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화가 오성철씨가 서울 은평구 자신의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하는 모습. 캔버스에 숟가락이 붙어 있다. 이 ‘숟가락 화가’는 “독재에 저항할 자유조차 없는 북한과 비교하면, 가난해도 화가로 살 수 있는 한국에서의 삶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소중하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북한에는 화가라는 말이 없으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거기선 그냥 다 그림쟁이, 화공이죠.”

어릴 때부터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늘 숨이 막혔다는 소년. 막연히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나라에서 내준 공책에 낙서했다가, 공책 검사 날에는 혼이 날까 무서워 그림을 그린 공책들을 북북 찢어 버려야 했다. 도배지가 없어 시멘트 포장지를 풀로 붙여둔 집 벽에 무심코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한테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10년이 넘는 군 생활 동안 북한과 김정일 체제를 찬양하는 정치 선전물과 포스터를 그리던 서른한 살 청년은, 2009년 무역을 하러 중국에 갔다 덜컥 한국 영사관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3년간 보호시설에 머물다 2012년 한국에 들어왔다. 하나원(북한 이탈주민 교육시설)을 나오자마자 그는 미대에 입학했고, 11년째 ‘가난하지만 행복한’ 화가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다. 탈북자 출신 화가 오성철(45)씨다.

작업실은 서울 은평구 평범한 주택가에 있는 중국집 아래 지하실. 좁고 캄캄한 계단을 내려가 지하실 문을 열자 은은한 유화 향이 코를 찔렀다. ‘숟가락 작가’라는 별명답게, 그의 작품과 작업 중인 캔버스에는 숟가락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는 그림으로 대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왜정 땐 수박껍질이라도 삶아먹었다

-평양 밑 남포 출신이라고요.

“할아버지가 원래 부산 지주 집안 사람인데, 소작농 딸과 사랑에 빠져 내쫓기듯 정착하신 곳이 남포예요.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 뵙고 와야겠다’며 부산에 가셨다가 돌아오지 못하셨대요. 그렇게 ‘월남’ 정치범 집안이 됐습니다. 제 아버지가 삼형제 중 막내였는데 일하느라 매일 새벽 6시에 나가서 저녁 8시에 돌아오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북한 체제에 불만이 많았겠군요.

“할머니는 집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보면서 ‘저 개XX 때문에 못살겠다’며 욕하고, 저는 ‘할머니, 누가 들으면 큰일 나요’하고 말렸죠. ‘왜정(倭政) 때는 배가 고프면 수박껍데기라도 삶아 먹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수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며 한탄하셨어요.”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겠네요.

“저도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어요. 김일성, 김정일 생일에 음식을 주면 초상화에 인사하고 먹으라는데, 그게 그렇게 우습더라고요. 한번은 등교길에 신발이 찢어져서 아버지한테 ‘다음에 월급타면 구해달라’ 했더니, 아버지가 월급날인데 월급이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라고 하시는 거에요. 명세서를 보니 아동보험부터 해서 각종 보험 명목으로 월급이 쭉 다 공제된 거에요. ‘아버지, 우리나라는 학교니 의료니 다 공짜 아니에요’ 했더니 아버지가 ‘공짜 아니다’라고 하셨죠. 새벽부터 밤늦게 죽어라 일만 하는데 마이너스라는 게 말이 되나요. 심지어 명절날에 돼지고기를 1kg씩 나눠주길래 그것도 거저 주는가 했더니, 다 월급에서 제하는 거였어요.”

탈북화가 오성철씨가 캔버스에 작품을 그리고 있다. '숟가락 화가'라는 별명 답게 캔버스에는 촘촘하게 숟가락이 붙어있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원래 화가가 꿈이었나요.

“북한에는 화가나 예술가라는 개념이 없어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니까, 생활기록부 같은 데 남았는지 17세 때 군에 징집돼 정치 선전물을 그리는 ‘직관원’이 됐어요. 물감이나 종이는 줘야 일을 할 텐데 다 알아서 구해 오래요. 참 황당했죠.”

-1994년에 징집됐으면 ‘고난의 행군’ 시기였을 텐데요.

