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은 사람을 망가뜨리기도, 단련시키기도 한다.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기로 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달라진다.
청년 박준호(30)씨는 길지 않은 인생에서 그런 갈림길에 두 번이나 선 사람이다. 스무 살이던 2014년 침몰하던 세월호에서 구조됐다. 476명 중 304명이 돌아오지 못한 참사였다. 이듬해에는 최전방 군 복무 중 북한의 목함지뢰 공격을 당했다. 코앞의 선임 장병 두 명이 영구 장애를 입었다.
두 차례 죽음이 비켜간 건 천운이었지만, 두 번 다 남의 목숨부터 구한 건 쉽지 않은 의지였다. 바닷물이 차오르는 아비규환의 선실에서 박씨는 주저앉은 노인을 끌어올려 먼저 내보냈다. 그리고 전우의 다리에서 솟는 피를 틀어막고서 총구를 북으로 겨눈 채 후송했다.
올해는 세월호 10주기와 목함지뢰 9주기. 그간 박씨는 이런 이야기를 주변에 굳이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불운이었는지 행운이었는지 곱씹지 않았고, 동정도 칭찬도 바라지 않았다. “과거에 매몰되는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서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굴지의 대기업에서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공정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 세월호에는 왜 탔습니까.
“대학(연세대 물리학과) 2학년 때 입대를 앞두고 혼자 자전거 전국 일주를 계획했어요. 제주도를 시작으로요. 독특한 경험으로 채우려고 비행기 대신 배를 탔어요. 4월 15일 밤이었죠.”
– 이상한 예감은 없었나요.
“그날 인천항에 안개가 짙게 꼈어요. 출항이 서너 시간 늦어지더라고요. 일정을 바꿀까 하다 그냥 기다렸어요. 수학여행 가는 단원고 학생들로 대기실이 무척 북적였죠. 선상에선 밤새 폭죽놀이에 단원고 레크리에이션을 했어요. 다 같이 음악에 맞춰 춤추고, 축제 같았달까....”
– 이튿날 오전 8시 49분, 맹골수도에서 침몰이 시작됐죠.
“배가 기우는데 ‘가만히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어요. 일단 따랐습니다. 비상문 열고 뛰쳐나간 분들도 있었어요. 그분들 생사는 몰라요. 상식과 이성이 통하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지요.”
–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했나요?
“배가 완전히 기울고 물이 차올라 문으로 갈 수도 없었어요. 구명조끼를 입고 선반을 세워 사다리를 만들었어요. 소화기로 창을 내리쳤지만, 유리가 워낙 두꺼워 소화기만 깨졌어요. 조그만 창 밖으로 수평선 따라 수많은 배가 몰려온 게 보이더군요. 물에 둥둥 뜬 채 비상 랜턴을 깜빡여 구조 신호를 계속 보냈습니다.”
– 그 신호가 잡혔군요.
“해경이 쇠망치로 창문을 깨 줬어요. 나가려는데 70대 할머니 한 분이 몸을 못 가누시더군요. 어디서 힘이 났는지 그분을 휙 들어 먼저 창틀 위로 올렸어요. 할머니가 나중에 저를 의인(義人)이라고 얘기했지요. 구명선 같이 탄 단원고 여학생이 울며 구토를 해서 ‘괜찮아, 친구들도 다 나올 거야’ 하며 다독인 게 생각납니다.”
– 다친 데는요?
“깨진 창문 밟고 나오다 발이 찔렸는데 별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바다에서 겪은 일보다 더 무서운 건 육지에 있었습니다.”
– 뭐였나요.
“16일 오후 진도 팽목항 상황본부에 단원고 학부모들이 단체 버스로 도착했어요. 수백 명이 내려 혼절할 듯 달려오는데, 제 평생 어떤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비통하고 충격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단원고 학생으로 여겨 손목 잡고 ‘너 몇 반이니, △△이 봤니?’ 물었어요. 안에 들어가선 사망·실종 확인을 하고 곡소리가 났고요.”
