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을 뜻하는 영어 February는 라틴어 Februs(정화⸱청결)를 어원으로 한다. 로마인들은 이때가 되면 부정(不淨)을 막는 부적을 곳곳에 붙였다. 2월 이즈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동서양이 대동소이했던 모양이다.
설날 연휴 나흘은 소중한 휴식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명절의 분망함은 사람을 흩트려 놓는다. 일상으로의 복귀 전에 자신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터. 10년 전 만났던 튀르키예 영화 ‘윈터슬립(Winter Sleep)’을 찬찬히 다시 봤다.
“당신(아이딘)이란 사람 못 견디겠어요. 이기적이고 심술궂고 냉소적이고, 상대의 마음을 옥죄고 의견을 짓밟고 굴욕감을 주죠. 당신은 나름의 주관과 원칙을 주로 세상을 미워하는 데 써요. 보수적이고 융통성이 없다고 노인들을 싫어하면서, 너무 자유분방하고 전통을 쉽게 저버린다며 젊은이들도 혐오하죠. 공동체의 덕목을 대체로 따르지만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게 진짜 당신 속마음이에요. 안 그런가요?”
젊은 아내(니할)가 중년인 남편에게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을 울며 던진 말뭉치다. 양심과 도덕, 권태와 결핍, 사랑과 구원 등의 주제를 다룬 이 놀라운 작품에서 이 땅의 5060 세대는 내면을 들킨 듯한 당혹감과 함께 반성과 성찰을 품게 된다.
여기 돌파구를 위한 팁이 있다. 아웃사이트(outsight). 외부 관찰력, 외면 통찰력이란 의미다. 이제까지는 인사이트(insight)가 대세였다. 문제가 생기면 심리적‧내재적인 고민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힘이다. 아웃사이트는 다르다. 밖에서 얻는 것이다. 지금껏 안 했던 일을 해보고 못 보던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는 활동을 통해 얻는 관점과 시각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젊은 회사원 송경진(35)씨를 만났다. 2019년 이래 명절 때만 되면 내게 문자로 안부를 물어온 그는 서울시 주최 스피치 대회 때 만난 인연. 대상(大賞)의 주인공이었고 나는 그를 칭찬하는 심사평을 해준 기억을 소환했다. 5년 만에, 이번엔 사적인 재회.
송씨의 말하기 제목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일견 주제가 평범했으나 내용은 벅찬 놀라움과 뭉클한 감동이었다.
“신입사원 때, 직장에서 달동네 백사마을에 연탄 봉사를 하러 갔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기부나 봉사는 ‘가진 사람’ ‘잘사는 사람’의 영역으로 치부했었는데 못사는 분, 덜 가진 분, 청소년, 심지어 장애인들까지 와서 열심이었죠.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늘 ‘빚지고 살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는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 사람으로 환골탈태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후 송씨는 ‘어머나운동본부’라는 곳을 알게 된다. ‘어머나’는 ‘어린 암환자를 위한 머리카락 나눔’의 줄임말로 소아암 어린이에게 모발을 기부해 가발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 동료 여직원이 늘 하던 말을 떠올렸다. “경진씨는 머리가 참 빨리 자라는구나”. 머리카락 기부 결심의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현실. 삭발이 필수고 일정량의 머리카락 타래를 얻으려면 최소 2년 이상 자르지 않아야 한다. 샴푸 소비는 평소의 3배에 수시로 일어나는 정전기는 통과의례다. 머리를 풀면 모르되 단정 모드가 되려면 고무줄과 머리끈으로 묶고, 드라이는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가족은 거실에 수북이 쌓이는 머리털을 타박하고 직장 상사는 단발령을 압박하며 불이익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송씨는 자신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근사한 가발이 되어 소아암 아이의 머리에 안착하는 기꺼운 상상을 하며 버텼다.
“지금은 경북 영덕에 있는 풍력발전소에서 일합니다. 도시공학 전공이라 설계도 만드는 게 업(業)이지만 기획⸱개발⸱시공⸱운영을 다 경험해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숙소 제공이 매력적이었어요. 집값이 절약되잖습니까? 풍력은 블레이드(날개) 달린 타워(탑) 올리는 데 10년 걸립니다. 전기사업법⸱국토계획법⸱산지관리법을 꿰뚫고 공무원과 주민들을 설득하는 게 일이죠. 말하기 대회 나갔던 게 큰 힘이 됩니다. 긴 머리를 하고 갖은 고생(?)을 한 것도 인내심을 키웠고요.”
영화 ‘윈터슬립’의 중늙은이 아이딘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내 청춘은 어둡고 따분했다오. 그래서 뭐가 행복인지 모르는가 봐. 남을 행복하게 하는 건 더 모르겠고. 미안해.”
나는 80년대에 20대를 보낸 세대다. 세상은 무도하고 불온했다. 우리는 정의로운 분노와 용기 있는 저항엔 익숙했으나, 그래서일까? 친절⸱겸손⸱화합⸱관용이 부족하다. 대개는 아이딘의 고백처럼 무엇이 행복인 줄 모르고 산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구상(1919~2004) 시인의 시 ‘꽃자리’에 나온다. 행복의 다른 표현이리라. 이 땅의 아름다운 청년들과 우선 만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