“94년에 군대에 갔는데 김일성이 죽은 해였죠. 그때까진 군인들이 백미를 먹었고 식용 기름도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95년이 되니 후임병이 뚝 끊어지고 기름도, 쌀도 떨어지고 소금도 없었어요. 맹물에다 국 끓여 먹고, 너무 배가 고프니 거의 6개월은 산을 돌아다니며 칡뿌리 캐서 먹고 개구리알 삶아 먹으며 버텼습니다.”

-당시에 한국이 쌀을 지원했는데 기억 나나요.

“남포항으로 쌀이 들어왔는데, 포대에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그때 대한민국을 처음 접했습니다. 남조선으로만 알았으니까요. 상부 지시로 대한민국이라 적힌 포대를 다 찢어서 소각하고 중국산 포대에 쌀을 옮겨 담는 일을 제가 직접 했어요. 지금도 북한에는 대한민국 못 들어 본 사람이 많을 겁니다.”

-선전물로 그린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북한에 ‘김일성 구호나무’라고 해서 일제 때 김일성 휘하 항일 유격대원들이 김일성을 칭송하며 글귀를 적었다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다 가짜로 만든건데, 한 번은 산에 불이 나서 그 나무가 불탈 거 같으니 애들이 나무를 지키려고 감싸 안고 타 죽은 일이 있었어요. 그걸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데, 저는 그런 걸로 목숨을 바치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겨우 글귀 하나 지키겠다고...”

-체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과 뜻을 모을 순 없었나요?

“보위부에서 구역마다 연락원을 둬요. 어떤 장소에서 누가 어떤 얘기를 했는지 일주일에 한 번씩 체크하죠. 둘째 큰아버지도 외제 에어컨을 보고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걸 만들지 못하냐’고 무심코 말했다 잡혀갔어요. 그러니 불만이 있어도 입을 다물어야 해요. 한국에서 예전에 독재에 반대하는 혁명을 했다는데, 그것도 자유가 있으니까 가능한 겁니다. 제 입장에선 ‘진짜 독재자한테 제대로 밟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죠.”

-어떻게 버텼습니까.

“꿈이란 게 없었어요. 정치범 집안이라 공부를 해도 쓸모가 없었고요. 군 시절 탈영병을 잡으러 갔는데, 탈영병 아버지가 교수였어요. 책장에 ‘1920년대 시선’이라는 시집이 있었는데 딱 봐도 불온서적 같아 훔쳐왔습니다. 몰래 읽었는데, 김소월 시를 읽으면 그렇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왜정 때 힘든 삶을 노래한 시라는데, 왜 이렇게 지금 내 처지와 같은지. 그러다 책 읽고 질질 짠다는 소문이 퍼져서 정치부에 걸리는 바람에 한 달 반 동안 매일 자아비판문을 썼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죠.”

◇그림 그리며 3년 기다려 한국행

10년 군생활을 마친 오씨는 남포의 작은 대학으로 탈출하듯 진학했다. 대학에서도 매일 돈을 내라고 요구하는 통에 갖가지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나온 뒤 보위부 산하에서 무역을 하며 중국을 오갔고, 그러다 오씨는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 “자유라든지 예술이라든지 그런 말은 몰랐어요. 그저 노예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오성철 화가는 "원래 꿈이 없었다"고 했다. 북한에선 화가도 예술도 존재하기 않기 때문. 무역 차 중국에 나온 뒤에야 예술, 화가라는 게 가능하다는 걸 조금 알게 됐다./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공개 처형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주민들한테 학교에 다 모이라고 해요. 가면 말뚝이 세워져 있고. ‘반당 반혁명 종파 분자 아무개를 향하여, 쏴!’ 하면, 다다다닥…. 그걸 어린애들도 다 봐요. 말뚝에 세워놓은 사람은 이미 너무 맞아서 죽은 상태긴 했어요. 군 시절엔 탈영병이 배가 고프다고 할머니 사는 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죽이고 밥을 도둑질했다 붙잡혀 공개 처형 당하는 걸 봤죠. 그런 체제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제가 보기엔 미친 사람들이에요.”

-어쩌다 탈북을 결심했나요.

