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김영석

“손흥민은 (이강인을) 용서해도 우리 국민은 절대 용서 못 한다!”

지난 21일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에서 이른바 ‘탁구 게이트’가 터진 후 처음으로 이강인이 손흥민을 직접 만나 사과한 소식이 알려졌다. 핵심 당사자들이 화해했다지만 이강인을 향한 여론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우리 흥(손흥민)’이 용서해주니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반응도 있었지만, 다수는 “축구계에서 퇴출해야 한다” “병역 면제를 박탈하고 입대시켜라” “국대에서 영원히 뽑지 말아야 한다”는 가시 돋친 말을 쏟아냈다.

대표팀 주장 손흥민과 차세대 핵심으로 꼽힌 ‘슛돌이’ 이강인이 아시안컵 도중 충돌한 ‘탁구 게이트’는 한국 사회의 담론장에 그야말로 불을 질렀다. 한 직장인은 “단톡방은 물론이고 직장 회식, 친구와 술자리에서도 이강인과 손흥민 얘기만 해서 귀에 피가 날 거 같다”고 말했다. 평론가들조차 “축구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아시안컵에 대한 실망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국민을 이토록 분노하게 한 것일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이강인과 손흥민 /뉴스1

①”어딜 감히...” 당돌한 MZ라기엔 너무 나간 슛돌이

탁구 게이트가 터지기 전만 해도, 이강인은 귀엽고 당찬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 그 자체였다. 우리가 키운 슛돌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사건 속 이강인의 모습은 ‘당돌한 MZ’라고 포장하기엔 너무 나갔다. 감히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팀 주장인 손흥민의 팀 미팅 소집을 거부해? 그렇다고 명상을 하거나 차분히 경기를 준비한 것도 아니라 후다닥 저녁을 먹고 두 시간 넘게 탁구를 쳤다고? 주장의 말에 대들고 주먹까지 내질렀다(이강인은 부인했다)고? 그러다 주장 손가락이 부러졌는데 다음 날 동료들과 태연히 물병 던지기를 하며 깔깔댔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팬들은 외쳤다. “이강인을 축구계에서 영구 퇴출하라!”

평론가 A씨는 “단합과 위계 질서, 인화를 중시하는 기성세대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강인의 행동을 조직의 근간, 한국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 신호로 본 것”이라고 했다. 퇴출, 배제, 강제 입대(?) 같은 과격한 말이 나오는 이유다. A씨는 “전통적 조직 문화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최근 개인주의와 합리, 효율을 내세우는 MZ세대와 충돌하면서 분노와 혼란스러움을 겪고 있는데, ‘탁구 게이트’는 이들이 조직생활에서 겪는 분노와 혼돈의 경험과 거의 맞아떨어진다”며 “이렇게 예민한 부분을 이강인이 제대로 건드렸으니 더 괘씸하게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평론가 B씨는 “능력 못지않게 태도가 중요한데 이강인의 태도는 국민이 대표팀에 기대하는 상징성, 애국심과도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아시안컵에 진중하게 임한 고참 선수들과 달리, 이강인을 비롯한 젊은 선수들에게는 그런 간절함과 진지함이 보이지 않은 것도 국민을 분노케 했다는 것. 한 30대 직장인은 “예전에 대표팀에서 부진한 선수는 ‘국민께 죄송하다, 다음 경기에서 분발하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일부 젊은 선수들이 ‘팬들이 비난해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한국 축구를 휩쓸고 있는 대표팀 '내분' 논란의 주인공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이 지난 14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언제나 저희 대표팀을 응원해주시는 축구 팬들께 큰 실망을 끼쳐드렸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연합뉴스

②화만 더 돋운 ‘스토리 사과’

국민적 분노가 들불처럼 번진 데는 이강인의 사과 방식도 한몫했다. 지난 14일 불화가 알려지자 이강인은 인스타그램에 ‘제가 앞장서서 형들의 말을 잘 따랐어야 했는데, 축구 팬들에게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리게 돼 죄송스러울 뿐’이라는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여기엔 축구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했을 뿐, 정작 손흥민과 대표팀 동료들에 대한 사과 표명은 없었다.

더 황당했던 건 이 사과문을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아닌 ‘스토리’로 올렸다는 것. 스토리에 올린 사진은 하루가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된다. 축구 팬들 사이에선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사과한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결국 이강인은 직접 런던으로 손흥민을 찾아가 정식으로 사과하고, 인스타에 다시 ‘게시물’ 형태의 반성문을 올렸다. ‘진작에 이렇게 할 것이지’라는 탄식이 나왔다.

지난 21일 이강인이 런던으로 손흥민을 찾아가 사과한 후 찍은 사진. /손흥민 인스타그램

③옛 주장에게 대든 손흥민의 ‘소집령’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이강인을 과도하게 비난해선 안 된다”는 소수파도 만만치 않았다. 이강인을 향한 기성세대의 꾸지람에 이들은 조목조목 반박한다. “탁구? 감독이 ‘저녁 먹고 자유롭게 시간 보내라’ 했는데 뭐가 문제?” “경기 전날 탁구를 하든 명상을 하든 컨디션 조절은 본인이 알아서 하고 경기력으로 입증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경기 전날 팀 미팅을 소집한 ‘주장’ 손흥민의 행보에 대해 소수파는 의문을 제기한다. “님들은 점심시간에 밥 먹고 쉬려는데, 상사가 갑자기 ‘점심시간에 회의 좀 하자’고 하면 욕 나오지 않나요?” 다음 날 경기가 걱정됐다면 주장 임의로 회의를 할 게 아니라 감독에게 ‘공식적인’ 팀 미팅을 요청하는 게 맞는 절차였다는 것.

