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29일 일본 도쿄의 최고급 오쿠라 호텔. 아사히TV, 니혼게이자이, SBS 등 60여 한일 언론사가 카메라를 들고 도착했다. 입구에는 이미 일본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현장 화면에선 일본에서도 크게 흥행한 한국 영화 ‘쉬리’의 한 장면이 방영됐다. 사람들은 화면을 통해 나오는 박진감 넘치는 영상에 빠져들었다. 그것을 보여준 화면이 바로 삼성 다기능 모니터였다.
일본의 소니·파나소닉·샤프 빅3사(社)가 세계 TV 시장을 주름잡고 있을 때다. 삼성 TV는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전자상가)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현장은 다음 날 일본 인기 시사 프로그램인 TV도쿄의 ‘월드 비즈니스 새틀라이트’에서 “한국의 파워, 그리고 위협”이라는 제목의 뉴스로 2분 20초 동안 송출됐다. 진행자들은 “외국기업 삼성으로서는 효율적 전략”이라며 극찬했다. 방송을 본 신일본제철에서는 17인치 LCD(액정 화면) 모니터 30대를 주문했다. 교토의 고급 료칸에서도 낡은 TV 50대를 삼성 제품으로 교체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진대제 당시 삼성 정보가전 총괄 사장이 국제전화로 “진짜냐?”고 물을 정도였다.
당시 주재원 이승현(65) 전 삼성 LCD TV PM 그룹장이 이 행사를 기획하고 준비했다. 그는 1992년 말 삼성전자 일본 주재원으로 출국해 약 10년 일했다. 그사이 전자상거래를 통해 삼성 LCD 모니터를 실현했고, 본사로 돌아가 LCD TV 사업화를 책임졌다. 이건희 회장의 특명, “소니를 잡아라!” 이를 위해 그는 타지에서 맨발로 뛰었다. 최근 ‘최강 소니 TV 꺾은 집념의 샐러리맨’을 출간한 그를 지난 2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만났다.
◇소니를 잡아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6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독일 출장에서 임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면적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일명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이 회장은 일본 오사카를 방문해 ‘삼성 신경영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진행한 주재원은 이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마누라는 왜 빼라고 하셨습니까?” 이 회장은 답했다. “마누라를 바꾸기는 너무 힘들어.”
-그게 이 회장의 농담이었을까요?
“메시지를 실행 가능하고 울림 있게 전달하기 위함이었겠지요. 그분의 리더십 특징이기도 해요. 말 한마디를 던져 천하를 움직이게 하는 것. 그 키워드를 던지기 위해 공부를 많이 하셨지요.”
-일본 빅3가 가전 시장을 꽉 잡고 있을 때였는데.
“이건희 회장이 그해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 가전제품매장에서 삼성 제품이 소니·도시바·GE 등에 밀려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에 노발대발하셨대요. 그리고 일본에 왔는데 도쿄의 아키하바라에서 삼성 제품이 눈에도 안 보인 거예요. 난리가 난 거죠. 1998년 저에게 미션을 내리셨어요. ‘신규 사업팀장을 맡아 일본 내에서 삼성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으로 만들어라’.”
삼성전자 일본 주재원 사무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한 오사카성 근처에 있다.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성 앞에 전진기지를 차린 셈이었다.
-그 미션을 실행하기 위해 어떻게 전자상거래를 떠올리게 됐나요?
“일본 대기업 TV사업부장 출신 고문, 유통점 담당 영업 경험자들을 만나 자문을 구했어요. 책들도 구입해 공부했죠. 당시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전자상거래’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할 때였어요. 아직 소비자들에게 익숙하지는 않을 때였지요. 100만~200만원 TV 모니터 가격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고요. 저희는 결제 완료 시 주문 다음 날 일본 전국 어디에서나 제품을 배달받을 수 있게 했어요. 불량이나 고장이 발생하면 무조건 완제품으로 교체해준다고도 약속했고요. 24시간 콜센터도 도입했고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로켓 배송과 비슷하지요.”
-도쿄의 아키하바라에도 입성했습니다.
“난공불락의 장소에 개선장군처럼 들어갈 묘안을 짜냈지요. 당시 아키하바라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상들은 게임 소프트웨어를 브라운관 모니터에 연결해서 보여주고 있었어요. 화질이 엉망일 수밖에 없었죠. 저희는 그들에게 ‘다기능 모니터 무료 대여’를 제안했어요. 대신 우리 상품도 몇 개 전시할 장소를 마련해 달라고 했지요. 그들은 게임을 선명한 화면으로 보여줘서, 저희는 공짜로 상품 전시 공간을 만들 수 있어서 좋았어요.”
-2004년 LCD 사업을 세계 1위로 끌어올리는 기틀을 마련하셨는데요.
“디지털 TV는 삼성의 큰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텔레비전 사업부와 모니터 사업부를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미래 사업을 두고 LCD와 PDP(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가 경쟁하던 시절이에요. 그러나 전 일본 디지털방송 규격 책임자를 알게 됐고, LCD가 디지털 환경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저는 그룹에 ‘LCD TV로 소니를 이겨 꼭 세계 1등이 되도록 할 터이니 마케팅을 지원해달라’고 건의했어요. 이 모든 건 ‘양(量)이 아니라 질(質) 중심으로 일해라. 서양인과 일본인 앞에서 기죽지 마라. 기죽으면 안 된다’고 한 이 회장의 말씀 때문에 가능했지요.”
◇거북선을 동경한 섬 소년
그는 전남 완도군 어룡도에서 태어났다. 명량해전이 벌어진 울둘목까지 30km 정도 떨어진 곳. 전주 이씨인 그의 선조 중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활약한 이억기 장군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우상은 이순신 장군이었다.
