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둘러 핀 꽃은 서둘러 사라진다. 봄에 핀 꽃은 봄이 가면 시들고, 여름꽃이 지면 가을꽃이 핀다. 인생 사계절에 빗댄다면 나는 봄여름 다 지내면서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마흔다섯 살에 노래를 하기 전까지는 좌절하고 방황하며 나의 꽃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열댓 번 직업을 바꾸면서도 내 안의 작은 씨앗 하나는 버리지 않았다. 노래를 부르며 살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막을 수 없는 꿈이었다. 마치 모래알을 삼켜 끝내 진주를 품는 조개처럼, 쓰리고 아파도 목울대 아래 돌멩이 하나 삼킨 채 인생의 봄날인 청춘을 다 흘려보냈다. 그러나 꿈이 있었기에 시간을 쪼개서 노래를 배웠고, 어려서부터 좋아한 우리 전통 소리인 피리와 대금, 태평소 등도 배웠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내 몸에서 소리를 꺼낼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25년을 보낸 후 1994년에 홍대 앞 100석짜리 소극장에서 첫 무대를 가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96년에 40대 중반을 넘어 3000석 규모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단독 공연을 열었다.
돌아보면 나는 항상 늦되었다. 남들은 은퇴를 생각할 나이에 데뷔했거니와 노래가 아닌 분야에서도 늘 늦게 출발했다. 마라톤도 환갑을 앞두고 내 몸에 무엇을 선물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완주를 결심해 시작한 것이다. 3년 전부터 연습해서 환갑이 되는 해에 처음 출전, 4시간 12분대를 기록했다. 오랫동안 집에서 독학해 오던 한글 서예전을 연 것도 칠십이 되던 해였다. 너무 늦는다 해도 살아 있는 동안에 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니 ‘아무튼 시작하는 용기’를 내며 산다.
요즘 방송국마다 앞다투어 내보내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노래 잘하는 젊은이가 참으로 많다. 또한 10대에 데뷔하여 인기를 끄는 아이돌의 춤과 노래는 참 상큼하고 사랑스럽다. 마치 봄의 새순같이 어여쁘다. 봄꽃 같은 그들이 인생의 쓴맛까지 다 알아버린 삶과 죽음을 노래한다면 그 또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봄에는 봄꽃이, 가을에는 가을꽃이 어울리는 것이리라.
‘꽃구경’ ‘국밥집에서’ ‘서풍부’ 등 나의 노래는 대부분 인생(人生)의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슬프고 힘들 때는 즐겁고 흥겨운 노래보다 무겁고 슬픈 노래가 오히려 위로를 준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명랑한 웃음보다 따뜻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삶의 마지막을 꽃구경으로 은유한 나의 노래는 고려장을 당하는 슬픔보다 고려장 시키러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아들이 자기를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길을 잃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노래한다. 자기의 죽음 앞에서도 자식을 더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불러온 흐느낌이다. ‘국밥집에서’라는 노래에서는 “끝내 흙으로 돌아가는 길을 아는” 저 노인이 이 풍진 세상을 다 살고 난 끝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가를 부른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웃는 얼굴이 보기 좋다고 말한다. 주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신나서 웃는 얼굴이 어느새 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웃기 시작한 것은 노래를 부르게 된 이후다. 그 전 내 사진을 보면 웃는 얼굴이 별반 없다. 사실 웃을 일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웃기 시작하니 점점 웃을 일이 더 생긴다. 웃음이 웃음을 부르는 것일까. 이젠 웃지 않는 내 얼굴은 내가 봐도 낯설다.
젊었을 때는 마음껏 소리를 내지르고 뿜어내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70대 중반을 넘어서며 힘자랑 대신에 깊은 울림으로 다가가는 노래를 부르려 한다. 늦가을 된서리에도 향기를 뿜어내는 가을꽃처럼, 쓸쓸하고 찬란한 가을빛처럼 그렇게 위로를 주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
꿈을 꾼다. 10년, 20년 후 꽃이 피는 봄날에 주름지고 허리 굽은 노인 하나가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