– 부모 마음이 어떤 건지, 충격적인 방식으로 알았겠네요.
“사실 부모님이 ‘다시는 여행 가지 말라’고 하실까 봐 멀쩡한 척했어요. 함께 심리 치료를 받게 됐는데, 저는 담담한데 어머니가 와락 눈물을 터뜨리더군요. 제 위주로 생각하고 부모님께 가끔 반항했던 걸 반성했습니다.”
◇2015년 8월 4일
– 세월호 후 바로 입대했나요?
“두 달 후에요. 세월호 피해자는 병역 특혜를 받을 수 있다더군요. 하지만 편하게 지내며 아픈 사람으로 분류되는 게 싫었어요. 제 일상을 찾고 싶었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대에 지원했습니다.”
– 힘든 최전방 부대를 골라 갔군요.
“세월호에서 구해준 분들처럼 저도 사회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강인한 이들만 받아주는 부대에 가서 저를 증명하고 싶기도 했고요. ‘관심병사’ 취급 안 받고 다른 사병과 매일 똑같이 뛰니 오히려 회복이 빨랐던 것 같아요.”
– 목함지뢰 도발 당일은 어땠습니까.
“무더운 날이었어요. 저희 팀 8명은 평소처럼 새벽부터 비무장지대(DMZ) 군사분계선 수색정찰에 나섰습니다. DMZ는 사람이 관리하는 곳이 아닙니다. 한 치 앞을 몰라 늘 초긴장 상태로 들어가요.”
– 오전 7시 35분 1차 폭발이 났죠.
“하재헌 하사가 통문을 나가 수색하던 중 매설된 목함지뢰를 밟았어요. 팀장(정교성 중사)을 따라 ‘적 포탄 낙하!’를 복창하며 즉각 응급 처치와 후송에 돌입했습니다. 제가 의무병이었거든요.”
– 5분 뒤 두 번째 지뢰가 터졌고요.
“제가 하 하사 상체를, 김정원 하사가 하체 쪽을 받치고 이동하는데, 김 하사가 2차 폭발을 당했습니다. 저도 몸이 튕겨나가며 기절했어요. 제 쪽으로 튀는 파편은 하 하사가 다 맞았어요. 정신이 들고도 몸을 일으킬 수 없어, 포복 상태로 총구를 철책으로 겨눈 채 부상자를 옮겼습니다.”
– 그런 상황에서 훈련한 대로 움직여집니까.
“평소 ‘이렇게까지 훈련해야 하나’ 싶었는데, 실전에 닥치니 몸이 알아서 움직이더군요. 놀라거나 아프다거나 느낄 겨를도 없었어요. 지뢰의 목적은 밟는 사람을 살상하는 것보단, 해당 부대의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타 대규모 2차 공격을 노리는 게 큽니다. 그래서 침착하게 후속 조치를 해야 해요.”
당시 북한은 자기들 소행이 아니라면서 그 근거로 “사고 영상에서 남측 장병이 각본대로 움직인 배우들 같았다”고 했다. 일사불란했다는 얘기다. 진보 진영은 북풍 자작극설, 경계 실패설을 제기했고 “비에 휩쓸려 지뢰가 떠내려왔을 것”이라고도 했다. 정부와 유엔군은 높은 지형에 지뢰가 떠내려올 가능성은 없다며 북한의 매설로 결론지었다.
– 하재헌 하사는 두 다리를, 김정원 하사는 다리 하나를 잃었지요.
“후송 차에 누운 두 부사관이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어요. 그제야 겁이 났습니다. 상병인 제가 ‘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눈 떠, 일어나!’ 막 소리 지르고 때렸어요. 김 하사가 ‘조용히 해라, 아프다’ 한마디 하더군요. 두 분이 나중에 웃으며 ‘참 나, 병사 주제에 반말에 욕까지 하고’ 그랬어요.”
