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새벽, 1호선 구로발 열차에 불이 들어왔다. 새해 첫차였다. 4시 45분. 칠흑에 잠긴 사위(四圍)가 밝아졌다. 기관사가 동두천행 K802 전동차 조종칸에 올랐다. 레버를 당기자 열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철로를 미끄러질 때, 고래가 크게 숨을 뱉는 소리가 났다. 구로역 플랫폼에는 새해 첫날의 아침잠을 물리친 일군의 사람들이 방한 외투 속에서 입김을 흘리며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한석 기관사는 “첫차로 장보러 가시거나 야간 근무 하고 귀가하는 사람이 많다”며 “매일 봐서 얼굴 익은 분도 있는데 올해는 다들 좋은 일 생기셨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50년, 쉬지 않고 반세기를 근속했다. 매일의 시간이 온갖 사연과 함께 수도권 전철 1호선 위로 달려왔다. 5시, 문이 열리자 승객 십수명이 전철에 올랐다. 첫해를 보러 도봉산 등반에 나선 부부, 서울역에 아침 배식을 받으러 가는 노인, 가족의 행복을 빌기 위해 조계사 새벽 기도에 나선 중년 여성까지, 이들은 하나같이 더 나은 내일을 바라며 1호선 첫차를 탔다. 권지후(16)군이 꼭두새벽에 혼자 첫차를 탄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고등학교 입학하는데 새해 각오 다지려고요. 1호선이 연천까지 뚫렸다는데 백마고지도 보고 싶어서 밤새우고 왔어요. 큰맘 먹었는데 못 일어나면 안 되잖아요.”
◇한탄강 건너 38선 이북까지
대한민국 1호. 최고(50년), 최장(218㎞), 최다(102개 역) 기록이 1호선에 있다. 기록은 경신되고 있다. 오전 6시 40분 동두천역에 내렸다. 여기서 20분 뒤 북한 접경 연천행 열차가 도착할 예정이었다. 청산·전곡·연천역, 이 세 역이 지난달 16일 개통함으로써 1호선은 역 개수 100개를 돌파하며 38선 이북까지 건너가게 됐다. 일대 마을 곳곳에 ‘1호선 전철 시대’ 현수막이 나부끼는 이유다. 구석기 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역사책에 나오는 ‘연천 전곡리 유적’의 동네. 예부터 사람 있는 곳에 1호선이 있다. 인천광역시, 충청남도 신창, 경기도 연천…. 이 광역 전철은 언젠가 북한 땅까지 뻗어나갈지도 모른다.
이전까지 최북단 1호선은 경기도 동두천 인근 소요산역이었다. 이 지역에 철도가 연장된 건 17년 만이다. 개통 첫 주말에만 승객 1만4000명이 몰렸다. 열차가 청산역(옛 초성리역)을 지나 전곡역을 향하자, 까만 차창 밖으로 한탄강이 내려다보였다. 7분 뒤 연천역에 도착했다. 해방 후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1954년 행정권을 수복한 곳, 신역사 앞에 전쟁 도중 총탄의 흔적으로 뒤덮인 증기기관차용 급수탑이 지금도 서 있다. 그 앞으로 연천의 군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GOP에서 복무 중인 상병 김지환(22)씨는 이날 아침 휴가를 받아 연천발 전철을 탔다. “부대 인근에 1호선이 생기니 심리적으로 내가 집에서 멀리 있지는 않다는 위안을 받는다”고 말했다.
