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완도군 용암리 김유솔(왼쪽에서 여섯째) 이장이 평균 연령이 70대 이상인 주민들과 마을의 자랑인 비석거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에서 가장 먼 섬 중 하나인 전남 완도. 조용한 이곳이 요즘 힙해지는 중이다. 코에 큐빅 피어싱을 한 MZ 이장이 등장하고부터다. 김유솔(27) 이장은 2022년 1월 당시 ‘대한민국 최연소 여자 이장’이란 완장을 꿰찼다.

“학창 시절 서기 한번 해본 게 다였는데요. 이장이라니 대단한 감투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저 재밌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덜컥 하겠다고 했죠.”

친구들은 ‘자다가 봉창 두드리냐’고 했고 엄마는 ‘내 딸이지만 진짜 별나다 별나’라며 황당해했다. 김유솔은 올해로 이장 3년 차.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8일 완도군 용암리 경로당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서울말을 쓰던 그는 “우리 이장님이 잘항게 글치” “결혼은 뭐더러 혀” 등의 말로 추임새를 넣는 어르신들에겐 “글제, 글제” 하며 구수한 사투리로 되받는, 손녀 같은 이장이었다. “제가 유명해지니까 주변에서 나중에 군수도 하고 도의원도 하라고 하는데요. 저는 평생 이장만 하고 싶어요. 어르신들이 시켜주시는 그날까지요.”

그는 “20대 이장이 신기한 게 아니라 20대 이장을 받아준 마을 어르신들이 신기하다”며 “40년이고 50년이고 어른들의 마음을 잇는 이장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젊은 이장이 있어 너무 든든하고 좋다”고 했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죽어도 서울서 죽으려 했다

김유솔은 나고 자란 고향 완도를 무지하게 미워했다. 짠 내 나는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고3이던 2014년 일찍 취업해 상경했다. 명절 때도 고향에 가지 않았다. 완도를 지우고 ‘서울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전공인 그래픽 디자인 기술로 여기저기서 경험을 쌓았고 꽤 괜찮은 회사에서도 일했다. 그러나 빡빡한 서울살이를 5년 만에 때려치웠다. “제 정체성은 완도였어요. 어느 날 무심코 보러 간 완도의 바다는 저를 있는 그대로 다시 반겨주더라고요.”

-열일곱에 서울로 올라갔죠?

“평소에도 ‘완도 싫다’ ‘도시로 전학 보내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고3 때 혼자 모든 걸 계획하고 ‘나 다음 달에 서울 간다’고 부모님께 통보했죠. ‘네 인생은 네가 결정하는 거다’라며 바로 허락하셨고요. 상경하는 날 엄마에게 ‘나는 죽어도 서울에서 죽을 것이니 절대 여기로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어요.”

-서울 생활은 어땠나요?

“1년은 너무 좋았어요. 신났죠. 처음 살았던 월세 40만원짜리 고시원이 홍대 근처에 있었는데 신세계였어요. 밖에 나가면 카레도 팔고 다코야키도 팔았어요. 완도엔 없는 것들을요.”

-완도로 돌아오게 된 계기라면.

“서울에 5년을 살았는데도 1주일에 한 번은 완도 얘기를 꼭 해요. 사람들이 물으니까요. 명절 때가 되면 ‘너 집에 언제 가?’ 묻는 거예요. ‘내 집은 서울인데 왜 저렇게 묻나’ 생각했죠. 어느 순간, 완도가 제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요?

“어느 날 몇 백 명이 들어찬 지하철에서 답답함을 느꼈어요. 전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고 그 길로 유명해질 수 있다고 믿고 살았죠. 그런데 막상 취업 시장에 나서 보니 대학 나온 친구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거예요. 그 한 줄 차이로 세상은 절 다르게 봤죠. 꿈은 사라지고 월급 좀 더 주는 회사로 이직하는 게 당장의 목표가 돼버렸어요. 이게 뭐지 싶었죠.”

-그래서 다시 완도였나요?

