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영국 왕세자빈 케이트 미들턴, 그리고 할리우드 배우 올리비아 문이 차례로 암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 이들은 모두 1980년대생 40대 초반의 건강한 여성이다. /로이터-AP

지난달 해외 젊은 유명 인사들이 잇따라 암 투병 사실을 알렸다. 먼저 ‘엑스맨’과 ‘뉴스룸’의 미국 배우 올리비아 문(43)이 “지난해 유방암 진단을 받고 유방 절제술 등 네 번의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영국 왕세자빈 케이트 미들턴(42). 그는 정확한 병명은 밝히지 않고 “복부 수술 중 암이 발견돼 예방적 화학 치료를 시작했다”며 “어떤 형태로든 이 병에 직면한 분들은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아 달라”고 했다.

앞서 2020년 영화 ‘블랙팬서’ 주연 배우 채드윅 보즈먼도 43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나 충격을 안겼다.

몇 개월간 대중의 눈앞에서 사라져 각종 억측을 낳았다가, 3월 22일 영상을 통해 암 투병 사실을 직접 밝히는 케이트 미들턴 영국 왕세자빈. /엑스

젊은 암 환자가 늘고 있다. 중·장년의 병으로 여겨졌던 암이 10~40대에 발병하는 비율이 급증, 각국 의료계와 정부가 긴장하고 있다.

지난해 영국 에든버러대 연구팀이 204개 국가·지역을 조사했더니, 1990~2019년 새 50세 미만의 연간 신규 암 진단 건수는 79%, 암 사망은 28% 증가했다. 이 추세면 2030년 젊은 암 환자 수는 지금보다 31%, 사망자는 21% 증가할 전망이다.

미 워싱턴의대에 따르면 최근 30년간 20개 선진국(G20)에서 암 발병률이 가장 많이 늘어난 연령군은 MZ세대였다. 20대 후반, 20대 초반, 그리고 30대 초반이 1~3위를 차지해 노인 암 증가율을 뛰어넘었다. 오히려 75세 이상 고령층에선 암 발병률이 2005년 정점을 찍고 하락 중이다.

할리우드 배우 올리비아 문이 지난달 유방암 투병 사실을 알리며 수술 후의 모습도 공개했다. /인스타그램

한국도 젊은 암 위험 국가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통계상 지난 5년간 20대 환자의 암 발병률이 26% 증가했다. 이중 직장암은 20대 남성과 여성에서 각각 107%, 142%나 증가했다.

한국 20~30대 대장암 발병률은 세계 1위다. 젊은 암 환자들이 투병 생활을 유튜브에 공개하기도 한다.

원인은 미스터리다. 학계가 식생활과 라이프스타일 변화, 환경오염과 약물 영향 등 여러 요인을 연구 중이지만 이렇다 할 이유를 지목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유력한 가설은 섭식 문제다. 서구 선진국의 가공식품, 붉은 고기, 튀긴 음식과 고열량 음료, 술 섭취 증가가 주범일 것이란 추정이다. 실제 젊은 암 발병률이 제일 높은 곳은 북미, 그다음이 유럽이다. 사하라 이남 서아프리카가 가장 낮다.

1990년과 2019년의 암 발병과 사망자의 비중을 나타낸 표다. 지난 30년간 세계에서 50대 미만 신규 암환자가 79%나 증가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민경

특히 대장암 발병률과 TV·영상 시청률은 정비례 관계라고 한다. 운동 부족과 비만이 문제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1980년대 이후 패스트푸드와 자가용 보급으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아 비만이 확산한 것이 MZ 암 증가의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미 하버드대 연구팀은 “아시아에서도 한국은 일본과 달리 서구형 대장암 환자가 폭증한다”고 했다. 일본은 젊은이들도 생선·콩류·야채 위주로 소식하고 걸어 다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우리의 ‘치맥’ 등 고열량·배달 음식, 먹방 등 과식·과음 문화, 넷플릭스·유튜브 시청 증가에 따른 운동 부족이 암 발병 배후라는 가설이 제기될 수 있다.

마블 영화 '블랙팬서'에서 가상국가 와칸다의 국왕 티찰라 역을 맡았던 배우 채드윅 에런 보즈먼. 30대에 발병한 대장암으로 4년간 투병한 끝에 2020년 미 LA 자택서 사망했다. /AP 연합뉴스

젊은 여성의 유방암과 자궁내막암도 급증하고 있다. 초경 나이는 내려가고,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해 여성 호르몬에 장기간 노출되는 것이 원인일 수 있다고 한다.

자궁경부암의 경우 예방 백신 덕에 중년층 이상에선 발병률이 급감했지만, 되레 20~30대 미혼 여성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채드윅 보즈먼이 술·담배를 하지 않았고, 미들턴 왕세자빈과 올리비아 문도 비만과 거리가 멀고 출산한 여성이란 점에서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운동 즐기고 건강식 챙겨 먹던 젊은이가 암 진단을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학계는 젊은 층의 학업·업무량 폭증, 대인 스트레스, 스마트폰 과다 사용에 따른 블루라이트 노출과 숙면 방해도 주목한다. 비만 치료약, 항생제, 제산제, 피임약, ADHD·우울증약 등 약물 남용, 그리고 미세플라스틱과 대기·수질 오염의 영향도 연구되고 있다.

국내 여성의 유방암 발병률이 급증하고 있다. 초경 연령 저하와 출산 지연에 따른 여성 호르몬 장기 노출 등이 원인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픽=양진경

암 환자의 장내 미생물(microbiome) 부족·변이 현상이 요즘 활발한 연구 주제인데, 위와 같은 여러 이유가 중첩된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젊은 암이 위험한 건 ‘젊으니까 괜찮겠지’라며 건강을 과신하고 검사를 미루다 말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젊을 때 발병하는 암이 좀 더 공격적인 경향도 있다.

한창 일하고 가정을 꾸린 시기에 암이 오면 타격이 크고, 가족의 돌봄을 받을 확률도 노년층보다 낮아 투병이 더 외롭고 힘들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손실도 크다. 각국은 50세 이상이던 암 검진 권장 연령을 속속 내리고 대응책을 마련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