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의 한 구청 관할 도서관. 겨울방학을 맞아 어린이 열람실을 찾은 초등학생 30여 명이 위인전과 학습 만화 등을 펴놓고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오후 12시 50분부터 “우리 도서관 운영이 곧 종료되니 나갈 준비를 하라”는 안내 방송이 수차례 흘러나왔다. 사실은 도서관이 끝나는 게 아니라, 직원 점심시간인 오후 1~2시 잠시 문을 닫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어? 엄마가 여기 6시까지 여니까 책 실컷 읽고 오랬는데? 나 들어온 지 30분밖에 안 됐는데...” “1시간이나 어디에서 기다리지?”라며 웅성거렸다. 도서관 직원 4명은 열람실 조명을 일사불란하게 끄더니, ‘점심시간 휴무는 공무원의 권리입니다’라고 적힌 1.5m 높이 입간판으로 입구를 막아놓고 사라졌다.
쫓기듯 나온 아이들은 망설이다 대부분 귀가를 택했다. 7세 아들을 데려온 미국인 로라(40)씨는 “공립 도서관이 이용자가 제일 많은 한낮에 직원 식사를 이유로 폐쇄된다니 놀랍다. 여긴 방해받지 않고 독서할 수 있는 공간 아닌가”라고 말했다.
지난 9일 서울시가 운영하는 한강공원 눈썰매장에서도 같은 풍경이 벌어졌다. 신나게 놀던 어린이·청소년 200여 명이 12시 직원 점심시간이 되자 일제히 슬로프를 내려와야 했다. 부모들이 관리자에게 “그럼 우리도 바깥 식당에 다녀오면 되느냐”고 묻자 “나갔다가 재입장은 안 된다. (6000원짜리) 표를 다시 사든가, 그게 싫으면 썰매장 안에서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은 간편식으로 때우고 발을 동동 구르며 추운 벌판에서 꼬박 1시간을 기다렸다. 상당수는 “서 있으니 춥고 재미없다”며 떠났다.
◆ 공무원도 밥 먹어야… 셔터 내리고?
법원부터 시·도청, 구청, 주민센터, 우체국, 도서관 등 전국 공공기관에 점심시간 휴무제가 급속히 확산 중이다. 2~3년 전까지도 대민 서비스 부서 공무원들은 교대로 점심을 해결하며 일하는 게 ‘국룰’이었다. 점심 무렵 일 처리가 좀 느려지긴 해도 문을 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젠 다들 대놓고 셔터를 내린다. 관공서 점심에 맞춰 시민이 일정을 도미노처럼 옮기고 필수 편익을 포기하는 게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이 됐다.
“식사하셨어요?”라고 인사하고,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란 과격한 표현도 용인하는 우리의 소중한 밥 문화. 공무원도 예외는 아니다. “공무원도 밥 먹을 권리가 있다”는 명제 아래, “딱 1시간 문 닫는 게 대수냐” “여러분도 제때 점심 먹고 오시라”는 여론전이 파고든다. 그런데 이 ‘딱 1시간’은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점심 여유 없이 생업으로 바삐 뛰는 납세자의 불만과 갈등이 폭발하고 있다.
인천 시민 이모(64)씨는 최근 빠른 등기우편을 보낼 일이 생겨 정오쯤 동네 우체국에 달려갔다. 그런데 처음 보는 ‘12~13시 점심 휴무’란 안내문에 당황했다. 3㎞ 떨어진 다른 우체국에 갔더니 거긴 점심시간이 12시 30분부터였다. 20분부터 접수를 안 받았다. 결국 그는 원래 우체국으로 돌아와 계단에 걸터앉아 1시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이씨가 낭패를 본 건 지난 12월 27일부로 우정사업본부 내규상 점심 휴무를 할 수 있는 점포의 기준이 ‘직원 4명 이하’에서 ‘5명 이하’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우체국은 2016년부터 지방 소규모 지점부터 점심 휴무제를 도입, 현재 대형 지점을 빼고 3곳 중 2곳이 점심에 문을 닫는다. 시간도 지점별 재량이라 들쭉날쭉이다.
서울 종로의 40대 자영업자는 오후 개업 전 구청에 인허가 신청을 하러 갔다가, 12시 점심 휴무에 걸려 할 수 없이 점심 먹고 기다리기로 했다. 지하 구내식당에 가니 ‘공무원은 11시 30분부터, 일반인은 12시 30분 이후 식사할 수 있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일반인 식권은 훨씬 비쌌다. 그는 “밥 먹을 권리도 공무원 편의대로 짜여 있고 시민은 을(乙) 같다”고 했다.
