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곡(春谷) 고희동(1886~1965)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다.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 첫 조선인이었고, 1915년 졸업 후 귀국해 평생 화가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한국 근대미술사를 논할 때 늘 첫머리에 등장한다. 마치 우리 근대미술의 역사가 고희동의 일본 유학에서 시작된 것처럼 서술된다. 1972년 ‘근대미술 60년’ 전시가 열렸을 때에도 그 ‘60년’의 근거는 고희동의 대학 생활 기간이었다. 한 개인의 서양화 학습이 한 나라 근대미술 역사의 시발점이라니. 조금 억지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그만큼 고희동이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강력한’ 인물이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중인 세력의 부상
고희동이 일본에서 유화를 처음 배웠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이 조성된 시대적 환경이다. 그 배경에는 ‘개화기 중인층의 성장과 도전’이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중인은 지금으로 치면 전문직 종사자다. 의학·법률·회계·외국어 등 기술 분야 전문가로, 과거 시험에서 잡과(雜科)로 합격하면 공직 실무자로 배정됐다. 양반과 달리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하는 신분이었지만, 조선 말 엄청난 재력과 능력으로 급성장하면서 양반보다 높은 권세를 누리는 경우가 생겼다. 세계 정세를 꿰뚫는 안목 덕에 사회적 리더로도 인정받았다. 개화기 이후 문화 운동은 중인이 장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인의 인기는 어찌 보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너도나도 의사나 변호사가 되길 바라는 세상이니.
고희동의 집안도 신분 상승 욕구가 강했다. 부친 고영철은 중국어 역관이었다. 그의 형제 모두 중국어 아니면 일본어 역관이었다. 심지어 고영철은 1881년 조선이 미국과의 외교를 고심할 때 영선사(領選使) 일행으로 중국에 가 영어를 공부한 인물이다. 중국어로 영어를 배운 것이다. 곧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보낸 첫 미국 사절단 보빙사(報聘使) 일원으로 1883년 미국 땅을 밟았다. 이때 같이 간 일행이 민영익을 필두로 홍영식·서광범·유길준 등이었다. 나중에 민영익은 보수파로 빠지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갑신정변의 주역들이었다.
◇대세는 외국어
고영철은 세계가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했다. 더는 중국어나 일본어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도. 마침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사라진 후, 정부 차원의 외국어학교가 여럿 생겨났다. 고영철의 조카 몇은 육영학원에서 영어를 배웠다. 아들 중 고희동에게는 프랑스어를 공부하도록 했다. 한성법어학교, 지금 말로 하면 ‘서울 프랑스어 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이때 고희동의 나이는 불과 13세. 원래 16세부터 25세까지 연령 제한이 있었으나, 이를 무시한 조기 입학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조선의 철도·광산·우편 사업에 관심이 높아 여러 프랑스인이 정부 요직에 진출해 있었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려 대한제국 국가관이 세워질 정도였으니 프랑스어 수요가 특히 많았다. 박람회 후 조선에서 프랑스어 인기는 더욱 치솟아 1901년에는 법어학교 입학생이 100명이나 됐다고 한다. 교장은 에밀 마르텔이었는데, 러일전쟁 중 고종의 중립 외교 선언을 도운 친한파였다. 고희동은 이 교장에게 직접 ‘원어민 불어’를 배워 발음이 아주 좋았다고 전한다. 그는 매년 우수상을 받은 모범생이었다.
◇프랑스어 학교에서 만난 서양화가
이 학교에서 고희동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은, 프랑스인 화가 레미옹과의 만남이었다. 그가 마르텔 교장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모습이 실제와 너무 똑같아 고희동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레미옹은 원래 ‘세브르 도자기 제작소’ 화공이었다. 루이 15세의 연인 마담 퐁파두르가 후원한 유명한 도자기 제작소. 화려하고 사랑스러운 문양 덕에 지금까지도 프랑스 도자기의 대명사로 불린다. 고종도 프랑스처럼 왕실의 후원 아래 조선 공예 산업을 부흥시키고자 레미옹을 초빙한 것인데, 실제 공예 전문학교 설립 계획은 무산되고, 대신 조선 최초의 서양화가를 탄생시킨 셈이 됐다.
고희동이 프랑스어 역관에서 화가로 진로를 바꾼 것은, 시대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프랑스어 인기는 1905년 이후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을사늑약 체결로 조선의 외교권이 전적으로 일본에 넘어가면서, 서울의 외국 공사관은 모두 철수했다. 프랑스어 전공자가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일자리도 문제지만, 나라 꼴은 더 문제였다. 을사늑약 체결 다음 날, 고희동은 궁으로 출근했다가 당직 일지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고희동은 궁내부 주사로서 궁을 드나들었는데, 그 큰일이 터진 다음 날 일지에 쓰인 글귀는 ‘궁중무사(宮中無事)’였다고. 궁 안에는 아무 일 없다. 하룻밤 새 나라가 망하는 치욕을 겪었는데 아무 일이 없었다니. “무엇이고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게 됐다”고 생각한 고희동은 현직에서 물러났다가, 1909년 출장 형식으로 일본 유학을 떠났다. 출장 목적은 ‘미술 연구’였다.
