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8일 저녁.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일대는 홀가분한 퇴근길에 오른 시민들로 북적였다.
노점 분식집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떡볶이나 닭꼬치로 ‘혼밥’ 하는 사람들, 친구·연인과 술잔을 기울이거나 게임방에서 환호하는 이들, 카페에서 스마트폰 동영상에 눈을 고정한 젊은이들…. 간혹 선물 꾸러미에 캐리어를 끌고 고향으로 향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지만, 명절 분위기를 느끼긴 어려웠다.
서울 관악구는 전국에서 1인 가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2170만가구 중 1인 가구는 750만가구로 34%를 넘었다. 관악구는 28만가구 중 62%인 17만5000가구가 1인 가구다.
특히 신림동은 그 비율이 86%에 이른다. 관악구 1인 가구주(家口主) 중 29세 이하는 38%, 30대는 26%로, 청년 밀집도 역시 최고다. 결혼도 출산도 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따로 또 같이 모여 사는 곳, 한국의 미래를 앞당겨 보여주는 곳이다.
◆설 대신 밸런타인데이 선물
신림역 일대 편의점과 마트에선 명절 음식 재료나 설 관련 용품은 보기 힘들었다. 매대엔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선물 세트만 진열돼 있었다. “설 선물 세트는 안 파느냐”고 묻자 편의점 점주는 “그런 건 찾는 손님이 없는데… 잠깐만요”라며 먼지 쌓인 샴푸·린스 세트를 창고에서 꺼내왔다.
상점엔 3kg짜리 쌀, 2~4개들이 두루마리 휴지, 미니 전기장판 같은 1인용 생필품이 많았다. 1인 가구는 집에서 밥을 잘 해 먹지 않고 수납 공간도 부족하다. 전통 시장인 신원시장에서도 한 사람이 두어 끼 먹을 정도로 앙증맞게 포장된 떡국떡과 손만두, 1인용 모듬전과 생선구이 한 토막 같은 소용량 조리 음식이 많이 팔려나갔다.
한 마트에선 점원이 표고버섯 5개들이 팩을 뜯어낸 뒤 썰어서 세 팩으로 나눠 재포장하고 있었다. “혼자 사는 분들은 신선식품 살 때 고민을 많이 한다”고 했다. 호리호리한 20대 청년이 양배추 반 통과 12개들이 계란을 집었다. 그는 “연휴에 넷플릭스 보며 라면 끓여 먹을 거라, 이 정도면 된다”고 말했다.
포장 할인 해주는 족발집에선 배달 기사들이 쉴 새 없이 음식 꾸러미를 집어 들고 오토바이에 올랐다. 이 동네 고깃집·감자탕집에선 통상 식당에서 보기 힘든 1인분 메뉴를 팔고, 술집마다 ‘혼술’이 대표 메뉴였다.
24시간 김밥집, 프랜차이즈 카페는 밤이 깊을수록 북적였다. 오락실엔 10~30대 남성들이 가득했다. 설 연휴 전 ‘알바천국’ 설문에선 “귀향하지 않고 혼자 지내겠다”는 성인이 55%였는데, 그런 이들이 다 여기에 모여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신림역의 회전초밥집에 들어선 한 60대 부부는 “이 근처에 혼자 사는 아들이 설에 집에 안 온다고 해서 우리가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
◆신림역은 ‘혼족’의 푸드코트
1980년 한국의 1인 가구 숫자는 8만가구(4.8%)였다. 혼자 산다는 건 돌봐줄 가족이 없거나 공동체에서 도태됐음을 뜻하는, 매우 이례적인 삶이었다. 지금은 1인 가구가 세 집 중 한 집꼴이다. 통계청은 2050년 1~2인 가구가 76%에 이를 것으로 예상한다. 부부와 자녀 둘로 이루어진 4인 가구는 6%대로 떨어질 전망이다. 사회학자인 에릭 클라이넨버그 미 뉴욕대 교수는 “1인 가구 증가는 21세기 베이비붐이라 할, 가장 중요한 인구 변동”이라고 했다.
관악구는 이런 인구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10년 53만명이던 관악구 인구가 저출산으로 2023년 48만명으로 감소하는 동안, 독립해 사는 사람이 늘어 가구 수는 24만에서 28만가구로 증가했다.