“2007년부터 보위부에서 주도하는 외화벌이를 했어요. 1년에 2만달러 내면 장사할 수 있는 허가증을 줍니다. 해산물 거래를 하려고 처음 중국에 갔다가 ‘탈출해서 할아버지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중국에서 대방(무역업자)하는 친구가 늘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산 제품을 좋아하더라고요. 중국에 있는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콘크리트벽에 거대한 설치 미술이었는데, 북한에선 볼 수 없던 거라 ‘이게 대체 뭔 지X인가’ 했어요(웃음). 그런데 뭔가 또 먹먹함을 느꼈죠. 그렇게 예술이 뭔지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두 번째 중국에 갔을 때 탈북할 방법을 물어보려고 114 같은 걸 눌러서 한국 영사관에 연결해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영사가 받길래 ‘나 북한에서 나온 사람인데 한국에 가고 싶어요’ 하니 ‘영사관에 오세요’ 이러더라고요. 짐을 싸서 영사관에 가보니, 철조망이 네 겹 쳐 있고 중국 공안이 지키고 있는 거예요. 다시 영사한테 전화해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지 물으니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데리고 들어올 순 없으니 알아서 들어오라’ 하더라고요. 너무 무책임하다 생각했지만 어떡해요? 일은 벌어졌고. 가방은 다 공안들 앞에 놔두고, 비자 발급 창구 쪽을 보니까 점심 시간에 지키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후다닥 뛰어들어갔죠.”

-2009년에 탈북했는데 한국에는 2012년에야 들어왔는데.

“영사관 내 탈북자 보호시설에 3년을 머물렀어요. 처음 갔을 땐 사람이 많았는데, 1년 반 정도 되니 다 나가고 저만 남았어요. 왜 3년이나 걸렸는지도 저도 모르죠. 지하라 볕도 들지 않아서 감옥 비슷했습니다.”

-정말 한국에 갈 수 있을지 의심하거나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그때 무심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감정을 막 그렸다가, 이상한 괴물도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니 ‘아, 그림을 그리니까 내가 견딜 수 있었구나. 한국에 가면 화가가 되어야겠다. 이 세계를 씹어 먹자’는 생각이 불쑥 들었어요. 그때부터 영사관 직원들한테 한국에서 화가 되는 법, 미대 가는 법 같은 걸 막 물어봤죠. 진중권이 쓴 ‘서양미술사’ 책도 주고, 수채화 물감도 구해서 주더라고요. 그림이 저를 지탱해줬어요.”

오성철 화가는 2009년 중국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뛰어들어 탈북했다. 하지만 한국에 오기까지 3년을 기다려야 했다. "기약없이 영사관에 머무는 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버텼고, 그렇게 화가의 꿈이 생겼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 소식도 접할 수 있었나요?

“KBS 하나 딱 틀어주더라고요. 거기서 뉴스도 보고 했는데 제일 신기했던 건 시위 뉴스였어요. 어떻게 정권을 향해서 저렇게 집단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시위 때도 신기해서 가봤었습니다. 시위하는 풍경 보면서 ‘이야, 이거 북한이었으면 다 죽었을텐데’ 하면서 봤죠(웃음).”

-한국 생활은 어떻게 적응했나요?

“그럴 틈이 없었어요. 35세가 넘어 입학하면 대학 장학금이 안 나오더라고요. 9월 6일에 하나원에서 나왔는데, 서울에 있는 미대 수시는 다 끝났고 지방 미대 입시만 남아서 임시 신분증 만들고 곧장 한남대에 찾아가 미대 학장을 만났죠. ‘이번에 꼭 들어가야 한다’ 했더니 조교 한 분을 붙여 도와주셨어요. 정착금으로는 학비 감당이 안 되니까 학교가 오후 6시에 끝나면 곧바로 택배 상하차 알바, 웨딩 알바, 레스토랑 알바 뛰고 새벽에 들어와 자고 그렇게 다녔습니다.”

◇”가난한 화가? 나는 너무 행복하다”

졸업 후 서울에 온 뒤로도 오씨는 알바와 공사일을 병행하며 화가 활동을 이어왔다. 1년 반 전에는 공사장에서 일하다 사다리에 추락해 뼈가 6개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3년 전에 결혼해 지난 10월 득남했다. 1억5000만원 대출로 전셋집에 살며 여전히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다. 오씨는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이곳에서 화가로, 예술가로 살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서울 강서구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오씨의 특별전 ‘표현의 조건형식’이 이달 31일까지 열린다.

