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예비군이 등장했다.
지난달 3일 서울 서초 예비군훈련소. 군복을 입고 안보 교육을 받은 뒤 사격 훈련, 시가지 전투를 체험한 이날 훈련병 20여 명은 모두 노병(老兵)이었다. 57세부터 75세까지 평균 연령은 63.2세. 50대 후반 여성도 두 명이 포함돼 있었다. 교관은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습니다. 여러분의 열정이 걱정됩니다”라고 말했다. 다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표정이었다.
은퇴 세대가 다시 총을 들었다. 지난 6월 설립된 이 순수 민간 단체의 명칭은 ‘시니어아미(senior army)’. 저출산·고령화로 장차 병력 자원이 부족해진다고 하자 국방의 의무에서 면제된 50~70대가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다”며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다. 첫 입영 훈련은 미국 LA타임스가 1면과 6면에 걸쳐 보도할 만큼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우리 ‘시니어아미’ 회원들은 생물학적 나이보다 훨씬 더 건강합니다. 시간과 돈이 있고 무엇보다 애국심으로 뭉쳐 있어요. 그런 마음과 에너지를 모아 방향을 조금만 바꿔주면 국가 방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최영진(62·중앙대 교수) 시니어아미 공동대표는 “대한민국이 위태로운 상황을 맞으면 은퇴 세대가 젊은 세대보다 먼저 최전방에 서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육군, 공군, 합참, 특전사 등에서 발전자문위원을 맡아온 그는 “옛날에 시니어는 노인으로 불리며 보호와 돌봄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청년 못지않게 튼튼한 사람이 많다”며 “시니어아미 10만 양병(養兵)이 목표”라고 했다.
◇자비 부담으로 첫 입영 훈련
시니어아미는 당초 국방부에 2박 3일 동원 훈련과 실탄 사격 등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참가자를 20여 명으로 제한한 가운데 군복과 군화, 디지털 소총을 지급받고 시가지 전투 등을 체험했다. 레이저 센서가 장착된 장비를 착용해 총에 맞으면 삐~ 소리가 났다.
-몸이 의욕을 못 따라갈 수 있는데, 훈련받고 몸져누운 분은 없나요.
“전혀요.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뒹굴어도 재미있었다’는 반응이 나왔습니다. 젊은 예비군들은 덜렁덜렁 다니는데 시니어아미는 훨씬 더 규율 있게 움직인다는 칭찬도 받았고요.”
-훈련 비용은 누가 마련했습니까.
“자비 부담이 원칙입니다. 참가비 2만원 내고 상해보험에도 가입했어요. 무기와 훈련 시설 등은 제공받지만 나머지는 국가에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시니어아미라는 아이디어는 어떤 계기로 나왔나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인구가 1억5000만명인데 2022년에 예비군 30만명을 동원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인구 900만명의 소국 이스라엘은 올해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자 지원자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 시니어들은 국가와 민족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세대예요. 이렇게 자발적으로 준비하고 있으면 국가가 부를 때 이스라엘의 애국 행렬을 능가할 거라고 장담합니다.”
-회원 구성과 자격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현재 500여 명이고 대부분 군필자예요. 여성도 10여 명 있고, 미필자도 환영합니다. 60대 이상이 절대 다수지만 노인으로 불리는 건 싫어해요. 우리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약하지 않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50~75세는 유사시 자원 전력으로 관리할 계획입니다.”
-사회적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합니까.
“노년층의 가장 큰 사회 기여는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입영 훈련을 해보니 1석3조예요. 국가 안보에 기여하면서 건강을 관리하고 사회적으로 의료비가 절감됩니다. 장기적으로 10만명을 모으면 ‘60~70대들도 전쟁 나면 싸울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니 대한민국을 만만하게 보지 못할 거예요.”
-10만명은 너무 거창한 숫자 아닌가요.
“현실적으로는 1만명부터 달성해야죠. 매주 한 팀씩 입영 훈련을 하면서 1년 내내 돌릴 겁니다. 조직적으로 국가 안보에 이바지하고 싶습니다.”
◇출산율 0.6 시대의 역할 분담
통계청은 내년 출산율을 0.6명대로 전망했다. 국방부는 최근 병역 판정 신체검사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고 “고도비만 또는 저체중 인원도 내년부터는 3급 현역(그동안은 4급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최 대표는 “나쁜 결정”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요?
