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최정진

연말이 되면 연말 결산을 한다.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한 연말 정산도 필수지만, 내가 1년 동안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도 정리를 한다는 말이다. 다양한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친구들과 답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1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이라면 유행이 되었다. 요 몇 년간 좋은 트렌드가 생긴 덕분에 원래는 싫어했던 연말 분위기를 이제는 좀 즐길 수 있게 됐다.

내 친구 A는 다양한 질문을 직접 준비해서 친구들과 나눈다. 작년 이맘때는 5시간 정도 모여 앉아 연말 결산을 했다. ‘올해의 소비’ ‘올해의 기쁨’ ‘올해의 아쉬움’ ‘내년에는 버리고 싶은 습관’ ‘올해 새로 발견한 나의 모습’ ‘내년에 새로 해보고 싶은 것’ 등에 대해 답하면 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만 해서는 1년 동안 한 일들이 저절로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휴대폰 갤러리에 들어가게 된다. 무수히 많은 사진을 보면서 나의 1년을 확인하는 것이다. 올려도 올려도 사진이 끝이 없다. 내가 1년을 부질없이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먹은 것도, 만난 사람도, 보고 들은 것도 많다.

작년 연말 결산 때 적은 ‘2023년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시 열어보는 것도 묘미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매일 일기를 쓴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일기를 쓰기 전에, 1년 전 오늘의 일기를 돌아본다고 한다. 나는 매일 일기를 쓰는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니, 해마다라도 이렇게 돌아봐야 한다. 1년 전 각오를 보니 놀랍게도 이룬 것이 많다. 책을 여러 편 계약했고 단편 영화도 찍었으며 운영하는 광고 회사 일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양적인 성과들은 허무를 달고 온다.

작년에 쓴 계획 중 ‘외할머니 자주 보러 가기’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런 소망을 했었구나. 그러나 외할머니를 ‘자주’ 보러 가지는 못했다. 계절이 바뀔 때 한 번씩 찾았다. 외할머니의 눈을 오래도록 마주쳤고, 그녀의 손에 생기 있는 꽃과 잎사귀를 쥐여주었고, 그녀의 손을 잡고 노래를 함께 불렀다. 매번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온 힘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울부터 이런 장면들을 다짐한 덕분이 아닐까. 연말 결산의 힘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원래 나는 연말의 감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밝고 빛나는 연말 분위기가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생기는 연말 모임들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지 않는 술을 마시면서 한 해 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을 숙제하듯이 만나는 것이 12월을 바쁘고 헛헛하게 만들었다. 연예인 이야기와 사회생활의 하소연이 정처 없이 술자리 위를 떠다니는 풍경. 친구 A에게 연말 결산의 좋은 점을 물었더니,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속 깊은 이야기까지 할 수 있게 되는 아주 힘 있는 장치라는 답변이었다. A는 작년에 소개팅 앱으로 애인을 만나는 것을 새해 계획으로 적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그는 올해도 한 번 더 그 계획을 종이에 적었다. 우리는 그의 마음과 연애에 대해 더 진실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 작업은 인터뷰를 닮기도 했고, 상담을 닮기도 했다. 우리는 유튜브로 수많은 인터뷰 콘텐츠를 보면서, 정작 스스로를 인터뷰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작업 자체를 오글거린다고 여기기도 하며, 이미 스스로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질문할수록 새로운 답변이 나온다.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이 입 밖으로.

과거도, 미래도 살지 말고, 현재를 살라. 이런 말을 새기며 올 한 해를 보냈다면, 연말만큼은 과거와 미래에 연연해도 좋다. 가까이 있는 친구와 가족의 과거와 미래에 함께 연연해 주는 것은 더 좋다. 1년은 금방 간다. 1년 뒤의 내가 열어볼 올해의 연말 결산을 떠올리며, 함께 질문하고 답하자. 연말 시상식에서 하는 연예인들의 수상 소감보다 훨씬 멋지고 감동적인 한마디를 건져 올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