-첫 직장이 현대중공업이었지요.
“거북선 같은 배를 만들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이억기 장군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거든요.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의 영향으로 ‘산업 역군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1992년에 일본 주재원은 어떻게 나가게 됐나요?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했을 때예요. 닛산과 기술 제휴를 맺었는데, 일본 내 삼성 창구가 너무 약하다는 말이 나왔어요.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국내 제일 우수한 인력을 도쿄 지점에 배치하라’는 지시를 내렸죠. 그렇게 일본으로 갔다가 삼성자동차 매각까지 마무리했죠.”
-그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이라면
“오사카 사투리요. 한국에서 일본어 공부를 해서 나갔는데, 들어보지도 못한 말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얼마입니까?’의 일본어는 ‘이쿠라데스카?’이지만, 오사카 기업인들은 ‘난보야 난보야’라고 말해요.”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문화 차이는요?
“1995년 ‘관서(關西) 대지진’을 겪었어요. 잠을 자던 중 집이 흔들리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눈을 떴지요. 일어나 보니 마치 영화처럼 집이 기울어져 있었어요. 엉망으로 쓰러진 피아노며 가구들을 지나쳐 아이들을 깨우러 가는데 몸이 계속 흔들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더라고요. 겁이 났어요. 일본 땅에서 우리 가족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고. 그런데 이런 죽음의 공포를 겪은 후에도 일본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질서 의식을 보여줬어요. 비명도, 통곡 소리도,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트리는 이도 없었지요. 저는 일본인들이 가능하면 남과 다투지 않는 이유가 이런 재난 상황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때의 구호 활동 경험으로 지금도 서울역과 탑골공원 등에서 급식을 나누는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요. 이번에 장모님 돌아가시며 받은 조의금으로는 급식 시설을 리모델링하기도 했지요.”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도 준다면서요.
“시골에서는 현금이 부족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진학할 때 준비물을 못 사는 친구들이 있어요.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 온 친구들은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공부에 전념하기 어렵고요. 부모님 집에서 등하교하는 서울 친구들과는 다르죠. 저는 그런 작은 부분에서도 불평등이 벌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런 친구들에게 생활비를 주고 있어요.”
◇샐러리맨의 시간
2006년 삼성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는 돌연 회사를 그만둔다. 그리고 일본항공전자 한국법인 대표를 거쳐, 2007년 대만전자 부품회사 인팩코리아 공동 창업자 겸 대표가 된다. 현재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한미동맹재단 부회장, 한국외국기업협회 명예회장 등도 맡고 있다.
-삼성은 왜 그만두신 건가요?
“일본에서 너무 과로를 했는지 병원 신세를 많이 졌어요. ‘내가 죽어버리면 이게 무슨 소용이겠나. 그냥 회사를 그만두자’ 싶었죠. 그리고 모든 샐러리맨의 꿈, 제 회사를 갖고 싶었어요.”
-샐러리맨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일까요.
“‘내가요?’ 대신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상사가 어떤 일을 준다는 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이에요. 새로운 분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건데 ‘이걸 내가 왜 해야 하느냐?’로 생각하면 성장의 폭이 갇히는 거죠.”
-가장 큰 은인이라면.
“노인식 전 삼성중공업 대표이사요. 제가 신입이던 시절 인사과장님이셨어요. 제가 조선에서 전자로, 자동차로 새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분이에요. 샐러리맨에게 인생의 변곡점은 선배들이 만들어주는 거예요. 기회를 주는 거죠.”
-한국외국기업협회 명예회장도 맡고 계신데요. 외국 기업들이 한국에 가지는 가장 큰 불만은 무엇인가요?
“‘중대재해처벌법’요. 이미 ‘산업안전보건법’이 있는데, 이걸 또 만든 거예요. 기업들은 사고가 났을 때 대표 이사가 구속이 안 되려면 로펌 선정을 잘해야 해요. 변호사들만 잘 먹고 잘사는 거죠. 로펌을 고용할 수 없는 작은 회사들은 망하는 거고요. 사고가 나길 바라는 대표가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은 작업하는 사람들의 부주의로 발생하는 거죠. 한국에서 잘못하면 범죄자가 되느니 안 오는 것이지요. ‘화학물질관리법’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나라가 미국이나 유럽, 일본보다 엄해요. 영세업체들은 그냥 다 문을 닫으라는 거예요. 주 52시간제, 최저임금 모두 현장을 모르는 정책들이지요. 스티브 잡스가 애플 창업할 때 주 52시간 일했겠어요?”
-현장을 모르는 정책들은 왜 계속 나오는 걸까요?
“경제가 이념이, 정치가 된 거죠.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 개정안)도 마찬가지예요. 노조뿐 아니라 전임 노조원의 불법 행위까지 옹호하는 법이지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이런 법들이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조선·자동차·TV 등이 늘 경제 변화의 파도에 올라탔는데요. 이게 파도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제가 어룡도에서 태어났잖아요? 그 앞에 가막섬이라는 조그마한 섬이 있습니다. 한 100m 정도 돼요. 섬과 섬 사이는 물살이 굉장히 세요. 어릴 때 형들 따라 헤엄쳐 건너가곤 했어요. 물살에 떠밀려 갈 것 같지만 그래도 건너가야죠. 못 가면 죽으니깐. 그런 무모함이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섬에 산다는 건 늘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에요. 배를 타고 육지를 오가는 것도 죽음과 함께하거든요. 대범해질 수밖에 없죠. 섬은 수시로 날씨가 바뀌어요. 바람이 불었다가, 햇볕이 비췄다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체화된 것 같아요. 그게 오늘날 저를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