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경북 지역을 떠나 강원도에 터를 잡았다. 온난화로 기온이 오르자 벌어진 ‘집단 이주’ 사태다. 우리나라 대표 사과 산지였던 대구·청송에서는 점점 이 과일을 재배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사과는 결국 국내 최북단 마을인 강원도 양구로 떠밀리듯 이사를 갔다. 주산지가 약 200㎞ 북상한 셈이다.
‘능금꽃 피는 고향’을 부른 가수 패티김도 놀랄 일이다. “능금꽃 향기로운 내 고향 땅은 팔공산 바라보는 해 뜨는 거리~”로 흘러가는 이 노래와 달리, 대구에서는 능금꽃 향기가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다. 제주도 하면 떠오르는 과일 귤은 전남·경기도는 물론 서울까지 북상했다. 국내 남부 지역에서 자라던 과일이 북쪽 동네로 이삿짐을 싸는 동안, 해외에 살던 과채류는 한국으로 ‘이민’을 왔다.
망고는 제주를 찍고 통영까지 이사를 갔다. 뉴질랜드 키위와 스페인 올리브는 ‘한국산’으로 국적을 바꿨고, 동남아 대표 채소인 공심채(모닝글로리)는 충남 논산 등에 터를 잡았다. 패션프루트로 불리는 백향과 재배지는 제주도와 남부 지방을 넘어 수도권인 경기도 평택까지 올라왔다.
◇“북쪽으로 이주할 결심”
과일만 이사 올 수 없으니 농부들도 이삿짐을 싼다. 이른바 ‘사과 이주’다. 비가 쏟아진 지난 25일 ‘펀치볼’로 불리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서 만난 심정석 강원농장 대표도 사과 때문에 이주해온 외지인(外地人)이다. 그의 농장은 펀치볼 읍내에서도 차로 15분쯤 올라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해발고도가 600m쯤 되는 곳이라고 했다. 심 대표는 이미 수확이 끝나 가지가 앙상한 사과나무들 옆에 또 다른 사과 묘목을 심고 있었다. 13만㎡(약 4만평)가 넘는 땅에 사람 키보다 조금 큰 사과나무들이 빼곡했다.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는 날이었는데도 그는 “비가 올 때 심으면 따로 물을 주는 수고를 덜 수 있다”며 질퍽해진 밭을 누볐다.
경북 지역의 사과 농사꾼이던 그는 2010년대 중반부터 “사과 맛이 예전 같지 않다”는 단골손님들의 항의를 듣고 강원도로 이주를 결심했다. 그는 “그 지역에서 매출 1위를 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는데 2010년대 중반쯤 고객들이 보관 중이던 사과를 먹어보니 ‘이건 내 사과가 아니다!’라는 말부터 나오더라”고 했다. 갓 딴 사과의 맛은 비슷했는데 금세 식감이 퍼석해진 것이다. 그는 “20년간 같은 방식으로 재배했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전에 없던 ‘열대야’ 등 고온 현상이 이유 같았다”며 “사과 농사짓던 땅을 팔고 강원도로 올라왔다”고 했다. 실제로 경북 지역의 대표 사과 산지인 청송군의 여름 최고 기온은 2011년만 해도 34.7℃였지만 2015년에는 37.4℃로 치솟았다. 2018년에는 38.1℃로 지난 10년 사이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강원도로 온 그는 사과나무 1만4000여 그루를 심었다. ‘펀치볼 사과’라는 별칭을 단 그의 사과는 지난 추석, 원래 농사짓던 지역의 사과보다 1박스당 10만원 더 비싸게 팔렸다. 그는 “사과 하나 잘 키워보겠다고 우리나라 최북단까지 올라왔는데 계속 더워지면 20년 후엔 강원도에서도 농사가 쉽지 않을 것 같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농촌진흥청은 우리나라 사과 산지가 점점 줄어들어 2070년이 되면 강원도 일부 산간 지역에서만 재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강원도 사과마저 줄어 개마고원에 사과나무를 심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닌 이유다.
더워지는 날씨를 피해 ‘사과 이주’를 한 건 심 대표만이 아니다. 양구사과연합회에 따르면 이 마을 사과 농가의 3분의 1 정도가 경북 등에서 사과 농사를 짓다가 온 외지인이다. 통계청 농림어업총조사로도 증명된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경북 지역의 사과 재배지는 16.7% 감소한 반면 강원도의 사과 재배지는 164.3%나 증가했다.
농촌진흥청은 연평균 기온이 1℃ 오를 때 농작물 재배 가능 지역은 81km 북상하고, 해발고도는 154m 상승한다고 분석한다. 한국 여름철(6~8월)의 평균 기온은 2022년 24.5℃로 2002년(22.9℃)보다 1.6℃ 높아졌다. 단순 계산하면 지난 20년간 농작물 적정 재배지의 위도는 129.6km 북상하고, 해발고도는 246.4m 높아진 셈이다. 경북의 대표 사과 산지인 청송에서 강원도 양구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00㎞, 해발고도는 양구가 청송(약 250m)보다 300m가량 높다. 기온 상승에 의한 재배지 변화 공식이 얼추 들어맞는다.
