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세라핌. /쏘스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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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종로의 밤, 불 꺼진 낙원 상가. 주황색 머리에 자주색 패딩을 입은 키 172cm의 여성이 버려진 음료수 컵을 주워 빨대를 꽂아 한 입 머금습니다. 카메라는 그를 따라가다 전신을 비춥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패딩 안으로 그는 브래지어 톱과 팬티만 입고 있습니다. 남사스럽기보단, 차원이 다른 세계로 온 듯합니다. 뒤에 깜박이는 초록색 신호등도 이국적입니다. 낡은 낙원 상가 굴다리가 어느 게임 속 던전(미궁의 공간)으로 보입니다.

이 영상의 주인공은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의 허윤진, 르세라핌의 미니 3집 ‘이지’ 예고편 ‘굿 본즈’의 한 장면입니다. CF계의 스타 감독 유광굉이 참여했습니다. 르세라핌은 종로와 을지로 등을 배경으로 어두운 골목과 칙칙한 지하실을 걸어 다닙니다. 영화 같은 영상미를 바탕으로 패션쇼 같은 런웨이가 인상적입니다. 타버린 날개도 개의치 않는 카즈하, 코피를 흘리는 사쿠라, 호쾌한 덩크슛을 하는 김채원, 계단에서 구르는 홍은채.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모습은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허윤진의 ‘속옷 패션’입니다.

씨스타 19. /씨스타 공식 틱톡

올해 초 여자 아이돌들의 컴백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씨스타 19의 ‘노 모어’를 시작으로, (여자) 아이들의 정규 2집 ‘투(2)’, 다음 달 19일에는 르세라핌의 미니 3집의 컴백이 이어집니다. 이들을 관통하는 패션은 한겨울 날씨가 무색하게 바지를 입지 않은 ‘팬츠 리스’입니다.

11년 만에 컴백한 걸그룹 씨스타 유닛 ‘씨스타 19′의 ‘노모어’는 흰 눈을 배경으로 흰색 브래지어 탑과 팬티를 입고, 흰색 부츠를 신고 노래를 부릅니다.

(여자)아이들 역시 지난 16일 흰 눈을 배경으로 은색 반짝이는 비키니 톱과 짧은 흰색 하의를 입은 콘셉트 포토를 공개했습니다. 지난 26일 공개한 타이틀곡 ‘수퍼 레이디’ 티저 영상에서는 검은 제복 아래로 바지를 입지 않고 부츠를 착용한 패션을 보여줍니다.

(여자)아이들. /큐브 엔터테인먼트

‘노팬츠룩’, ‘팬츠리스’는 지난해 미국 할리우드와 패션계를 강타했던 패션입니다. 배우 앤 해서웨이, 모델 헤일리 비버, 모델 켄달 제너는 ‘노팬츠의 여왕’으로 불립니다. 모델 벨라 하디드도 흰색 속옷과 어그 부츠를 신고 거리를 거닐었습니다. 카일리 제너는 검은색 타이즈 위에 팬티를 입고 로에베 쇼에 참석했습니다.

카일리 제너. /카일리 제너 인스타그램

캐주얼함과 포멀함이 공존하는 이 패션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LA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는 휴가지에서 비키니를 입고 바닷가 물놀이를 하다, 저녁에는 코트를 걸치고 만찬을 가는 모습 같다고도 합니다. 대중적으로 유행한다면, 휴가지에서 입기 편한 스타일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민망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이 바지를 입지 않는 ‘노팬츠룩’은 런웨이·레드카펫부터 LA 길거리로 확산되다, 한국의 아이돌까지 상륙했습니다.

에디 세즈윅. /브리티시 보그 핀터레스트

이 트렌드의 시작은 1950년대 ‘댄스복’입니다. 많은 댄서들이 길고 우아한 라인을 만들기 위해 타이즈 위에 레오타드(상의와 팬티가 결합된 의복)를 입었습니다. 댄서들이 입던 옷을 할리우드 여배우와 연예인들이 따라 입고 춤을 추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사가 앤디 워홀의 뮤즈였던 에디 세즈윅입니다. 그녀는 평소에도 바지를 입지 않고 팬티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 다니는 ‘하의 실종’ 패션을 즐겨 입었습니다.

미우미우 23 FW 컬렉션. /미우미우

이 패션은 1980년대 에어로빅 열풍이 불면서 다시 운동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인 폰더가 대표적입니다. 그때부터 10년에 한 번씩 크리스찬 디올, 미우미우 등에서 돌고 도는 패션 트렌드로 런웨이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국내도 김완선·엄정화 등 여자 댄스 가수들이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이렇게 무용복에서 시작된 기능성 패션이 댄스가 중요한 K팝 여자 아이돌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패션 관계자는 “바지가 사라진다는 것은 자유로움을 의미한다”며 “코로나 유행 시기 트레이닝복 바지가 유행했다가, 다시 외출이 시작되면서 노팬츠룩이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르세라핌. /쏘스뮤직

패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화제성 하나는 제대로 잡은 듯합니다. 르세라핌의 트레일러는 공개 당일 오후 6시 유튜브 월드와이드 트렌딩 1위를 차지했습니다.

엑스(옛 트위터)에는 ‘낙원상가 르세라핌 투어’ 인증 사진이 올라옵니다. “세기말 감성 난다”, “아포칼립스 세계 같다”, “홍콩 뒷골목에 온 듯하다”는 반응들입니다. 진짜 그럴까요? 저도 오늘 밤 낙원상가를 가봐야겠습니다. 물론 바지는 입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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