 대신할 군인은 없었다”고 썼다.

개전 한 달도 안 된 1950년 7월 20일, 인공기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진주해 들어오는 북한군 제3사단. /청미디어

◇6·25전쟁, 북한의 남침

“사단장, 전방에서 적이 전면적으로 침공해왔습니다. 개성은 벌써 점령당한 것 같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7시쯤, 백선엽 1사단장(대령)이 받은 전화였다. 국군은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겼다. 7월 1일 미 제24사단 34연대 장병들이 유엔 안보리 결정에 따라 일본을 떠나 부산항에 상륙했다. 개전 한 달도 안 된 1950년 7월 20일, 북한군 제3사단은 인공기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들어왔다(40쪽).

낙동강 전선에서 철모를 뚫은 총탄에 의해 전사한 병사의 시신.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 전투를 치르면서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정도로 인원 손실을 입었다"고 회고했다. /청미디어

◇8월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 전투

김일성은 수안보 전선사령부까지 내려와 “8월 15일까지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려했다. 국군 1사단은 8월 12일부터 왜관~다부동의 최후 저지선에 투입됐다. 다부동이 돌파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전략적 가치는 상상을 초월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우는 지옥도가 곳곳에서 펼쳐졌다.

백선엽 제1사단장(오른쪽)이 1950년 8월 사단 사령부에서 북한군 포로 1명을 직접 조사하고 있다. /청미디어

8월 20일, 1사단의 분전은 전설이 됐다. 미 제27연대의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1사단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빼앗기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하자, 미 27연대장이 백선엽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백선엽은 지프를 몰고 가 고지를 내려오는 부하들을 향해 “내가 선두에 서겠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쏘라”며 돌격 명령을 내렸고 고지를 재탈환했다. 철모를 뚫은 총탄에 의해 전사한 병사의 시신(59쪽). 백선엽 사단장이 북한군 포로를 직접 조사하고 있다(61쪽). 국군 1사단은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했다.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이 상륙하고 있다. /청미디어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다부동의 위기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인천 상륙작전 소식이 전해졌다. 국군 1사단은 밀번 군단장이 이끄는 미 제1군단에 배속돼 서울 탈환과 평양 진격에 나섰다. 9월 15일 개시된 인천 상륙작전에서 미 제1해병사단 병사들이 상륙하고 있다(71쪽).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북한군의 사기와 병력체계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국군 위생병이 부상당한 여인을 치료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77쪽).

국군 위생병이 부상당한 여인을 치료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청미디어

◇9월 29일 서울 수복

9월 29일 중앙청 홀에서 열린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맥아더(왼쪽)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96쪽). 10월 19일에는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임시 철교가 개통됐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한강철교를 폭파한 지 넉 달 만이었다. 서울의 폐허 속에 구두수선공이 원래 가게였던 자리로 돌아와 국군장병을 첫 손님으로 맞았다(99쪽).

1950년 9월 29일 중앙청 홀에서 열린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맥아더(왼쪽)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 내외를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다. /청미디어

◇10월 18~20일 평양 탈환

38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했다. 한미 양국군은 적국 수도 평양 선점을 양보할 수 없었다. 백선엽 장군은 프랭크 밀번 미 제1군단장을 만나 “우리 장병들은 주야로 행군할 투지가 있고, 평양은 내 고향이라 지리를 잘 안다”고 설득해 선봉 사단의 기회를 잡았다. 10월 19일 평양 입성 후 밀번 장군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제1사단장 백선엽(111쪽). 10월 30일에는 평양에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이 열렸다. 백 장군은 훗날 평양에 입성한 날을 생애 최고의 날로 꼽았다.

1950년 10월 19일 평양 입성 후 프랭크 밀번 제1군단장(소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 /청미디어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다들 통일이 눈앞에 있다고 기대했다. 미군은 늦어도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마치고 새해를 집에서 맞을 것이라고 믿었다. 중공군이 1950년 10월 말 압록강을 건너 이 땅에 잠입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과 함께 전혀 다른 양상의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1950년 가을, 위문 공연을 관람하는 군인들. /청미디어

국군과 유엔군은 38선 이남으로 퇴각했다. 당시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향하는 평양 시민들이 한겨울 대동강 얼음물을 건너는 모습(144쪽). 1·4 후퇴라는 명칭은 북한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한 1951년 1월 4일에서 비롯됐다. 12월 19일 대구역 앞에서 전선으로 떠나는 신병을 전송하는 어머니가 한 바가지의 물로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모습이 애틋하다(52쪽).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예비병력 확충에 어려움을 겪자 국민방위군을 모병했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했다.

1.4후퇴 직전 자유를 찾아 대동강 얼음물을 건너 남쪽으로 향하는 평양 시민들. /청미디어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

백 장군은 1953년 1월 31일 대장으로 진급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이 백선엽의 양 어깨에 대장 계급장을 하나씩 달아주었다. 이 대통령은 “자네, 원래 우리나라에는 임금이 대장이고 신하에는 대장이 없었어. 지금은 공화국이니 자네가 대장이 된 거야”라며 격려했다(300쪽). 1953년 11월 한국과 미국은 역사적인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전선으로 떠나는 신병 아들을 전송하는 어머니의 모습. 한 바가지의 물로 아들의 안위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표정과 이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길이 애틋함을 자아낸다. 1950년 12월 19일 대구역 앞. /청미디어

◇휴전 회담, 포로 교환

1951년 7월 백선엽 제1군단장은 휴전회담의 한국측 대표가 됐다. 현재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측 주장과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공산군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회담이 교착되는 동안 8월에 동부전선의 요충, 철의 삼각지인 펀치볼을 탈환했다.

1953년 7월 휴전 당일 백선엽 참모총장이 판문점에 나가 귀환하는 국군 포로들을 맞이했다. 포로들은 우리 품에 안기는 순간부터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백 총장은 서양 행진곡을 연주하는 군악대장에게 “우리 민요를 연주하라”고 해 ‘아리랑’과 ‘도라지’ 멜로디가 판문점에 울려 퍼졌다(338쪽).

백선엽 참모총장이 1953년 휴전 당일 판문점에 나가 귀환하는 국군 포로를 맞이했다. 포로들은 비통한 얼굴로 묵묵히 내려와 우리 품에 안기는 순간부터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다. 귀환 포로 중 장교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청미디어

백선엽 장군은 100살을 살았다. 그의 인생 가운데 6·25전쟁의 3년은 평범한 사람의 인생 수십 개를 합친 것 만큼 함축적이고 치열했다. 이 사진집을 엮은 군사학 박사 오동룡씨는 “백선엽 장군은 건군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1129일을 전장에서 보냈다. 전쟁 중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나 한미동맹의 초석을 닦고, 사단을 증편하고 야전군을 건설한 한국군 현대화의 아버지”라며 “이 책이 6·25전쟁사에 구멍난 퍼즐을 맞추는 데 보탬이 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정전 70주년이자 한미동맹 70주년에 나오는 '사진으로 읽는 군인 백선엽'. 6·25 당시 30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전투를 지휘한 그는 훗날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말했다. “축구에서는 개인기 못지않게 팀워크가 중요하잖아요. 전쟁에서도 기습은 두세 번 이상 써먹을 수가 없거든. 기리니끼니 팀워크가 중요해요.” /청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