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 2인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이 패전 후 ‘치안 유지’ 요청을 위해 처음 접촉한 인물은 여운형이 아니라 전 동아일보 사장이자, 우익 지도자 송진우였다. 그 또한 일본과 타협하는 행위라 생각한 송진우는 엔도의 제안을 즉석에서 거부했다. 이후 엔도의 제안을 수락한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 참여를 요청했을 때는 여운형을 ‘경멸’하며 그 제안 역시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 호남 지주와 우익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임정) 봉대(奉戴)’를 기치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조직했다. ‘당수’에 오르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이승만과 김구가 환국하면 당수로 추대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수석총무’를 맡았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이 국내에 알려졌다. 이튿날 경교장에 좌우익 정당·사회단체 대표 수십 명이 모였다. 그들은 임정 중심으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고 “군정청의 모든 업무를 인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와 동시에 경찰을 포함한 군정청 한국인 직원들이 총사직을 결의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극장, 백화점, 상점들, 심지어 연말 대목을 맞은 ‘유흥업소’와 ‘댄스홀’까지 일제히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김구는 “우리가 왜 서양 사람 구두를 신느냐. 짚신을 신자. 양복도 벗어버리자”며 격분했다.
나흘 후면 ‘찬탁’으로 돌변할 공산당까지 모두가 흥분한 상황에서 오직 한 사람, 송진우만이 “침착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자”는 소신을 밝혔다. 송진우 역시 “임정 중심으로 끝까지 신탁통치 반대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원칙에는 동의했다. 다만, “삼상회의 결의문도 읽지 않고 라디오 방송만 듣고 미군정을 부정하고, 임정 이름으로 독립을 선포하면, 결국은 공산당이 어부지리를 취할 우려가 있다”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회의는 이튿날 서울운동장에서 시민 궐기 대회를 개최한다는 데 합의하고 마무리됐다. 송진우는 원서동 자택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10시가 지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인 30일 오전 6시 청년 다섯 명이 송진우의 자택 뒷담을 넘었다. 청년들은 송진우의 침실로 달려가 깊이 잠든 송진우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10여 발을 난사했다. 얼굴, 심장, 다리에 한 발씩, 복부에 세 발, 도합 여섯 군데 총상을 입은 송진우는 누운 자리에서 서거했다.
10월 이후 석 달째 미군정이 제안한 ‘경기도 경찰부장’직 취임을 머뭇거리던 한민당 외교부장 장택상은 송진우 암살 소식에 취임을 수락하고 직접 수사에 나섰다. 수사 결과는 100일 이상 지난 1946년 4월에야 발표되었다. 공산당 혹은 임정이 배후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한현우라는 스물아홉 살 젊은 ‘정치적 몽상가’가 특정 정치 세력과 연계 없이 청년들을 규합해 벌인 독자적인 테러였다.
한현우는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일본의 극우파 정치인 나가노 세이고의 ‘동방회’에서 활동했다. 도조 히데키 총리를 암살하려다 사전에 발각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귀국 후 자택 2층에 ‘격몽의숙’을 차리고 청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민족을 위한 자신의 ‘사상’을 전파했다. 한현우는 좌우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등이 민족이 아니라 자파(自派)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세 사람 모두를 암살하고자 했다. 먼저 격몽의숙에 유숙하던 20세 유근배, 21세 김의현, 19세 이창희 등과 함께 여운형, 박헌영을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송진우가 신탁통치에 찬성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접하고는 순서를 앞당겨 암살한 것이었다.
경찰, 검찰 수사를 받는 100여 일 동안, 한현우는 ‘조국 동포에 고함’이라는 장문의 옥중 수기를 집필했다. “진정한 조선 사람, 진정한 애국자라면 ‘피와 땀과 눈물’ 가운데 조국 광복의 광명을 볼 것이다. (…) 나는 송진우와는 개인적으로 원한이 없으므로 송진우의 영(靈)에 대해서는 사과하며 명복을 빈다. 나는 살인범이다. 나의 죄를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엄중한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 아! 그러나 죄인인 나에게도 감개(感慨)가 있다. 우리나라 정부가 설 때까지 싸워 나가지 못하는 것과 군정하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원통하다”(조선일보 1946. 5. 12.)
1946년 8월 서울지방법원에서 한현우와 유근배는 무기징역, 나머지 공범 3명은 징역 5~10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2월 대법원에서 한현우는 징역 15년, 나머지 공범은 징역 4~10년으로 감형돼 형이 확정되었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한현우는 6‧25전쟁 기간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석방돼 일본으로 밀항해 그곳에서 ‘자유인’으로 천수를 다했다.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출범을 앞두고 정책수석으로 내정되었던 전병민은 한현우가 장인으로 밝혀져 자진 사퇴했다.
한민당 당원으로 김성수, 송진우와 가까운 사이였던 김병로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퇴임 기념 연재 기사에서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 하나를 털어놓았다. “하루는 수도청장 장택상씨가 돌연히 한민당에 나타나 수석총무 김성수씨와 나를 조용히 만나자 하여 별실에서 회담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한현우 외 2명의 피의자를 취조하는 중 사진 한 장이 증거물로 압수되었는데 그 사진은 피의자들이 범행을 결의하고 최종으로 찍은 것으로 측면에 (김구 최측근) 엄항섭의 얼굴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취조하던 장택상씨는 이에 경악하여 가볍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와 같이 논의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습니다.”(조선일보 1958. 1. 7.)
김병로는 임정으로 수사를 확대하면 국내외 정치에 파장이 클 것을 우려해 ‘문제의 사진’을 덮어두기로 세 사람이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이후 엄항섭과 임정 주요 인사에게 개인적으로 물어보았을 때, 그들 모두 한현우를 알지 못한다고 했고, 법관의 직관으로 보더라도 “엄항섭 개인이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임정의 주요 인사가 관련되었다는 세간의 의혹은 사실에 부합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 일화를 불과 1개월 전까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가 이처럼 장황하게 설명한 데에는 그렇게라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송진우 암살 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4개월 전까지 폭력에 의지한 정치적 의사 표현은 불가피했고, 때로는 영웅적 행위로 추앙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해방 이후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과정에도 과거와 똑같이 용인될 수는 없었다.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것은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특성이다.
<참고 문헌>
양재인, ‘해방정국에 있어서의 정치테러’, 한국정치학회보 제20-2호, 1986
장병혜, ‘상록의 자유혼’, 창랑 장택상 기념사업회, 1992
재단법인 고하 송진우 기념사업회, ‘독립을 향한 집념’, Safety Play Book,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