“지금 이미 90%가 현역으로 군대에 갑니다. 장부상 85%인데 장애인이 5%쯤 되거든요. 그걸 높이면 어떤 문제가 생기냐면 속칭 ‘문제아’들이 입대하게 됩니다. 상당수는 관심 병사가 될 텐데, 누가 관리합니까? 초급 간부들이 떠맡아야 해요. 키 175cm에 120kg인 고도비만인데 제대로 뛸 수나 있을까요?”
-훈련하기 쉽지 않겠습니다.
“150명이 훈련 들어가면 그런 아이들이 10명씩 나올 거예요. 그럼 살살 하는 수밖에 없어요. 훈련 강도가 하향 평준화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왜 추진할까요.
“국방부가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합니다. 지금 초급 간부들은 단순히 월급이 적은 게 아니라 일이 너무 힘들어요.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애들까지 관리해야 하잖아요. 제 말은, 그런 청년들을 군대로 끌고 가느니 건강한 시니어가 그 역할을 맡는 게 훨씬 낫다는 겁니다.”
-시니어아미 홈페이지(seniorarmy.or.kr)에 들어가 보니 ‘나라가 부르면 우리는 헌신한다’고 적혀 있더군요.
“지금 최전방에 군인 11만명이 묶여 있어요. 시니어아미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시간이 있고 약간의 돈만 있으면 총을 들고 위국 헌신할 수 있습니다.”
-올해가 정전 70주년인데 시니어아미 탄생의 의미라면.
“건강한 시니어의 탄생이라고 봅니다. 국가에 의존하기보다 국가에 기여하자는 취지고요. 그날 입영 훈련에서 제가 낭독한 다짐은 ‘우리는 인구 절벽 위기에 국가 예비 자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한다’였습니다. 은퇴 세대가 청년 세대를 돕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해요.”
-국방부는 시니어아미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나요.
“내심 더 활성화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봅니다.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해요. ‘나이 든 사람들까지 군대 끌고 간다’는 말이 나올까 봐 조심하는 겁니다.”
-저도 그렇고 군필자들은 다시 군대 가는 악몽을 가끔 꿉니다만.
“다 그럴 거예요. 제 친구들은 은퇴했는데 조국 산천을 주유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에너지와 시간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주면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훨씬 보람 있고 멋있게. 시대가 노병을 부르고 있습니다.”
◇새해 1월엔 20km 산악 행군
현재 한국군은 장교와 부사관 20만명, 병사 30만명 수준. ‘60만 대군’은 옛말이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에 따르면 인구 감소와 복무 기간 단축(18개월)으로 지난해 말 병력은 48만명으로 줄었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7명이 모두 입대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다 군대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K팝이든 스포츠든 국가에 기여하는 방식대로 판단하면 됩니다.”
-BTS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너희가 군대에 안 갈 수 있었는데, 우리가 대신할 수 있었는데, 미안하다 얘들아! 하여간 우리나라는 과도한 평등주의가 문제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내가 고생했으니 너도 고생 좀 해봐라죠. 저는 생각이 달라요. 50만 대군도 필요 없습니다. 머릿수로 싸우는 시대가 아녜요. 북한군 100만여 명이 남침할 수도 없습니다. 서너 개 축선에서 떼로 내려올 수밖에 없는데 자주포 쏘면 다 죽어요.”
-딸 가진 부모와 아들 가진 부모가 다를 수 있는데.
“제 아들은 현역으로 복무했습니다.”
-시니어아미가 전국적으로 확산할 수 있을까요.
“큰 틀에서 보면 시니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좀 달라져야 해요. 꼭 국방 분야가 아니라도 역할 분담을 새롭게 하자는 제안입니다.”
-국방부에 요청하고 싶은 게 있나요.
“시니어아미가 2박3일 입영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희가 참가비 등 비용을 일부 부담하면서 전국 예비군 훈련장을 사용할 수 있으면 돼요. 그럼 건강한 시니어들이 호응할 겁니다. 일종의 챌린지로 바람을 타면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어요.”
-당장 내년 계획이라면.
“1월에 ‘시니어아미 20km 행군 대회’를 엽니다. 산악 행군을 하는데 쌀 10kg을 배낭에 넣어줄 생각이에요. 장소는 북악산, 관악산, 청계산 등을 검토 중이고 무리하진 않을 겁니다. 시니어아미 10만 양병,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