◇역사의 순간, 총성이 울렸다
역사(歷史)와 역사(驛舍)가 동음인 까닭은 필연적으로 사건을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구는 늘고 자가용은 부족하던 1974년 8월, ‘종로선’이 개통했다. 서울역부터 청량리역까지 9개 역을 잇는 9.54㎞ 길이 국내 첫 지하철. 우리 기술과 인력으로 착공 3년 만에 결실을 보는 “민족의 저력을 과시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10시 23분,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는다. 개통식을 불과 37분 남기고 1호선은 이슈의 중심에서 급속히 이탈했다. 건설 현장을 누비며 ‘두더지 시장’으로 불린 양택식 서울시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국가적 비극 앞에서 개발 계획도 변화가 불가피했다. 2~5호선 일정이 전면 조정되면서, 1호선 개통 당시 미리 완공해둔 예비 승강장은 공실(空室)이 돼버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의 증거가 신설동역 지하 3층 유령 승강장이다. 50년 가까이 일반인 출입이 막힌 곳, 그래서 역명판과 레일과 노란 안전선 등 초기 서울 지하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 이 과거의 유산은 그러나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걸그룹 트와이스 ‘Cheer Up’ 뮤직비디오를 비롯해 유명 영화·드라마 촬영장으로 사용되고, 2017년 미술 전시장으로도 변신하면서 일반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2022년에는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1호선을 타면 도시가 보인다
1호선은 철로의 90%가 지상(地上)에 있다. 서울교통공사가 운영하는 옛 종로선 구간과 한국철도공사 소유 기존 철도를 직결 운행하기 때문이다. 차창 밖으로 도시의 지형이 드러나는 이유다. 이는 그저 바깥 풍경이 보인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최근 부동산 정보 업체 다방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주택 월세는 1호선 주변에서 가장 저렴했다. 서울 지하철 1~9호선 역세권의 다세대 연립 매물 1만2772건을 비교한 결과였다. 원룸·투룸·스리룸까지 전부 예외가 없었다. 값이 싸다는 것은 낙후돼 있음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1호선은 주변부를 달린다. 이를테면 1호선은 잠실이나 강남을 지나지 않는다. 오전 11시 30분, 연천발 인천행 열차를 탔다. 지명이 낯설어지고 종점에 가까워질수록 창밖에서 빌딩은 사라지고 공장이 늘었다.
사진작가 노기훈(39)씨는 인천역부터 노량진역까지 거닐며 이곳의 경제·문화적 지형을 촬영한 ‘1호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노씨는 “1호선이 지닌 ‘주변부’의 감각을 나타내고자 했다”고 말했다. 연립주택의 낡은 창문, 역 앞 식당의 어질러진 식탁, 썰렁한 노점 꽃집, 전단으로 뒤덮인 유흥가…. 이 장소를 가족사진 촬영에 쓰는 대형 카메라로 찍었다. 그래서 이 낡은 풍경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인천으로 오는 동안 1호선은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하나둘씩 떨어뜨린다. 열차가 인천역에 가까워질수록 건물들이 낡고 낮아진다. 객차에는 맥아더 동상을 보러 가는 할아버지들이나 한국말과 중국말을 기묘하게 섞어 쓰는 화교처럼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사람들만 남았다. 1호선에 탄 사람들은 동시대의 풍광이 돼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할아버지랑 할머니, 행선지 달라요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본지가 SK텔레콤을 통해 받은 2023년 하반기 수도권 전철 이용 현황 자료에 따르면, 세대별 애용 노선은 극명히 갈렸다. 20대는 강남역·홍대입구역·잠실역·선릉역 등 기존 핫플레이스가 포진한 2호선에 집중됐다. 30·40대는 2호선 강남역·을지로입구역, 5호선 여의도역 등 오피스 밀집 구역에 몰렸다. 반면, 60대 이상부터는 종로3가역·청량리역 등 1호선이 순위권에 진입했다. 1호선이 ‘노인철’로 불리는 이유일 것이다.
1호선 라인에는 노인들에게 최적화된 생태계가 나름대로 구축돼 있다. 그 세계의 모습은 성별로 차이를 보인다. 서울시가 65세 이상 노인의 무임 교통카드 내역을 처음 분석한 2018년 자료를 보면, 할머니들의 ‘최애’ 목적지는 1호선 청량리역이었다. 1호선 제기동역, 3호선 고속터미널역이 뒤를 이었다. 재래시장이나 병원·약국 등이 많은 동네다. 반면 할아버지들은 휴식 공간 ‘종로3가’를 압도적으로 편애했다. 12시 20분, 점심 무렵 종로3가역 1번 출구부터 이들은 북적였다. 탑골공원에 이르자 담벼락을 둘러싸고 100여 명이 늘어 서 있었다. 새해맞이 떡국 배식 줄이었다.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는 사회복지원각 관계자는 “점심을 해결하러 인천 등 각지에서 매일 300명 정도 오는데 대부분 남자”라면서 “할머니들은 혼자서도 요리해 끼니를 챙기지만 할아버지들은 그게 안 되다 보니…”라고 했다.
