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마다 있는 흔해빠진 건물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저택이라 생각하자. 현관문에 달린 손잡이(Door knocker)를 세 번 두드리니 끼익, 문이 열렸다. 일곱 명의 훤칠한 집사(執事)가 도열해 있다. “도련님 다녀오셨습니까.” 화사한 유럽풍 실내, 식탁에 작은 종(鐘) 하나가 놓여 있다. 고매한 손끝으로 이 종을 흔들면 집사가 달려올 것이다.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실수로 소리를 내자, 1초도 안 돼 집사 한 명이 와 허리를 숙인다. “종소리만 들리면 ‘파블로프의 개’마냥 반응하다 보니…. 필요하실 때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누구나 중세의 백작이나 귀부인처럼 대접받는 곳, 그리하여 잠시 현실을 잊는 곳. 이른바 ‘버틀러(Butler·집사) 카페’가 국내에 상륙했다. 일본에서 성업하던 이색 공간이 한국으로 영역을 확장한 것이다. 지난달 서울 연남동에 문을 연 국내 1호는 즉각 소셜미디어를 뒤흔들며 한 달 임시 운영 내내 매진(100% 예약제) 행진으로 성공 가능성을 맛봤고, 지난 12일 정식 개업했다. 이미 1월 치 예약이 꽉 찼다. 이튿날 찾은 이곳은 토요일 저녁의 홍대와 사뭇 다른 텐션으로 만석(滿席)이었다. 기자를 제외한 테이블 여섯을 채운 손님은 모두 여성이었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아가씨, 외롭지 않게 해드릴게요”
집사들은 하나같이 훤칠하다. 검은 정장에 풀메이크업, 화려한 액세서리까지. BTS 멤버 지민과 생김새가 흡사한 집사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진가는 외모가 아니다. 앉으면 담요를 덮어주고, 무릎 꿇은 채 이야기를 경청하다가, 누가 옷이나 가방을 떨어뜨리면 몸을 날려 주워주는 쇼맨십이다. 집사 한 명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한 여성 손님을 발견하더니 다른 집사를 호출한다. “아가씨의 친구분께서 화장실에 가셨다는데 그동안 외롭지 않게 해주시겠어요?” “잠시 눈싸움이라도….” 이날 친구와 이곳을 찾은 강모(18)양은 “일본 문화가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응대 수준이 높았다”면서 “평소 듣기 힘든 호칭과 극존대에 자존감도 올라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드물지만 남성들도 집사 카페를 찾는 이유다. 이곳의 규칙 중 하나는 아가씨와 도련님은 찻잔보다 무거운 물건을 혼자 들면 안 된다는 것. 주문한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 세트가 도착했다. 익숙한 속도로 3층짜리 접시를 일거에 비웠더니 한 집사가 다가와 목소리를 떨었다. “도련님이 힘이 어딨으시다고…. 접시는 제가 내려드려야 하는데, 이러시기예요?” 외관상 잠바때기 차림의 기자와 누가 봐도 주객(主客)이 전도된 상황. 그러나 짐짓 근엄한 태도를 유지하며 집사에게 요구했다. “오늘 하루 너무 피곤했는데 위로 좀.” 그러자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능란한 대답이 돌아온다. “수많은 일을 관장하시니 어찌 고단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이 또한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숙명이오니 조금 더 힘내주시기를 감히 조언드립니다.”
◇합의된 연극… 자존감 채우는 사람들
먹고살기 힘들다. 집사 말고 하녀도 있다. ‘메이드(Maid·하녀) 카페’다. 하녀 복장의 젊은 여성들이 손님을 ‘주인님’으로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는 곳, 이 역시 대표적 왜색 서브컬처다. 서울 홍대 주변을 중심으로 지난해부터 확산 추세. 근처 한 메이드 카페에 방문했다. 다만 콘셉트가 조금 의아하다. “잘 돌아오셨군요, 용사님(이렇게 일본어로 말했다).” 여기서 손님은 용사다. 그러니까 마법 세계에 온 것이다. 자리에 앉자 메이드(혹은 요정)가 오래된 족자를 펼쳐 이곳의 서사를 설명한다. “서기 625년 마족의 침공이 우리 왕국을 위협하고 있는 처지이고… 먼 길 떠나기 전 왕국의 쉼터에서 메이드들과 몸과 마음을 회복하라”는 내용이다.
항마력이 필요하다. 메이드를 부를 때 반드시 “냥냥”을 외쳐야 하고, 오므라이스에 즉석으로 케첩 그림을 그려준 메이드가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큥” 같은 주문의 노래를 부르면 함께 따라 불러야 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코스프레 및 오타쿠 문화에 기반한, 관객 체험형 연극인 셈이다. 집사 카페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더 강하다. 추가 요금을 내면 카페 중앙의 의자에 해당 손님을 앉히고 메이드가 5분간 귀여운 댄스를 선보이는데, 특정 메이드의 팬을 자처하며 그의 이름이 들어간 ‘응원봉’을 제작해 선물로 가져온 남성도 있었다.
20평 남짓한 실내에 주말에는 메이드 7명이 근무한다. 테이블에는 메이드의 프로필이 담긴 미니 앨범이 놓여 있는데, 무려 14명이었다. 단골을 늘리려 이들은 인스타그램 주소가 적힌 명함을 돌리며 개인 영업도 뛴다. 고객층은 군인부터 남녀 커플까지 다양했는데, 이날 기자 옆 테이블에는 엄마와 함께 온 초등학생 여자아이도 앉아 있었다. 일본에서도 메이드 카페를 두어 번 가본 경험이 있다는 조모(38)씨는 “기본적인 콘셉트는 두 나라 모두 비슷하다”면서 “나를 온전히 주인공으로 치켜세워주고 웃어주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지갑을 열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한 갑을, 그러나 갑질은 금물
스왈로테일(유명 집사 카페), 앳홈(메이드 카페) 등 이 같은 서비스가 2000년대 초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를 중심으로 퍼져나갈 당시 제기된 대표적 비판은 성(性) 상품화였다. 물론 국내 업소에서 집사·메이드와의 신체 접촉 및 무단 촬영, 음주 입장은 엄격히 금지된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가게에서는 돈을 내면 손님의 뺨을 때려준다든지, 귀를 파주거나 어깨를 주물러주는 등의 낯 뜨거운 변질도 일어나고 있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현실의 신분 변화를 꿈꾸는 대신 돈을 내고 잠시 자아의 고양감을 누리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병들어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확실한 갑을(甲乙) 관계로 정신적 만족감을 안겨주는 게 핵심이지만, 갑질은 금물. 공지 글을 보자. “집사는 여러분을 위한 서비스맨일 뿐 종이 아닙니다. 아가씨와 도련님을 위한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해드릴 수 있도록 머무시는 동안 부디 우아하고 멋진 품위 유지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서비스 말미에 진정한, 그리고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전근대적 응대의 끝에는 첨단의 자본주의적 결제 시스템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가격은 음료 및 음식(디저트) 주문 시 대략 2~3만원 수준. 입장료 1만원은 별도다. 여기에 기념사진 찍기, 함께 게임하기, 의상 입어보기, 춤 신청까지…. 요구는 곧 요금. 기자도 얼떨결에 집사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계산서에 1만2000원이 추가돼 있었다.
이용 시간 1시간이 다 됐다. “도련님 다녀오십시오.” 현관문을 나서자 뒤에서 집사와 메이드들이 공손히 인사한다. “용사님 다녀오세요!” 그러나 일상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서 누구나 조금은 씁쓸해질 것이다. 내가 아니라, 돈이 주인님이었음을 알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