◇조선인이 그린 최초의 서양화
발 빠른 고희동은 이미 1907년부터 야학으로 일본어 공부도 하고 있었다. 그가 불어를 잘한다는 사실은 일본 유학기에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도쿄미술학교 교수진이 대부분 프랑스 유학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지가 프랑스였으니, 고희동은 인상주의를 비롯한 프랑스의 다양한 미술 유파를 공부했다.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섞어가며.
그가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일화가 있다. 한 일본인 교수가 하얀 석고상을 가리키며 “이게 무슨 색인가” 물었다. 고희동은 왜 이런 싱거운 질문을 하나 생각하며 “백색”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교수가 그 석고상을 또 가리키며 “이건 무슨 색인가” 물었단다. 고희동은 내심 자신을 무시하나 싶어 기분이 나빴지만 마찬가지로 “백색”이라 답했다. 그러자 교수가 반문했다. “이 면은 빛을 받아 희게 보이지만 그 반대편은 음영이 졌는데 그래도 같은 색으로 보입니까?” 고희동은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그렇게 그는 음영법을 처음 배웠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법을 익혔다. 이는 수천 년 지속된 동양화의 시각과는 철저히 다른 접근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교육을 마치고, 1915년 고희동은 졸업했다. 당시 졸업생은 자화상을 제출해야 했는데, 그 그림이 현재 도쿄예술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한국인이 그린 첫 서양화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다. 이 작품이 특이한 점은 그가 눈에 띄는 조선인 복장에 정자관을 썼다는 것. 정자관은 보통 지체 높은 관료가 편히 착용하는 모자인데 그 모습이 자못 위엄 있다. 고희동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자신의 머리에 정자관을 씌움으로써, 예전으로 치면 성균관을 졸업한 유생이라도 된 듯 스스로를 당당하게 그렸다.
졸업 후 귀국한 해 여름에 그린 ‘부채를 든 자화상’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모시 적삼을 풀어 헤친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벽면에 서양 서적을 꽂은 서가와 서양화를 배치해 기술자라기보다는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환쟁이에서 화가로
나름대로 초엘리트 교육을 받고 귀국했지만, 조선의 현실은 그런 수준을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그 시절 누가 서양화를 보거나 들어보기라도 했겠나. 고희동이 화구통을 메고 야외 사생을 나가면 사람들은 ‘담배 장수냐, 엿장수냐’ 비웃었다. 유화물감을 보고는 닭똥을 칠한다느니, 고약을 바른다느니 조롱했다. 이건 서양화이고 자신은 화가라 설명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화가는 ‘환쟁이’로 치부되며 천시받던 직업이었다. 화원은 본래 중인 신분이었지만, 역관이나 의원보다 훨씬 낮게 인식됐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고희동은 유화를 그만두고 ‘한국화’를 그렸다. 서양화에 관해서는 얘기조차 나눌 상대가 없었다. 대신 그는 같은 중인 출신으로 언론 및 출판계에서 활동한 오세창·최남선 등과 어울렸다. 동아일보 초대 기자로, 창간호 표지를 비장하게 장식한 이가 고희동이었다. 잡지 ‘개벽’ 1주년 표지화도 그가 그렸다. 용맹하게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 또 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와는 별도로 ‘서화협회’를 조직해 1936년까지 매년 전시회를 운영했다. 이는 대단한 업적이다. 해방 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장,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 심사위원, 예술원 초대회장, 민주당 참의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인 화가’라는 인상마저 준다.
그러나 그가 평생 품었던 꿈은 분명하다. 그가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했던 욕망 속에는, 최초의 서양화가로 상징되는 자신을 포함해 조선 예술가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환쟁이’를 ‘화가’의 위치로 격상시키기 위해 애쓴 선구자였음에 틀림없다.
그 노력은 자신의 세대에서는 결실을 맺지 못했다. 다음 세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거나 ‘꿈’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보성·휘문·중앙·중동 등 사립학교 미술 교사로 출강했던 고희동은, 조선인 학생이 처음 조선에서 유화를 접하고 화가의 꿈을 키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도상봉·이마동·오지호·구본웅 등 1세대 서양화가 대부분이 그의 제자였다. 간송 전형필도 그의 지도를 받았다. 오늘날 고희동의 자취는 원서동 고택에 일부 남아 있다.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쓸쓸하지만, 꼿꼿한 기품을 유지한 한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