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면 같이 마데이라를 마시자고 한 사람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난 웃었는데, 봄의 술이 있다면 그건 마데이라라고 내가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 봄이 되면 마데이라를 마시자고 한 사람은 자신이 그 글을 봤다는 걸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귀여워서 웃었다. 그리고 마데이라를 함께 마시려고 했다. 봄이 되면 정말.
그런데 언제부터 봄이지? 라디오를 듣다가 답을 얻었다. 밖에 새싹이 돋든 꽃이 피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마음이 봄이어야 봄이라고 했다. 개구리 우는 소리가 마음에서 들려야 봄이라고 했던가 그랬을 것이다. 절묘하다고 생각했는데, 딴생각을 하다가 쓴 사람의 이름과 출처를 놓쳤다. 실마리를 붙들고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전문을 읽고 싶었는데.
아, 왜 마데이라가 봄의 술이라고 주장했는가에 대해 잠시 말해보겠다.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Antonio Carlos Jobim)의 ‘아구아스 지 마르수’라는 보사노바를 듣다가 뜻이 궁금했던 내가 있었다. 공기가 잇몸에서 입술로 흘러다니는 ‘ㄹ’과 ‘o’ 같은 유음으로 가득한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제목도, 가사도 궁금해졌던 것이다. ‘아구아스 지 마르수’는 ‘3월의 물’이라는 뜻. 가사에 ‘마데이라’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나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데이라’는 포르투갈의 섬이기도 하며, ‘마데이라’라는 술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데이라 섬에서 가장 유명한 게 이 섬 출신인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고 두 번째로 유명한 게 마데이라라는 게 역시 나의 주장이다. 마데이라라는 술은 마데이라 섬에서 나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3월의 물’이란 비다. 봄비가 아니라 가을비. 브라질은 남반구이므로 북반구에 살고 있는 우리와 계절이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곳에서 3월의 비란 긴 여름이 끝나고(얼마나 타들어 가듯이 더웠겠는가?) 가을이 시작됨을 감각하는 신호인 것이다. ‘아구아스 지 마르수’는 이 계절감에 두둥실 실려가는 노래고. 이 노래를 듣다 보면 긴 여름이 끝남을 축복하듯 내리며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촉촉하게 적시는 비에 나도 감사하게 된다. 그렇게 감사하며 ‘3월의 물’을 듣는데 봄비가 내렸던 날이 있었다. 3월이었다. 그래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마데이라를 사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나는 마데이라가 ‘3월의 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3월의 물’이란 비다. 봄비가 아니라 가을비. 브라질은 남반구이므로 북반구에 살고 있는 우리와 계절이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곳에서 3월의 비란 긴 여름이 끝나고(얼마나 타들어 가듯이 더웠겠는가?) 가을이 시작됨을 감각하는 신호인 것이다. ‘아구아스 지 마르쑤’는 이 계절감에 두둥실 실려가는 노래고. 이 노래를 듣다 보면 긴 여름이 끝남을 축복하듯 내리며 브라질의 열대우림을 촉촉하게 적시는 비에 나도 감사하게 된다. 그렇게 감사하며 ‘3월의 물’을 듣는데 봄비가 내렸던 날이 있었다. 3월이었다. 그래서 뛰쳐나갈 수밖에 없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마데이라를 사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나는 마데이라가 ‘3월의 물’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에 마데이라를 마셨다. 봄이라고 느껴서 그런 건 아니고 어느 술집에 ‘마데이라 플라이트’라는 메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시알, 보알, 말바시아, 이렇게 석 잔의 마데이라로 구성된 메뉴를 보고서 다가오는 어느 날 4시 정도에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왜 하필이면 4시인가? 4시의 기분에 맞는 술이라는 게 있다. 저녁 영업을 하기 전의 잠시의 틈, 한가함과 나른함이 뒤섞인 시간이 4시다. 나는 이 시간에 주로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문제는 4시에 술을 파는 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거. 그래서 ‘4시에 여는 술집’, ‘2시에 여는 술집’, ‘10시 반에 여는 술집(실제로 있다)’ 같은 내게 유용한 정보를 숙지하고 있다.
이날은 혼자는 아니었다. 봄이 되면 같이 마데이라를 마시자고 한 사람도 아니었다. 점심을 함께한 어느 작가와 차를 마시고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서 여기로 가자고 했다. 4시였고, 그 술집이 문을 여는 시간도 4시였다. 마데이라 플라이트 말고도 셰리 플라이트, 포트 플라이트, 칼바도스 플라이트가 있어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마데이라 플라이트를 주문했다. 세르시알을 마셔보고 싶었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마데이라는 마셔보았는데 세르시알은 마셔본 적이 없었다. 세르시알을 취급하는 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텐데, 최근에 세르시알을 파는 곳을 발견했다. 바로 집어 들려다가 이 술집의 마데이라 플라이트가 떠올랐고, 마셔보고 사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르시알은 과연, 내 스타일이었다. 가장 드라이한 마데이라가 세르시알임을 알았기에 드라이한 정도는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향이나 풍미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을까 주저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내가 빗속으로 뛰쳐나가서 사왔던 마데이라가 베르델류였는데, 베르델류가 세르시알 다음으로 드라이한 마데이라였고, 나는 이 술을 좋아했다. 좋아했다는 정도로 부족하다. 무척 좋아했다. 진저리쳐질 정도로 단 포트 와인의 단맛을 원할 때도 있지만 나는 피노누아에 호박색이 섞인 듯한 이 술의 색을 보면서 오후에 책을 읽는 게 좋았다. 3월의 물이 대지를 적시는 걸 느끼며 책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술 한 잔만으로 이렇게 브라질이나 마데이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조용히 감격하며 말이다.
그건 나만의 비행이기도 했다. 항공권도, 체크인도, 탑승 수속도 필요 없는 아주 간편한 비행. 브라질과 마데이라가 함께 보이는 상공에 있는 느낌이랄까.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건 ‘마데이라 플라이트’라는 말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경우 플라이트(flight)는 ‘비행’이나 ‘층계’가 아니라 ‘비슷한 것들의 무리’라는 뜻이라지만 ‘비슷한 것들을 마시며 한 계단씩 상승하는 비행’이라고 우기고 싶은 것이다. ‘플라이트’에는 지금의 나 같은 행위를 가리키는 말인 ‘공상’이라는 뜻도 있다.
얼마 전에 나온 브라질에서 살았던 작가의 산문을 보는데 마침 봄 이야기가 나와서 마데이라를 마셨던 그날이 떠올랐다. ‘봄을 쓰다’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 글의 처음은 이랬다. “새 계절에 처음 느끼는 온기, 첫 숨만큼이나 오래됐다.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나는 ‘첫 숨’을 ‘첫 술’로 읽고는 이 작가(클라리시 리스펙토르)에게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첫 술’이 아닌 ‘첫 숨’으로 읽어도 미소가 새어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다. 세르시알을 마시며 읽어야겠기에 책을 덮었다(책 제목은 ‘세상의 발견’). 세르시알을 사야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봄에 대한 정의를 하나 추가하기로 했다. ‘마데이라가 마시고 싶어지는 계절이 바로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