관악구가 ‘1인 가구의 성지’가 된 것은 거주비 등 생활 물가가 저렴하고 교통이 편하기 때문이다. 과거 서울대 주변 신림동 고시촌이 사법시험 폐지 여파로 쇠락한 뒤, 원룸 리모델링이 활발해지며 전국 20~40대 직장인이 몰려들었다. 신림역·서울대입구역·낙성대역 일대 오피스텔에 사는 젊은이들은 대개 강남이나 여의도로 출근한다. 옛 판자촌 동네나 다세대 주택은 중·장년층 독거인이 채우고 있다.
중간값을 반영한 관악구민의 월평균 소득은 237만원. 그중 2030 청년층 평균 소득이 280만원대로 가장 높고, 중·장년이 220만원대, 노년층은 100만원 미만이다. 신림동 부동산엔 보증금 300만~1000만원에 월세 40만~60만원대 원룸 매물이 대부분이었다. ‘화이트 올 수리’ ‘주방 분리형’ ‘월세 제때 내는 젊은 직장인 선호’ 같은 문구엔 별표가 붙었다.
신림동은 강남이나 홍대 앞 등 젊은이들이 소비를 위해 몰리는 곳과는 또 다른 ‘생활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신림역 출구마다 늘어선 노점 분식점은 혼자 온 손님들이 빠르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도록 특화된 푸드코트 같았다.
한 40대 여성은 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앞 분식집에 들러 “설에도 돈 벌어야지. 놀면 뭐해”라며 주인과 담소를 나눈 뒤, 찐만두 3개와 고로케 하나를 사서 마을버스 정류소에 줄을 섰다. 치킨을 포장해 퇴근하는 20대 여성, 다코야키 노점에서 저녁을 때우는 50대 남성 등이 끝없이 어깨를 부딪히며 오갔다.
◆외롭지만, 덜 외로울 방법도
누구나 혼자 살고, 따라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분위기. 이것이 신림동의 1인 가구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인프라처럼 보였다. 번화가에서 주택가까지 저렴한 미용실과 네일숍, 마사지숍, 빨래방, 편의점, 카페, 통증의학과가 빼곡했다. 어린이집이나 청소년이 다니는 학원 대신 각종 직업 기술 교습소, 여성 호신술 같은 성인 대상 학원, 스포츠센터가 많았다. 아이 데리고 다니는 가족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지난해 관악구청 1인 가구 실태 조사에 따르면, 삶 만족도 설문에서 ‘내 삶에 만족한다’가 47%, ‘보통’이 39%로 나타났다. 혼자 사는 게 익숙하다는 얘기다. 다만 나이 들수록 ‘만족 못 한다’는 답이 늘었다. 생활 고충으론 ‘경제적 어려움’이 1위, ‘외로움’이 2위, ‘위급 상황 시 우려’와 ‘주거 관리·수리의 어려움’이 뒤를 이었다.
“고민이나 어려움이 생길 때 도움 줄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엔 ‘스스로 해결한다’(34%)가 가장 많고, 다음이 친구(19%)였다. 부모(12%) 형제자매(8%) 자녀(6%) 등 멀리 사는 가족은 뒤로 밀렸다. 소득이 높고 젊을수록, 그리고 혼자 산 기간이 길수록, 혈연보단 친구나 동료를 가깝게 여겼다.
1인 가구에게 ‘살림’은 남녀노소 모두의 과업이다. 김진연 관악구 1인 가구 지원팀장은 “각종 지원 사업 중 호응이 높은 게 요리 교실과 밀키트 배송이었다. 배달 음식이나 대충 때우는 끼니 탓에 건강 이상이 생기는 것”이라며 “기본 살림에 익숙지 않으면 삶의 질이 확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관악구는 여성 1인 가구 중심으로 보급하던 주거 안심장비 세트를 올해부터 남녀 모두에게 공급하고, 심리 상담·치료와 고독사 예방 사업도 확대하기로 했다.
여러 통계에 따르면, 신림동 1인 가구들은 혼자만의 삶을 즐기는 성향이 강하면서도, 주변 이웃과 교류하고 서로 도우려는 욕구도 높게 나타난다. 월 1인당 배달 서비스 앱 접속 건수, 유튜브 등 동영상 서비스 이용자 비율은 신림동이 전국 1위다. 동시에 중고 거래 앱 당근마켓의 ‘무료 나눔’ 건수나, 포털 사이트 ‘맛집 추천’이 제일 많은 곳도 신림동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는 “개인의 자유가 커지고 생활 편의가 확대되자 대가족이 해체되고 1인 가구가 대세가 됐다”며 “잠시든 오랫동안이든, 혼자 사는 삶은 보편적 미래가 될 것”이라고 했다. 홀로 사는 편안함도, 외로움도, 각자의 몫이 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