“아무리 그래도 선배이자 팀 주장에게 그렇게 대드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 쏟아지지만, 이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손흥민도 자기 팀 주장한테 대들고 싸웠는데, 그건 왜 가만히 두나요? 동료끼리 스스로 부당하다고 느끼면 말할 수 있지 않나요?” 실제로 손흥민은 소속팀 토트넘 홋스퍼에서 2019-2020시즌 한 경기에서 팀 주장이던 골키퍼 요리스와 충돌한 바 있다. 요리스가 손흥민에게 ‘왜 적극적으로 수비 가담을 하지 않느냐’며 목소리를 높이자 손흥민도 맞서며 몸싸움 직전까지 갔다.

이런 여론을 의식한 듯 손흥민도 이강인과 화해 소식을 전하면서 “저도 제 행동에 대해 잘했다 생각하지 않고 질타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노정태 평론가는 “감독의 지시와 다르게 임의로 선수들을 소집한 건 감독에게 항명, 저항한 것”이라며 “손흥민의 행보가 무조건 영웅시되는 여론에 대해서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축구 대표팀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웃음을 잃지 않았지만, 그를 지켜보는 팬들은 웃을 수 없었다. 사진은 작년 3월 콜롬비아전 당시 벤치를 지키는 모습. /대한축구협회

④‘무능한 상사’ 클린스만 前 감독

이렇게 이강인과 손흥민을 두고 싸우다가도 클린스만이라는 거악(巨惡) 앞에선 모두가 단박에 ‘대통합’을 이룬다. “대표팀 선수도 사람인데, 조율하는 건 결국 감독이 해야 할 일 아냐?” 탁구 게이트의 핵심적 원흉은 리더십 없는 무능한 감독이었다는 게 양쪽의 공통된 결론이다.

직장인 커뮤니티에선 클린스만을 자신의 상사에 비유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일은 아랫사람에게 다 떠넘기고, 자신은 정치질과 친목질에 몰두하며, 공(功)은 내 것이고 과(過)는 아랫사람 탓으로 돌린다. 클린스만 감독이 해임 직전에 축구협회가 주관한 회의에서 ‘손흥민과 이강인의 갈등으로 경기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것이 알려지자, 국민의 분노는 또다시 머리끝까지 올라갔다. 축구 팬 사이에선 “애초에 ‘탁구 게이트’가 영국 황색언론에 흘러들어간 것도 클린스만 감독이 자신의 실패를 면피하기 위해 공작한 거 아니냐”는 의심이 어느덧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다.

무능한 상사의 가장 큰 죄악은 ‘스스로 유능하다고 믿는 것’. 뻔뻔하게 월드컵 예선을 계속 치르겠다고 장담하다 결국 임기를 1년도 못 넘기고 경질됐다. 그는 떠났지만 국민은 여전히 화를 낸다. 대형 사고를 쳐놓고 위약금으로만 100억원을 챙겨간다니. “도대체 이런 무능한 감독을 데려온 게 누구야? 당장 나와!”

지난 16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대한축구협회(KFA) 임원회의가 열렸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사죄하는 정몽규 회장./스포츠 조선

⑤리더십 실패의 전형, 축구협회

사달이 난 와중에 최종 책임자인 정몽규 축구협회장은 클린스만 감독이 경질되고서야 공개 석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클린스만 감독 선임부터 위약금, 본인 사퇴 여부, 선수 간 갈등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의사 표명 없이 두루뭉술한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축구 팬들 사이에선 “꼬리 자르기, 책임 회피만 급급한 무능한 회사를 보는 것 같다”는 분노가 타오른다. 평론가들은 “리더십 부재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꼬집었다. 김헌식 평론가는 “탁구 게이트를 책임지고 수습·정리해야 하는 주체는 협회인데, 아무도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며 “리더가 책임은 지지 않고 암암리에 결정하며 결실은 독차지하려는 악습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리더십 부재가 낯뜨겁게 드러난 장면”이라고 했다.

이 사태 자체가 다분히 한국적인 현상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노정태 평론가는 “2002년 월드컵 당시 히딩크라는 외국 명장이 탈권위적, 수평적 질서와 소통 리더십을 구축해줬는데, 이번 탁구 게이트는 이런 시스템이 발전하지 못하고 도리어 도태됐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한국 사회 전반의 리더십이 표류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 국민이 더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말도 한국다웠다. 대인배 ‘흥민이 형’이 부족하지만 장래가 밝은 동생 ‘슛돌이’를 크게 품어줬다. 한 네티즌이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국민들 싸움 붙여놓고 자기들은 금세 화해했네.” 또 다른 네티즌이 말한다. “이천수도 품은 대한민국인데, 이강인도 크게 품어줍시다.” 클린스만·축구협회 열심히 비판하던 이천수, 의문의 1패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