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을 모티프로 한 식당에 간 적이 있다. 이 영화를 특별히 좋아해서는 아니다. 어떤 면이 그렇게 좋다는 건지 이해하고 싶어서 여러 번 보긴 했으나 여전히 찾지 못했다. 절대 고독을 토로하며 유통기한이 임박한 파인애플 통조림을 꾸역꾸역 먹는 금성무나 좋아하는 남자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해 마음대로 청소를 하는 왕비 같은 인물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젖어들지 못하겠다.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저런 인물에 공감하는 건지 예전부터 궁금했다.
굳이 이 영화의 매력을 꼽자면 인물이나 이야기보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홍콩의 밤과 낮? 경찰로 나오는 양조위가 야식을 먹던 간이식당의 풍경? 어디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이런 분위기 같은데… 내가 쓴 걸 다시 읽어 보니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져 당황스럽다. 분위기가 있는 영화나 작품이나 사람은 흔치 않으니까.
그리고 이 영화는 맥주를 부른다. 이상한 일이다. 맥주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맥주를 대체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게 있다. 그 순간에 대해 이 영화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 ‘중경삼림’은 맥주가 마시고 싶어지는 영화다. 레몬을 뿌린 한치 튀김이나 냉두부 같은 화사한 안주가 아닌 감자튀김이나 나초에 케첩을 듬뿍 찍어 맥주를 먹고 싶어진다. 그래서 ‘중경삼림 식당’으로 가면서 필히 맥주를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Chungking Express’다. ‘청킹 특급이 뭐지?’라며 의아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의미를 안다. ‘중경삼림’의 무대가 되는 곳인 ‘청킹맨션’과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Midnight Express)’를 조합해 ‘청킹 익스프레스’가 되었다는 것을. 양조위가 야식을 먹는 간이식당 이름이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다. 그리고 청킹이란 무엇인가? 청킹은 충칭, 중경이라고도 하는 쓰촨 옆의 도시다. 충칭이 산속에 형성된 도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삼림’도 마저 이해가 되었다.
식당은 내가 잘 가지 않는 동네의 공동화된 도심에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간이식당이나 청킹맨션 같은 혼잡한 분위기를 내기 위한 위치 선정인 걸까도 싶다. 식당의 출입구에는 한자와 영어만 적혀 있었고, 계단을 올라갔더니 ‘飯店’과 ‘營業中’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홍콩풍이었다. 홍콩에도 중국에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나는 무슨 이유에선가 식당을 장식한 폰트와 현란한 네온의 색깔을 보면서 홍콩풍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청요릿집’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른의 세계를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중국집’, ‘중식당’, ‘중국 식당’이라고 차이를 두어 부르는 것도 재밌고, 광둥식, 쓰촨식, 상해식, 북경식으로, 또 대만식 중식, 싱가포르식 중식, 일본식 중식으로 나뉘는 것도 흥미로웠고. 가장 궁금한 중식은 예전부터 예향으로 이름높은 항주와 소주의 음식인데,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란 말 때문일 것이다.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소주(蘇州)와 항주(杭州)가 있다는 이런 말은 잊히지 않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식당에 간 것은 중식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디까지 연결될지 모르는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처럼 어디까지를 포괄하는지 모르겠는 게 중식의 매력이기에. 마작 패로 된 탁자에 앉아 같이 간 사람에게 ‘중경삼림’을 언제 누구와 봤는지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나는 누구와 어디에서 영화를 봤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걸 잘 기억하고, 기억하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기에. 그도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인지 극장에서 보긴 했지만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처럼 이 영화에 별다른 감흥이 없어서일 수도 있다.
식당은 영화를 참조해 한 층은 ‘홍콩의 낮’, 다른 층은 ‘홍콩의 밤’을 테마로 꾸몄다고 했다. 마작 패가 창턱에도 놓여 있었는데 마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지 아니면 별다른 의미 없이 놓아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건 메뉴판 정도였다. ‘청킹’과 ‘침사추이’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딴 메뉴도 있었고, 극중 경찰로 나오는 양조위의 번호인 ‘663′과 금성무의 번호인 ‘223′이 들어가는 음식이 있었다. 하지만 뭔가가 없었다. 뭐지? 대체 그게 뭔지 메뉴판을 한참 보다가 생각이 났다.
솔 맥주. Sol이라고 쓴다. 해가 그려져 있는 이 브라질 맥주를 ‘중경삼림’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스티커를 붙인 듯한 팝아트스러운 디자인의 맥주병을 보면서 어디선가 팔면 마셔야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이다. 영화가 나온 게 1995년이라 맥주 회사가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아직 맥주는 생산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의 감성을 재현하기 위해 카세트 플레이어와 파인애플 통조림을 인테리어 소품으로 배치한 정성처럼 솔 맥주도 있었다면 좋았겠다 싶었다. 솔 맥주가 아니라면 양조위 집에 있던 하이네켄이나 네온사인으로 등장하는 산미구엘이라도.
요즘 신경 쓴 식당에 가면 그 집 이름을 붙인 맥주가 있는 경우가 있다. 풍산가든에는 풍산 맥주, 호랑이 식당에는 호랑이 에일이 있는 식이다. 이런 주문자 생산방식의 OEM맥주를 부르는 다른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편의상 여기서 나는 시그니처 맥주라고 부르겠다. 내가 마셔본 시그니처 중에 인상적인 것은 두 가지 정도다. 어느 미국식 중식당에서 파는 후추 맥주와 어느 딤섬 식당에서 파는 홍차 맥주. 그곳의 음식과 먹기에 그 맥주가 딱이어서 그랬다. 아니, 맥주가 그 식당으로 이끌었다. 시그니처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는 그저 그렇다. 이름만 다르지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 경우가 많다.
그 집에는 몇 가지 중국 맥주와 그 집의 이름을 활용한 맥주가 있었다. 우리는 머뭇거리다 아무것도 마시지 않기로 했다. 뭔가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맥주를 마셔야 할 필연성이 없었달까. 무언가의 시그니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하고 난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비나의 시그니처가 된 검정 모자의 경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