◆ K-공무원 점심은 어떻게 퍼졌나
‘K-공무원 점심’의 원조는 각 법원 민원실이다. 판사들만큼이나 권위적이고 타협 없기로 유명한 법원 행정직 노조는 20년 전부터 점심시간 휴무제를 사수해 왔다. 법원서 부동산 등기 업무 등을 보려면 직장인은 반차나 연차를 낸다. 이어 문재인 정부 때 일반 국가·지방 공무원 노조가 속속 합법화되면서 이들이 핵심 목표로 내세운 점심 휴무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때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다. ‘대면 서비스 최소화’ ‘공무원 휴식권 보장’을 명분으로 2021년 광주와 부산광역시에 점심 휴무가 기습적으로 도입됐다. 사람들은 놀랐다. “점심 다 먹은 공무원들이 민원인을 밖에 세워놓고 불 꺼놓고 잡담하고 있더라” “12~13시 점심이라는데, 11시 30분부터 나갔다가 커피 마시고 이 닦고 1시 반에 일 시작하더라”는 목격담도 나왔다. 조직되지 않은 시민의 불만은 허공에 흩어졌다.
이어 2022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점심 휴무가 유행처럼 퍼졌다. 조직력에서 우세인 공무원 표심에 민감한 지자체장 후보들은 ‘점심 휴무 실시’를 공약했다. 대구시에선 점심시간 휴무제를 도입하려다 2023년 3월 전면 보류됐다. 홍준표 시장이 “민원실 폐쇄해놓고 점심 먹겠다는 생각이면 공무원 관두라”며 막았다. 전국공무원노조 대구본부는 ‘점심 휴무제 쟁취 투쟁본부’를 차려 시위를 200일째 이어가고 있다.
공무원 조직의 논리는 이렇다. ‘모든 직장인에겐 점심시간이 있다. 9~18시 근무 중 점심 1시간을 빼야 주 40시간 근무 규정을 맞추는데, 대민 서비스 분야만 점심 휴무권이 무시됐다. 돌아가며 밥 먹고 오면 오히려 총 휴식 시간이 늘어나 민원인 불편이 커진다. 1시간 다 같이 쉬면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 한국 행정은 이미 세계 최고이니 그 정도는 감수해라. 꼭 점심 때 일을 봐야겠다면 증명서 무인 발급기나 정부 24 등 인터넷 서비스를 활용하라. 그래도 불만이면 공무원을 더 뽑든지...’
◆ ‘딱 1시간’의 나비효과
그렇지 않아도 관(官)이 민(民)을 누르는 사회, 이 공무원 특유의 세계관에 대한 반론이 폭발한다. “식당·은행·병원·학원 등 어느 민간 업체가 손님 몰리는 시간에 장사를 쉬나” “병·의원은 점심에 쉬더라도 퇴근 시간대나 주말에 문 연다. 저녁·주말에 문 여는 관공서가 있느냐”는 것이다.
전북 전주에 사는 작가 박헌정씨는 “학교나 공장처럼 한꺼번에 움직이는 조직은 점심 휴무를 일괄 부여하는 게 맞는다. 유럽의 시에스타(낮잠)처럼 다 같이 멈춰 서는 문화권도 있다. 그러나 세금으로 일하는 공복이 민원인이 움직이는 시간에 쉬겠다면 사회적 합의부터 구해야 한다”고 했다.
‘무인 발급기 만능론’도 비판받기는 마찬가지. 노인·장애인 등 키오스크나 인터넷이 익숙지 않은 계층이 있다. 인감 증명서 등 대면으로만 발급하는 공문서도 많다. “무인 발급기가 업무를 대체할 수 있다면 인간 공무원은 필요없는 것 아닌가” “민원 응대가 귀찮으면 외부 업체에 위탁하라” “교사·군인·경찰·소방관·지하철 기관사가 점심 휴무를 주장할까 겁난다”는 말이 나온다.
교육 분야 피해도 크다. 전국 거점 도서관을 제외한 중소 규모 도서관, 장난감 도서관, 청소년 수련원, 공공 놀이시설, 박물관과 과학관마다 점심 휴무가 당연시되고 있다. 이 하루 허리의 ‘딱 1시간’이 서비스의 맥을 끊고 이용 시간을 단축시켜 공공 시스템에 대한 회의를 키운다.
유치원생 딸을 둔 서울 양천구 주부 박모씨는 “저렴한 서울형 키즈카페가 생겨 좋아했는데, 오전 한 타임 하곤 점심 2시간 쉬고, 5시 공무원 퇴근에 맞춰 칼종료하더라. 예약이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각지의 부모들이 “워킹맘은 관공서 업무 보려 휴가 낼 판” “방학에 도서관에 아이를 보내기 꺼려져 학원을 돌리게 된다”며 점심 휴무 폐지를 요구하는 민원을 넣고 있다. 글쎄, 어느 쪽이 이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