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첫 빛이 나타났다. 초속 35m 이상의 태풍으로 요트를 뒤흔들던 바다가 거짓말처럼 잔잔해졌다. 금빛과 분홍빛으로 그린 천상의 캔버스처럼 따뜻하고 순해 보였다. 우리 요트, 우리 팀의 투지와 인내심을 무자비하게 시험하곤 하던 남태평양 폭풍과 해일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1년 동안 바다에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클리퍼(Clipper) 세계일주 요트대회’에 출전 중이다. 지난해 9월 영국 포츠머스에서 출항해 우루과이~남아프리카공화국~호주를 거쳐 지금은 베트남으로 향하는 중이다. 얼마 전 적도를 지났다. 앞으로 중국과 미국 시애틀, 파나마운하 등을 거쳐 오는 9월 포츠머스로 귀항한다.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으면 요트로 무동력 세계 일주를 한 한국 여성 1호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요트는 32t에 길이가 23m다. 바다와 하늘이 요동치며 흐려질 땐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역설적으로 그 순간 살아 있음을 느꼈다. 자연 앞에 겸허해지고, 인간에게 내재된 인내의 위대함을 체험했다. 요트가 전복될 위험에 맞서 싸우면서 조종대를 잡고 있을 때 선장의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힘을 빼! 조종대를 풀어!”
그 순간, 진정한 힘은 저항이 아니라 때론 자연의 섭리와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그토록 찾던 힘은, 투쟁만이 아니라 내려놓음 속에도 있구나. 때로는 자연과 싸우고 저항하지만 때론 받아들이고 흐르는 대로 내버려둔다.
요트의 조종대를 풀고 흐름을 포용한 그때 기념비적 일출을 목도했다. 감사함으로 가득한 그 공기 속에서 시련을 극복한 힘에, 자신에 대한 신뢰에, 팀의 결속에 경탄했다. 파도의 리듬에 새겨진 교훈과도 같았다. 이렇게 가끔은 삶의 통제권을 놓고 나서야 진정한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나는 4년 전에 나를 발견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다져 놓은 길이 아닌, 나만의 방향으로 가는 한 걸음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4회 완주한 어머니에게 영감을 받았다. 어머니는 11kg의 배낭에 홀로 의지한 채 야생의 숲에서 캠핑하고, 숱한 물집과 관절의 고통을 인내하며, 자신과 삶의 흐름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내려놓을 줄 아는 용기였다.
책임과 부담에 짓눌릴 때마다 어머니의 지혜는 늘 내 두려움의 사슬을 깬다. 나를 완전히 살게 해준다. 나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 나침반이 되어 결정했다. 한국인 여성 최초의 세계 일주자가 되기 위한 도전은 내면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안정된 직장 생활에서 탈출했다.
지금은 10m 높이의 파도를 시속 40km로 탄다. 배를 뒤집을 만한 파랑을 6시간씩 견뎌낸다. 바다와 함께 춤추며 자연과 내 영혼이 연결되는 이 과정은 운전조차 해본 적 없는 내겐 상상도 못한 일이다. 항해 무경험자로 출발해 보조 조장을 맡았고, 이젠 신참 선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숨겨진 내 리더십을 지난 몇 달 동안 바다에서 발견했다. 인간에게 잠재된 보석은, 기회가 오면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칼바람이 뼈를 찌르고 더위가 한계를 시험하는 상황에서도 맑은 정신과 따뜻한 마음이 더 중요했다. 이 시련으로 나는 인내심과 회복력을 알게 되었다. 내면이든 외면이든, 폭풍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의 샘, 우리 모두 그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내 경험담이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봄기운이 되기를 바란다. 주변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를. 세계는 광활하고 보석을 발견할 기회는 넘친다. 열린 마음으로 도전을 환영하자. 진정한 자아를 찾고 생명이라는 선물을 더 크게 확장하자. 시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바다 위에서 클리퍼세계일주요트대회의 후반부에 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