오성철 화가가 캔버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그림을 팔아 생계를 잇는 건 쉽지 않을 텐데요.

“처음엔 감동을 주는 게 예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해 보니 아니더라고요. 갤러리 대표가 주문하는 대로 그림을 그려서 팔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에 미국에 초대를 받아 아트 페어에 참가했어요. 개념 미술이 엄청나게 상업화돼 활발하게 거래되는 걸 보니 한국 미술 시장과 세계 미술 시장의 격차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죠. 시장과 대중이 알아주지 않아도 정말 큰 미술, 개념 미술에 매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고통을 주지 않나요.

“11년 동안 맨몸으로 살았어요. 한국에선 다들 ‘먹고사는 게 제일 힘들다’고 그래요. 북한에서 온 저로선 이상하잖아요. 사람들이 왜 힘드냐 하면 다 욕망 때문이에요. 남과 비교하고, 그 차이에 좌절하고. 그런 게 힘든 거죠. 사실 인문학적 빈곤 때문이에요. 한국은 돈이 없어도 나가서 일하면 돈 주잖아요. 북한에선 100을 벌면 90을 뜯겨요. 사람들이 재벌을 비난하는데, 사실 재벌 때문에 먹고사는 게 맞잖아요.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내 삶을 살면 되는데 다들 왜 이렇게 불행하다고 하는지….”

-10월에 득남을 하셨는데 어떤 생각이 드나요.

“원래는 결혼하지 않으려 했어요. 미술가로 살려면 가정을 돌 볼 힘이 없으니까요. 어쩌다보니 결혼하고 아들이 생기니 책임감이 더 생겨요. 불평·불만을 조장하는 세력이 진실을 혼돈에 빠트리고, 인간에 대한 고민보다 돈이 앞서는 시대니까요. 이런 세상에서 화가로서 인문학적 정신을 관철해 나가는 삶을 아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탈북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경험이 있는지.

“여기서 그림 그리며 교류한 사람 중 적지 않은 사람이 586세대예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김일성 관련 책을 사적으로 출판해서 돌려보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얘기하길 ‘예전 독재 정권 때 빨갱이 프레임 가지고 억울한 사람 많이 때려잡았다’ 하는데, 가만히 보면 그 말 하는 사람이 빨갱이야(웃음). 이런 사람들은 탈북자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제일 한심한 나라고, 역사 왜곡을 하고, 이승만의 정당성을 인정 안 해주고, 조선을 계승해야 하는 것처럼 프레임을 짜놨는데,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힘든 생활을 자꾸 얘기하니 자기네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거예요. 미술 시장에서도 이런 사람들 입김이 세 저 같은 사람은 진출할 수가 없어요. 제대로 평론받고 전시도 하고 싶은데, 많이 답답하죠.”

오성철 화가는 "한국 사회에 인문학적 고민은 사라지고 욕망과 위선, 거짓이 뒤덮혀 걱정이 크다"며 "화가로서 인문학적 정신을 끝까지 관철시키며 살 것"이라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캔버스 속 숟가락은 어떤 의미인가요?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뻔한 거짓말이 난무해요. 내로남불부터 김정은을 칭찬하는 말까지 나와요. 저는 오로지 돈만이 찬양받고 진짜 지식, 교양은 탄압받는 시대라는 생각을 그림에 녹이려고 합니다. 숟가락은 먹는 걸 담잖아요. 그런데 이 숟가락이라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모양과 똑 닮았더라고요. 다들 욕망에 따라 움직이고, 이성은 그런 욕망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쓰고 있어요. 숟가락은 ‘당신은 스스로를 선(善)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그저 숟가락일 따름’이라고 하는 거죠.”

인터뷰를 시작할 때만 해도 수줍게 웃던 오씨의 얼굴이, 끝날 무렵엔 저항감과 사명감 가득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30여 년을 노예로 살았다는 그는 한국에 온 지 11년 만에 그 누구보다 자유롭고 깨어있는 시민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