“문득 완도에 놀러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어요. 누가 물으면 ‘완도에 볼 게 뭐 있다고 여행을 가냐’고 핀잔을 줬는데 ‘진짜 나도 한번 놀러 가볼까’ 한 거죠. 학교에서 소풍 가던 몽돌해변에 섰는데 너무 예쁜 바다가 펼쳐져 있는 거예요. 인생의 실마리가 풀린 느낌이었어요. 난 왜 이렇게 완도를 미워했을까. 완도와 화해하고 싶었어요.”

용암리는 완도항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마을이다.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스물넷 이장은 특별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오는 날의 풍경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여백이 생기는 느낌이었어요. 가슴이 뛰었지요. 설렜습니다.” 완도에 와서는 바로 사진관을 열었다. 장사도 꽤 잘됐다. 그러다 이장 제안을 받게 됐다. 첫해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혼도 많이 났지만 지금은 베테랑 소리를 들을 정도로 능숙하다.

-사진관을 열었다면서요.

“다시 완도로 올 기회를 보고 있는데 한 친구가 ‘완도엔 증명사진 찍을 데도 없다’고 투덜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찍어줬죠. 광고, 잡지 회사 등에서 촬영해 온 경험에다가 포토샵이 전공이니까요. 친구가 사진을 보더니 지나가는 말로 ‘너 내려와서 사진관이나 해라’ 했는데, 그 한마디에 그날 잠을 못 잤어요.”

-그렇게 귀향을 결정했군요.

“주변에서 난리였어요. ‘죽어도 서울서 죽었어야지’ ‘여긴 전망이 없다’ ‘넌 뉴스도 안 보냐. 도대체 왜 왔냐’고요. 그냥 웃고 말았죠.”

-이장은 어떻게 됐나요?

“2021년 말에 제안을 받았어요. 군의 도시재생센터에서 활동할 때였어요. 함께 교육받던 분이 용암리 이장이었는데 커피 한잔하자고 해서 나갔더니 ‘이장 해볼래?’ 하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마을을 좀 젊게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것 같아요. 제 입장에서 너무 뜬금없었죠. 그런데 곧바로 하겠다고 했어요.”

-왜요?

“스물네 살 이장?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특별하잖아요. 고민도 안 하고 하겠다고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장이 뭘 하는지도 몰랐어요.”

-주민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당선됐다고요?

“저 말고도 후보가 한 명 더 있었거든요. 70대 매우 똑똑한 어르신이요. 그런데 그분이 ‘젊은 사람이 하겄다는데’ 하고 그냥 앉아버리시는 거예요. 처음 보는 20대 여자애를 뭘 믿고 이장을 시키겠어요. 그때 제가 ‘저희 할아버지가 여기 사셨다. 황 맹 자 석 자시다’라고 운을 뗐죠. 그 덕분에 만장일치로 됐어요. 눈앞에서 거수로(웃음).”

-신기하네요.

“20대 이장이 신기한 게 아니라 저는 20대 이장을 만들어주신 어르신들이 신기해요.”

전남 완도 용암리 김유솔 이장. /유튜브 '씨리얼'

◇숨 쉬는 모든 순간에 칭찬받아

김유솔은 이장이 되고 용암리로 이사했다. 마을 주민이 빈집을 무상 임대해줬다. 이후 마을 주민의 평균 연령은 확 낮아졌다. 75세에서 68세로. 용암리는 128세대가 등록돼 있지만, 50명 정도가 산다. 이장 월급은 30만원, 올해부터 10만원 올랐다. “하루 일과는 문을 열고 나가면서 어르신들과의 대화로 시작해요. 저만 마주치면 뭐라도 먹이고 싶어하는 어르신들 덕분에(?) 15kg이 쪘어요. 다이어트한다고 하면 홀쭉해졌다고, 얼굴 안 좋다고 절대 안 된다 하시죠.”

-이장 일은 할 만하던가요?

“솔직히 얕봤어요. 그런데 만만한 일이 아니더라고요. 다른 마을 이장님들이 ‘눈을 반만 뜨고 다니라’고 해요. 다 뜨면 모든 게 일이니까요. 처음엔 뭐가 뭔지 몰라서 혼도 많이 났어요.