◇진한 사람 냄새… 1호선은 감동을 싣고
‘냄새’는 노후화된 환경 탓에 제기되는 1호선의 주요 민원 사항. 그러나 그만큼 사람 냄새도 진하다. 2020년 3월, 한 여성이 1호선 용산역 승강장에 주저앉았다. 산모였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대학생 조문성(24)씨가 달려갔다. “이미 태아가 밖으로 나와 있었어요. 남편분은 휴대폰에 대고 계속 ‘살려달라’고만 하셨죠. 패닉이었나봐요. 일단 아이 상태를 살피고 산모를 마사지하고 말도 걸면서 진정시켰죠.” 담요를 들고 달려온 역무원들은 인간띠를 만들어 이들을 감쌌다. 알고 보니 이들은 남한에 온 지 갓 1년 된 탈북자 부부였다. “안 그래도 낯선데 얼마나 당황했을까요.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병원에 옮겨진 산모와 아이는 일주일 뒤 건강하게 퇴원했다.
1호선 영등포역에는 독특한 기념비가 있다. ‘그대의 고귀한 희생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리라.’ 스크린도어가 없던 2003년, 역무원 김행균(64)씨는 승강장 안전선 근처에서 위태롭게 놀고 있던 아이를 발견했다.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급히 선로로 뛰어 내려가 아이를 밀어냈지만, 본인은 치이고 말았다. 왼쪽 발목과 오른쪽 발등 아래를 절단했다. 이 악문 재활 끝에 이듬해 현장에 복귀했다. 1호선 역곡역장으로 근무하던 2014년 1월, 그에게 또 한번의 사건이 찾아왔다.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쪽 앞발이 잘려 피범벅이었다. 민원실에 데려다 정성껏 보살폈다. 살아난 고양이의 이름을 ‘다행이’라고 붙였다.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다행이는 그해 명예역장에 임명됐고, 부천시 측은 역곡역 남부광장 명칭을 ‘다행광장’으로 변경했다. “한 명의 철도원으로서 1호선은 내게 삶의 터전이었다”고 김씨는 덤덤히 말했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 1호선?
1호선에는 유독 큰 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사람이 많다. 독특한 복장, 요란한 몸짓도. 우스갯소리로 “1호선 최고의 복지와 이벤트를 담당하는” 그분들, 바로 ‘1호선 빌런(villain)’이다. 열차 바닥에 생선회와 초장까지 차려놓고 소주 병나발을 부는 ‘혼술 아재’부터 여성복 차림으로 아찔한 각선미를 뽐내는 ‘아수라 백작’ 할아버지까지. 신라 금관을 연상케 하는 수제 모자에 갑옷까지 껴입은 어르신, 이름하여 ‘우주사령관 자르반 84세’는 최근 넷플릭스 예능 ‘코미디 로얄’에서 패러디되는 등 대중문화의 주요 밈(meme)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새해에도 빌런은 곳곳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기자가 이날 포착한 빌런은 승강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열차 손잡이로 철봉 운동을 하는 귀여운(?) 수준이기는 했다.
급행까지 19개나 되는 헷갈리는 행선지, 기후나 돌발 상황으로 인한 잦은 연착, 게다가 이런 정신적 충격까지 견뎌야 하기에 1호선은 흔히 ‘강한 자들만 살아남는 노선’으로 불린다. “워낙 장거리 노선이라 별의별 사람이 다 탄다”는 것이 이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정설. 그러나 사연은 있다. 십자군 병정 의상으로 출몰하는 ‘투구남’(28)에게 1호선은 세상과 마주하게 하는 하나의 통로다. 대인기피증이 심해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다는 이 남성이 얼마 전 소셜 미디어에 남긴 고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너무 졸려서 정신과 약을 끊었더니 버스만 타도 가끔 소리 지르고 발작하더라. 감당하기 힘든 빚도 생기고, 에라 모르겠다, 갑옷이나 하나 사고 남은 돈 다 쓰고 사라지려고 했다. 근데 갑옷 입고 돌아다니니까 발작을 안 하더라. 투구 덕에 심리적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지.” 그러니 이들은 빌런이라기보다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노약자에 가까울 것이다.
