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시인 김종길의 ‘설날 아침에’를 습관적으로 펼친다.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대학 시절에 수업을 들은 터라 더 깊은 느낌도 있지만,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희망으로 떠올리는 신선함에 감탄하며 한 해를 구상한다. 올해 나의 신년사도 이 시의 마지막 연 인용으로 시작하였다.

코끝에 와 닿는 바람은 아직 차갑지만, 봄기운이 올라오고 있다. 헤세의 시 ‘봄이 하는 말’을 옮겨 적어 본다. “아이들은 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자신을 내어주어라. 그리고 삶을 두려워하지 마라.” 여기서 봄은 생명이고 희망이고 기쁨이고 결기다. 그리고 이 모든 섭리를 아이들은 안다고 한다.

박길성 푸른나무재단 이사장은 "푸른코끼리는 사이버 폭력 예방 교육의 상징"이라고 했다. /박길성 제공

이 희망 편지에서는 아이들 이야기를 해야겠다. 요즘 우리가 접하는 사회의 모습은 아이들에게 가혹한 것이 너무 많다. 새 학기는 봄과 함께 시작하는 설렘이어야 하지만, 언제부턴가 불안과 걱정이 새 학기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경험의 설렘을 가리고 있다. ‘신학기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이도 교사도 학부모도 긴장한다. 오죽하면 아이들 사이에서 신학기 기원 부적이 나돌까.

학교폭력예방법을 제정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각종 대책과 제도가 쏟아졌건만 학교와 교실이 과연 안전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날마다 절박한 상담 전화가 이름과 학교도 밝히지 못한 채 걸려온다. 긴급 상황의 SOS 출동도 잦아지고 있다. 사이버 폭력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복합 피해를 유발하고 하루가 다르게 교묘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사이버 정글’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지난달 초 미국 의회 청문회는 구독자를 약 20억명 보유한 메타의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에게 “당신의 제품(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어린이는 당신의 우선순위가 아니다”라고 질타하였다. 결국 그는 피해 가족들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이렇다 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우리가 기술적으로는 신(神)이나, 도덕적으로는 악마가 되었는가”라고 개탄한 미국 철학자이자 문명 비평가인 루이스 멈퍼드의 언명을 되새겨본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신이 되기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함께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서로 돕는 능력을 갖추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자연의 이치와 인류 진화의 최대 보고인 교육을 결합해서 말이다. 코끼리를 떠올린다. 코끼리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서로를 보살핀다. 아프거나 허약한 동료가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심지어 생을 다한 동료조차 함부로 내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성체 코끼리는 어린 코끼리의 서투른 홀로서기를 뒤에서 묵묵히 응원한다.

여러 지혜를 모아 코끼리의 습성과 평온, 안정, 포용을 상징하는 푸른색을 결합하여 ‘푸른코끼리’를 탄생시켰다. 푸른코끼리는 한국의 문화·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초등학교로 찾아가는 체험형 사이버 폭력 예방 교육이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라고 강조한다. 서로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고 알려준다. 때로는 불편함을 마주할 용기를 북돋운다. 따로 또 같이 다양성의 규범을 가르치며 현대사회에서 갈수록 소홀해지는 사회성을 배양한다. 일선 학교에선 대환영이다. 지난해 신청 경쟁률은 무려 12대1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푸른코끼리를 품으며 사랑하고 기뻐하고 두려움 없이 자라나기를 희망한다. 새봄에 아이들 책가방에 푸른코끼리 캐릭터 인형을 하나씩 고리로 달아 주고 싶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상상하며 봄이 하는 말을 잊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