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가 쓴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

필경사(筆耕士)는 ‘붓으로 밭을 가는 사람’이다. 5급 공무원부터 국무총리까지 국가직 공무원은 붓글씨로 쓴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받는다. 올 초 인사혁신처가 필경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냈다. 최근 문의해 보니 아직 적임자를 뽑지 못해 그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필경사는 1962년에 처음 생겨 역대 4명뿐이다. 조선 시대라면 왕이 내리는 교지를 쓰던 이조좌랑(吏曹佐郞)에 해당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 보직이 존재하는 까닭은 공직자들이 손글씨로 쓴 임명장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인쇄는 가루를 뿌려 굽는 방식이라 10년쯤 지나면 글씨가 흐려지지만, 먹을 갈아 붓으로 쓴 글씨는 종이에 스며들어 영구적으로 남는다.

인사 이동이 많은 연말에는 써야 할 임명장이 밀려들 텐데 남이 대신할 수는 없다. 가로 26㎝, 세로 38㎝ 종이에 쓰는 임명장은 연간 약 7000장. 2008년부터 일한 김이중 사무관은 올 초 퇴직했고 지금은 김동훈 주무관 혼자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 인사혁신처는 “업무량이 늘어났지만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분을 필경사로 뽑을 수는 없다”며 “다시 채용 공고를 낼 것”이라고 했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던 인사혁신처 소속 필경사 김이중 사무관 /tvN

한 필경사가 신문과 방송에 등장해 직업을 소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손을 다쳐 글씨를 못 쓰는 일이 생길까 봐 운동도 조심한다고 했다. 그는 “제가 쓰는 임명장은 수천 장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뿐인 소중한 훈장과 같아 한 획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했다. 기억에 남는 임명장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경기 이천 물류센터 화재 사고 때 순직하신 소방관의 임명장을 작성하는 것을 지켜봤어요. 공무원이 업무 중 목숨을 잃었을 때 한 계급을 높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개 임명장은 축하하려고 쓰지만, 이렇게 안타까운 임명장을 쓸 때는 정말 마음이 아파요.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위해 이거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구인난(求人難)을 겪고 있는 필경사는 인사혁신처 심사임용과 소속이다.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 작성, 대통령 직인·국새 날인, 임명장 작성 기록 대장 운영·관리 등이 주요 업무. 채용 자격으로 서예 관련 석·박사 학위 또는 임용 예정 직무 분야에서 근무·연구한 경력을 요구한다. 붓으로 밭을 갈 사람, 어디 없소?

※ QR코드에 휴대폰을 갖다 대거나, 인터넷 주소창에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45743 을 넣으면 구독 창이 열립니다. ‘이메일 주소’와 ‘존함’을 적고 ‘구독하기’를 누르면 이메일로 뉴스레터가 날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