◇차창 바깥으로 사라지는 풍경
세태가 가장 빨리 반응하는 장소, 많은 것이 사라졌다. 수레를 끌고다니며 물건을 팔던 잡상인도, 자신의 구슬픈 가정사를 읊던 앵벌이도 자취를 감추고 있다. 많은 유동 인구 덕에 한때 ‘알짜’로 불린 지하상가 숫자도 크게 줄었다. 8년 새 25% 감소했는데, 1호선은 지난해 10월 기준 공실률 10.7%를 기록했다. 높은 임차료와 온라인으로의 소비 패턴 변화 등에 부딪힌 것이다.
배우 황정민은 1호선에서 물건을 강매하던 깡패였고, 조승우는 특유의 너스레로 고무장갑을 팔았다. 지금껏 4257회 운행, 누적 승객 73만명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그러나 지난달 31일 멈췄다. 설경구·나윤선·장현성 등을 배출한 스타행 특급열차, IMF 외환위기 당시의 서울을 배경으로 매춘부·잡상인·노숙자·혼혈고아 등 한국 사회 소외 계층의 희로애락과 밴드 ‘무임승차’의 연주가 어우러진 전설적 작품이 초연 30주년을 하루 남기고 사실상 종연한 것이다. 노래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73) 대표의 건강 문제 및 재정난으로 극단 학전의 폐관이 3월 15일로 확정됐기 때문이다. “2025년이든 2030년이든 다시 돌아와만 달라” 같은 공연 후기가 쇄도하고 있다.
다행히 극적인 희망이 하나 피어났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측이 “지원 사업을 통해 학전의 부활을 돕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추후 문예위 측은 김 대표와 만나 세부적인 지원 내용과 향후 운영 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20대 기관사가 만드는 ‘1호선 감성’
1호선은 달린다. 지난해 10월 7일 저녁에도 노량진에서 용산역으로 향하는 1호선 전철은 한강철교 위를 달리고 있었다. ‘서울세계 불꽃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휘황찬란한 빛이 터져올랐다. 그때 4년차 기관사 구승범(27)씨는 열차 운행 속도를 3분의 1로 줄였다. 승객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퇴근길 만원 열차가 한 폭의 그림 속을 천천히 관통하는 특급 열차가 된 순간이었다. “바깥이 저렇게 예쁜데, 개인 사정으로 못 간 분도 많을 텐데…. 저도 그랬거든요.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단 1분이라도 눈에 아름다운 추억을 담아가셨으면 했어요. 다행히 민원은 안 들어왔습니다.”
올해는 우리나라에 철도국이 생긴 지 1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중요성과 무관하게 철도의 이미지는 여전히 거칠고 무겁고 녹슬어 있다. 한국철도공사 소속 1호선 기관사 강하영(28)씨가 지난해부터 사내 유튜버 ‘미스 기관사’로 활동하는 이유다. 가수 박진영이 지난달 청룡영화제에서 선보인 충격적인 공연을 패러디하거나, 실제 운행 열차의 부속 장치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ASMR 영상 등을 통해 그 고정관념을 깨나가고 있는 것이다. 활약에 힘입어 철도공사 측은 올해 유튜브 전담 TF를 꾸릴 예정. 최근 TV조선 ‘미스트롯3′에도 참가해 팬층을 넓힌 강씨는 “더 가까워지려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재밌어야 할 것 같았다”면서 “앞으로도 더 많은 시도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날 밤 10시 14분, 1호선 최남단 신창역에서 마지막 서울행 열차가 출발했다. 캐리어를 끌고, 짐가방을 짊어지고 역마다 올라탄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 조용히 눈을 붙였다. 열차는 자정을 14분 넘겨 종점에 닿았다. 또 다음날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