◇펀치볼 농부들의 ‘업종 전환’
강원도에 터 잡고 살던 농부들도 ‘업종 전환’을 했다. 실제로 양구 펀치볼의 특산품은 고랭지 배추·무에서 시래기로, 최근에는 사과와 멜론으로 변화해 왔다. 2006년부터 매년 10월 ‘펀치볼 시래기 축제’를 열던 강원도 양구군은 2022년부터 시래기와 사과를 합친 ‘시래기 사과 축제’로 확대했다. 펀치볼에서 농사를 짓는 농가들이 길가에 세워둔 간판에서도 ‘시래기’보다 ‘사과’를 앞세운 경우가 많았다. 아직 생산량은 적은데 강원도 사과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이날 만난 사과 농부들은 서로 “남은 사과가 좀 있느냐”고 물었다. 사과 밭으로 둘러싸인 펀치볼과 양구 읍내에 있는 마트에서도 사과는 ‘품귀’였다.
1990년대까지 고랭지 무를, 이후에는 시래기와 감자 농사를 짓던 김원배 해안마을 대표는 2010년대부터 사과 농사꾼으로 변신했다. 펀치볼에 있는 사과 농장을 둘러보던 김 대표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눈에 보이는 이곳이 다 고랭지 배추와 무 밭이었다”고 말했다. “1980~90년대만 해도 사과나무를 심으면 다 얼어 죽어서 못 키웠는데, 점점 날이 더워지고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배추와 무에 무름병이 오더라고요. 무와 감자를 키우던 밭에 사과와 멜론을 심었습니다.” 한 백화점은 지난 설 명절에 ‘펀치볼 사과’ 선물 세트를 내놓았다. 강원도 사과를 브랜드로 만들어야 앞으로 명절 선물 물량을 맞출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정부도 기후 변화에 대응해 강원도 사과 재배 면적을 늘려나간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다른 과일 ‘배’에 닥친 상황도 비슷하다. 배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나주 배’가 생산되는 전남 지역의 배 재배지는 2020년 1734㏊로 10년 전인 2010년(3297㏊)보다 47.4%나 줄었다. 전국의 배 밭이 절반가량 줄어든 가운데 경기도 안성에서만 배 재배지가 20%가량 늘었다. 배 역시 북진(北進) 행렬이다.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줄 알았던 귤은 내륙을 넘어 수도권까지 진출했다. 같은 기간 제주도의 노지 감귤 재배 면적이 소폭 감소한 가운데 전남의 노지 감귤 재배지는 3배로 늘었고, 경기 지역을 넘어 서울에서도 노지 감귤 농사가 시작됐다.
◇한국에 ‘귀화’한 아열대 작물들
올리브, 키위 같은 아열대 작물은 아예 바다 건너 한국으로 이민을 왔다. 스페인 대표 작물인 올리브와 인도·동남아가 원산지던 망고는 덥고 습한 제주를 시작으로 남해안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2017년 1곳에 불과하던 올리브 재배 농가는 2023년 기준 제주에서만 15곳으로 늘었다. 전남과 경남에서도 올리브를 키운다. 망고는 경남 통영과 전남 영광에서도 생산하는 과일이 됐다. 국내 아열대 과일 재배 면적은 2017년 109.5㏊에서 2022년 188.8㏊가 돼 1.7배로 늘었다.
대표적인 동남아 채소로 여겨지는 공심채(모닝글로리)도 ‘한국산’으로 귀화했다. 충남 논산에서 딸기와 상추를 키우던 김영환 영농법인 온채 조합장은 “남부 지역에서 주로 키우던 공심채를 논산에서도 키울 수 있게 됐다”며 “동남아 여행 다녀온 한국 사람은 물론, 한국에서 일하는 동남아 사람도 많아 수요가 높다”고 했다.
국산 올리브, 망고, 공심채 같은 아열대 작물을 키우는 농가가 늘자 농촌진흥청은 지난달 처음으로 ‘아열대 과일 적정 재배지’를 볼 수 있는 지도를 내놓았다. 아열대성 망고는 전남 해남 지역 이하, 백향과(패션프루트)는 강원도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재배 가능하다. 용과는 동남부 해안 지역에서 키울 수 있다. 내년부터는 올리브와 키위도 사과와 배 같은 국내 과일처럼 적정 재배지 분석 자료를 낼 계획이다.
분단국가의 아픔은 과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북쪽으로 더 올라갈 수 없는 ‘지리적 한계’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 시급한 것이다. 한현희 농촌진흥청 온난화대응 연구소 연구관은 “기상이변으로 인한 냉해와 고온 피해를 경감하는 기술과 함께 북쪽으로 재배지를 옮기지 않아도 맛을 낼 수 있는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