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양당제도의 전통 아래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제3당의 국회 진출은 어렵습니다. 거대 양당은 40% 남짓의 정당 득표율로 50~60%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여 표의 등가성(等價性)이 깨지고 많은 사표(死票)가 발생합니다. 거대 양당의 공천은 당선에 유리한 요소이다 보니 정당 내의 패거리 정치가 극성을 부리고, 정당 간의 타협이 없는 죽기 살기 식 진영 대결이 극심해져 국민은 지쳐 있습니다.
또한, 양당 정치만으로는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에 필요한 다양하고 창의적인 의견을 담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장 집권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3당이 출현하여 거대 양당의 독주를 견제하며 타협의 정치를 구현할 필요가 생깁니다. 그러나 내년 총선을 앞두고 새롭게 논의되는 제3당은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가 아니라 당내 갈등의 외부 연장에 불과하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명분을 제시하는 것이 아직은 어려워 보여 제3당이 성공할지 의문입니다.
최근 우리 정치사에서 정의당은 제3당으로서 기대할 만한 모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당이 당장 집권할 가능성은 없더라도 좀 더 실사구시의 실력을 쌓고 국민의 신뢰를 얻어 거대 양당 중심의 극한 대립 정치가 펼쳐지는 정치 상황에서 합리적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정치는 훨씬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국민의 기대 탓인지 한때 10%에 접근하는 정의당 지지율이 지금은 3~4%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거대 정당에 명분 없이 편을 들며 그 과정에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의 신뢰를 급격히 잃은 것으로 보입니다. 멀리 보고 뚜벅뚜벅 걸어 나갔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람직한 제3당의 모습을 보여준 좋은 예가 독일의 녹색당입니다. 녹색당은 1970년대 시민운동으로 시작했던 그룹이 1978년 ‘미래를 위한 녹색 행동(Gruene Aktion Zukunft)’이라는 이름으로 주(州) 차원 정치 단체로 조직되었다가, 1980년 녹색당이라는 전국 규모의 정당으로 조직되었습니다. 녹색당이 원래 내세우는 주요 정책은 환경 보호, 여권(女權) 신장, 기초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와 비폭력 등이었습니다. 녹색당은 주 차원에서는 1979년 처음으로 브레멘 주의회 진출에 성공하였고, 1983년에 드디어 연방 의회에 진출하였습니다. 녹색당이 국회 운영에 잘 적응할지 의문이었습니다.
1세대 녹색당 의원들은 회의장에서 자신들을 외관상 부각하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해바라기 등 요란한 무늬가 있는 스웨터를 입고 등원하였습니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지만 거부감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적응하며 핵발전소 폐기 등 당장은 실현이 어렵더라도 장차 추구해야 할 미래에 초점을 맞춘 꾸준한 정책적 노력을 통해 지지를 넓혀나가 마침내 1998년에 사민당과 연정을 함으로써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녹색당 대표로서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된 요슈카 피셔는 발칸반도에서 벌어지는 인종 청소인 ‘코소보 사태’에 평화를 위해 무조건적 전쟁 반대 정책을 바꾸어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책임 있는 국정 담당자의 일원이 된 이상 정권 밖에서 막연히 하던 비현실적 주장을 계속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피셔는 일부 지지자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고 붉은 페인트 세례도 받았지만, 과감히 변화를 추구해나갔습니다. 2021년에 다시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과의 신호등 연정을 통해 정권을 담당하기에 이릅니다.
창당 초기와는 달리 독일 주요 정당 중 제일 뚜렷한 친미·반러, 친NATO(나토), 친EU 성향을 보입니다. 러시아와의 가스관 연결에 제일 앞장서 반대하였으며, 국방비 증액에도 가장 적극적입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한때 나토 해체나, 독일 연방군 해체, 독일의 무기 수출 금지를 주장했던 평화주의적 정당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방향 전환입니다. 머지 않아 거대 양당 수준으로 진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꼼수가 아닌 원칙과 시대정신에 투철하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탓일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제3당은 이런 모습의 정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