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회사원 A씨는 이달 초 아내와 함께 두 살배기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을 방문했다가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아들과 즐겁게 놀아주고 있었는데, 같은 반 다른 아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다가와 A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고. A씨가 밝은 목소리로 “안녕, 아저씨는 ○○네 아빠야”라고 인사하자 갑자기 아내가 A씨의 옷소매를 훅 잡아당기며 귓속말을 했다. “자기야, 아저씨라는 말 쓰지 마. ○○네 삼촌이라고 해.”
‘음? 내가 왜 이 아이 삼촌이지?’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다른 집 엄마·아빠도 있는 자리에서 아내와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았단다. 말을 꾹 삼킨 A씨는 잠자코 주변을 살폈다. 다른 부모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자신을 ‘□□네 삼촌’이나 ‘☆☆네 이모’라고 소개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러다 ‘삼촌’이 40명 넘겠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A씨는 아내에게 꾹 참던 물음을 던졌다. “내가 왜 ○○ 친구들 삼촌이야? ○○ 친구들 이름도 모르고 걔네 엄마, 아빠랑 친하지도 않은데.” A씨의 아내는 “나도 몰라. 그냥 요즘은 다 삼촌, 이모라고 한대. 호칭이 좀 민감하잖아.” “엄마들이 요즘 아줌마 소리 듣기 싫어 하는 건 알겠는데, 아빠들도 굳이 삼촌이라고 해야 해? 그럼 ○○는 앞으로 어린이집 쭉 다니면 삼촌, 이모가 40명은 되겠다,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었지만 “깐죽거리지 마”라는 아내의 대꾸에 A씨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아줌마라는 말과 함께 이제 아저씨라는 말도 자리를 위협받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아줌마는 ‘나이 든 여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 아저씨는 ‘남남끼리에서 성인 남자를 예사롭게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다. 친한 친구네 부모님부터 이웃집에 사는 어른, 나아가 상점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어른을 편하게 부르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섣불리 ‘아줌마’ ‘아저씨’를 입 밖에 꺼냈다간 매너 없고 무례한 사람이거나, 싸우자고 시비 거는 사람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국어사전의 뜻과 별개로 사회 통념상 결혼하거나 아이가 있는 여성을 ‘아줌마’로 불렀다. “만혼이나 미혼인 30~40대 여성이 늘다 보니 아줌마라는 호칭은 이들에게 상당히 공격적”으로 들린다는 분석. 그러자 여성들 사이에서 아줌마라는 말을 상호 호혜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했고, 이제 아이가 있는 엄마들도 아줌마라는 호칭을 피하게 됐다.
최근 한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여성 출연자가 눈치 없이 다른 출연자들을 ‘아줌마’ ‘아저씨’로 불렀다가 시청자들에게 ‘무례하다’는 질타를 받았다. A씨는 “어린이집에서 누군가 자신을 아저씨로 호칭하면 그 집 엄마는 아줌마가 되어버리니 몽땅 삼촌, 이모로 바꾼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씁쓸했다”고 말했다.
여러 설문 조사에서 드러나듯 여성이 느끼는 ‘아줌마’에 비해 남성은 ‘아저씨’라는 말에 적대감이나 비하감이 상대적으로 낮다. 영화 ‘아저씨’(2010)에서 누구보다 범접하기 어려운 아저씨로 등장한 배우 원빈과 드라마 ‘도깨비’(2016)에 나온 배우 공유 덕분에 한때 ‘아저씨’는 로맨틱한 호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40대 회사원 B씨는 “남자들은 대개 군대에 가서 ‘군인 아저씨’라는 말을 듣다 보니 아저씨라는 호칭이 그리 거북하지 않다”며 “그래도 요즘 누가 날카롭게 ‘아저씨!’ 외치면 꼭 시비가 붙었거나 실랑이가 벌어질 법한 상황”이라고 했다.
남녀 갈등이 심해지면서 입대에 민감해진 젊은 남성들에겐 ‘군인 아저씨’라는 말도 이젠 꽤 적대적 호칭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20대 공기업 사원 C씨는 “남성 혐오 커뮤니티에서 ‘군인 아저씨’라는 말을 조롱처럼 쓰는 데다 한창 젊을 때 군대에 가는데 아저씨로 불리는 건 억울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아이돌도 너나없이 입대하는 시대다 보니 팬덤을 중심으로 쓰기 시작한 ‘군인 오빠’라는 말이 ‘군인 아저씨’를 대체하고 있다.
◇더 빨라지는 호칭 인플레이션
정겹던 호칭이 멸칭(蔑稱)이 되면서, 갖가지 말들이 범람한다. 나이 든 남성은 삼촌부터 선생님, 사장님, 회장님 등 실제와 무관한 직급으로, 여성들은 이모부터 더 나이가 들면 사모님, 어머님 등으로 불리게 된다. 회사원 B씨는 “회식에 가서 주문을 하는데 회사 후배가 ‘요즘은 식당에서 이모님이라고 부르면 결례’라는 말을 해 깜짝 놀랐다”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저기요’로 부르는 게 가장 무난한 거 같다”고 했다.
평론가들은 “아줌마, 아저씨 사례처럼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기존 호칭을 멸칭으로 바꾸고 더 높은 존칭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호칭 인플레이션’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공손한 존칭으로 여겨지던 ‘어르신’이라는 말조차 나이 든 사람을 조롱하는 언어가 됐고, 매장에선 ‘손님’ 대신 ‘고객님’이 주로 쓰인다. 1993년 대전 엑스포 당시 안내 요원을 가리키는 순우리말 ‘도우미’는 언제부턴가 유흥업소 접객원을 뜻하는 말이 돼버렸다.
한 평론가는 “언론 기사에서도 ‘청소 아줌마’ ‘경비 아저씨’ 등 특정 직군에 소위 멸칭으로 여겨지는 용어들이 남발되는 경향을 보인다”며 “특정 연령과 직업, 계층을 끊임없이 차별하고 하대하기 위해 멀쩡한 호칭을 멸칭으로 바꾸는 트렌드가 점점 빨라지고, 사람들 인식에 더 깊숙이 파고드는 양상”이라고 진단했다.
기존 호칭을 대체할 존칭을 찾지 못했거나, 기존 멸칭을 대체할 다른 호칭이 마땅치 않을 때 등장하는 마법의 단어가 바로 ‘저기요.’ 살벌한 호칭 인플레이션 속에서 ‘저기요’가 위태롭게 중립을 지켜주고 있는 셈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은 “호칭 등에 존칭 표현을 넉넉하게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압박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타인에 대한 차별욕과 자신에 대한 상승욕이 더 강해진 한국 사회의 단면”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