-무슨 일을 하나요?

“가장 중요한 건 어르신들이 받을 혜택을 챙겨드리는 거예요. 군, 읍 단위에서 복지 혜택을 주는데 기간을 놓치면 못 받잖아요. 목욕비, 보건소 혜택 같은. 마을 사업보다 그런 편의를 봐드리는 게 더 중요해요.”

-1년마다 연임 여부를 결정하잖아요.

“제가 마을 개발과 관련된 일을 누락해서 큰일이 났었어요. ‘어린애 시켜서 그렇다. 그만하라고 해라’ 같은 얘기도 들렸죠. 심적으로 힘들었어요. 그만하라면 그만하려고 했죠.”

-그런데요?

“어르신들이 다 같이 ‘처음부터 어떻게 잘하냐’ ‘한 번 더 믿어주자’고 했죠. 원래 욕먹으면서 크는 거라고. 집에서 펑펑 울었어요.”

-기억나는 최고의 칭찬이라면.

“작년 말 또 연임 여부를 결정해야 할 때요. 제가 ‘이장 할까요, 말까요?’ 했는데 어르신들이 한목소리로 ‘잘항게 다시 해’ 하는데 감격이었죠. 40년이고 50년이고 시켜주심 계속할거예요. 제 발로 내려오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좋나요?

“저는 매일 숨만 쉬어도 칭찬을 들어요. 경로당에 들어서면 ‘아따 우리 이장님 오셨다잉’ 하시고, 길에서 마주치면 ‘TV보다 실물이 더 나은디’ 하시고요. 하루종일 웃을 일밖에 없어요.”

◇완도가 멋쟁이 섬이 되길

얼마 전 마을 주민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 한동안 얼굴이 보이질 않아서 걱정했는데, 홀로 죽음을 맞았다. 가족이 없어 장례도 마을에서 치렀다. “제가 찍어둔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썼어요. 평소 절 챙겨주신 할아버지였는데 후회가 많이 남았죠. 병원에 모시고 갈 걸, 한 번이라도 더 문을 두드릴걸....”

-이장으로서 꿈은요?

“이렇게 한없이 사랑을 주는 어르신들의 뒤를 이을 세대를 만들고 싶어요. 계산하지 않고 사람을 믿어주는 그 마음 그대로 다음 세대가 물려받았으면 해요. 제가 우선 잇고 싶고요. 오래된 빈집이 많은데, 정리할 건 하고 손질할 수 있는 공간은 누군가 살게 하려고요.”

-또 있나요?

“완도를 멋쟁이들의 섬으로 만들고 싶어요.”

-어떻게요?

“한번쯤 살 만한 곳이란 걸 알리고 싶어요. 지금은 작은 비영리 법인(완망진창)을 만들어 젊은이들의 한 달 살기를 통한 정착을 추진하고 있어요. 완도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도와주는 거죠. 실제로 정착한 MZ도 있고요.”

-MZ가 시골 살이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기서도 먹고살 만하다는 확신만 있다면 시골로 오는 거죠. 저처럼 바다가 예뻐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요. 저를 보고 ‘멋지게 산다’고 귀향한 친구도 있어요.”

-다시 도시로 갈 생각은요?

“절대 어디 안 가요. 저는 여기가 시작이에요. 제 꿈을 펼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입니다. 꽉꽉 들어찬 곳에서 남들과 비교되는 저를 보는 것보다 여기서 제가 더 잘 보이더라고요.”

인터뷰를 지켜보던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나이 먹은 이장들은 우리가 부탁을 못 해. 시켜도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면서 우리 일을 봐주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젊은 사람이 하니까 얼마나 좋아. 뭐 물어보면 즉각즉각 알아봐 주고. 자식보다 자주 봐.” 김유솔도 말을 보탰다. “이보다 즐겁고 재밌을 수 있을까요? 누구는 피곤하지 않냐고 하는데요. 저는 매일 제 집 문을 두드려주는 어르신들이 고맙습니다. 어릴 적 ‘친구야, 놀자!’ 소리를 듣는 기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