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나이듦은 시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작품 소재다. 내가 감지하는 타자와 세계의 흐름만큼이나, 그것을 마주하고 수렴할 자기 내면의 변화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마흔’은 시인들의 글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는 나이. 이문재 시인은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소금창고’)고 했고, 김선우 시인은 “여기까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려왔지만/ 여기서부터 나는 시속 1센티미터로 사라질 테다”(‘마흔’)라고 했다. 우리 인식 안에서 마흔은 곧잘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이 교차하는 반환점이 된다.

시인이기도 했던 공자는 마흔을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 불혹(不惑)이라 했지만, 어디까지나 ‘공자님 말씀’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박영희 시인은 “서른에서 마흔으로 이어지던/ 계단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마흔’)았다고, 유병록 시인은 “열일곱 살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훌륭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데”(‘마흔이 내린다’)라고 적었다. 신경림 시인은 마흔의 갑절을 살아내고 팔순을 맞이하던 해 발표한 시집에서 “어쩌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한다는, 헤어나도 언젠가 다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나의 마흔이 싫다”(‘나의 마흔, 봄’)고 처절하게 고백했다. 이렇듯 마흔이라는 낱말이 눈에 크게 들어오는 까닭은 올해 내가 만으로 마흔 살이 됐기 때문이다. 아울러 어려서부터 마흔을 생각하며 품었던 슬픈 바람 때문이다.

일러스트=유현호

대여섯 살 무렵, 나는 유난히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이였다. 워낙 몸집이 작았던 탓에 낯선 또래나 어른을 만나면 먼저 나이부터 밝히고 봤다. 그러면서 나이 대신 학년을 말할 수 있는 초등학교 형, 누나들을 부러워했다. 하나 위안이 되는 사실이 있었다. 친구들의 아빠보다 우리 아빠 나이가 더 많다는 것. 아버지는 1979년 막 서른을 넘긴 나이에 결혼했다. 당시 평균 초혼 연령을 생각하면 꽤나 늦은 셈이다. 게다가 내 위로 누나가 있으니 아버지는 웬만한 친구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러니 우습지만 당시 내 공식적인 자기소개는 “제 이름은 박준이고요, 여섯 살이고요, 우리 아빠는 마흔 살이에요”로 시작됐다.

아버지가 마흔이라는 사실만으로 마음 한구석이 든든했다. 마흔의 아버지가 대단하고 우러러 보였다. 1990년 우리나라 중위연령이 27세였음을 감안하면(지금은 46.1세) 당시 마흔은 생물학적 측면에서 분명 어른이라 할 수 있었다. 이후 마흔을 생각하며 한 가지 바람을 품게 됐다. 적어도 내가 마흔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가 곁에 계셨으면 좋겠다는 것. 마흔이 되면 무슨 일이든 감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쯤 되면 죽음·이별·슬픔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의 마흔은 영영 오지 않을 것처럼 멀게 느껴졌던 까닭이다.

하지만 나의 마흔은 도래했고 조금의 에누리도 없는 현실과 맞닥뜨렸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내 예상은 틀렸다. 마흔이 됐어도 죽음과 이별과 슬픔과는 도통 친해질 수 없다. ‘나 슬프다고… 이제 어떡하냐고’ 물을 사람도 주변에 없다. 나의 마흔은 괜찮아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속절이 없어 가만히만 있는 나이다.

마흔의 시간은 쉼 없이 쉰, 예순, 일흔, 여든 혹은 아흔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어리고 젊은 벗들이 마흔의 내가 풀지 못한 문제의 정답을 슬프고도 아프게 물어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