당시 박씨는 두 사람의 참혹한 부상 부위를 직접 지혈했다. “며칠이 지나도 손에서 핏자국과 화약 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몸이 덜덜 떨렸어요. 한동안 흙을 밟기 어려웠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 세월호와 목함지뢰의 충격을 비교할 수 있습니까.
“세월호가 무기력 속 공포라면, 목함지뢰는 극도의 분노였습니다. 엄연히 범인이 있잖아요. 빨리 적에게 보복하고 우리의 건재를 보여주자고 들끓었습니다. 상부에선 ‘쉴 만큼 쉬라’고 말리는데, 그 팀 그대로 다시 현장에 들여보내 달라고 졸랐어요.”
– 흙을 밟기 어려웠다면서 수색 업무에 복귀했나요?
“네, 두 달 뒤에요. 서로 북돋워주니 되더라고요. 그때 느꼈어요. 악몽 자체보다 더 무서운 건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주변 상황이란 걸요. 악몽인 줄 알았는데 다시 부딪혀보니 별거 아니더군요.”
– 세월호 트라우마는 어땠나요.
“평생 바다 못 보고 배도 못 탈 줄 알았어요. 그런데 목함지뢰 두 달 만에 흙을 밟고 나니, 이젠 물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요.”
– 다시 그 바다에 가봤습니까.
“전역 후 2016년 8월 완도에서 제주행 배를 혼자 타봤어요. 세월호 2년 4개월 만이었죠. 다시 배 타러 가는 길, 배를 기다리면서 좀 울렁거렸습니다. 하지만 순항해 도착하는 순간 편안해지면서 이제 이겨냈다는 기분이 들더군요. 피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저에겐 통했습니다.”
– 또 어떤 느낌이던가요.
“그때 제가 나온 고교(김포외고) 교복을 입고 갔어요. 단원고 교복과 비슷했거든요. 동생 같던 아이들을 추모하는 저만의 의식이었습니다. 요즘도 여행 가면 그 아이들 살아 있다면 이런 풍경을 봤겠지, 이 나이엔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을 해요.”
– 심리 치료는 더 안 받았나요.
“사고 직후 한 번 받은 게 전부예요. 사고를 자꾸 떠올리면서 ‘넌 피해자’란 말을 듣는 게 힘들더라고요.”
– 두 사고 모두 배상과 보상·지원이 있었지요?
“세월호 배상은 제가 군 복무 중이라 부모님께 일임했습니다. 저한테는 중요한 게 아니어서요. 목함지뢰 땐 다 같이 포상휴가 가고 위국헌신상(모범 장병 포상 제도)도 받았어요.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해요.”
–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인생이 달라집니까.
“두 번이나 다시 주어진 귀한 삶이니 치열하게 살고 싶죠. 이전엔 학업도 F 면하는 정도로 대충 했는데, 세월호와 목함지뢰 후 복학하고선 21학점(7~8과목) 수강해 올 A+를 받았어요. 졸업 때 최우등 총장상을 주더라고요.”
– 2021년엔 남들이 선망하는 회사에 들어갔지요.
“공채 필기 시험에서 대여섯 번 떨어졌어요. 코로나로 채용을 줄일 때라 힘들었죠. 대학원 다니며 매일 새벽 문제 수백 개씩 풀며 공부해 합격했습니다.”
– 무슨 업무인가요?
“핸드폰 디스플레이라는 첨단 기술의 결정체를 상용화하는 일입니다. 연구실에서 개발된 파란 장미를 시중에서 살 수 있게 보급하는 일이랄까요. 물리학 전공이 큰 도움이 돼요. 야근을 밥 먹듯 해도 일이 재미있어요. 전 좋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같아요.”
◇누구나 자기만의 지옥에 산다
세월호 10년. 우리 사회는 추모하는 편과 추모하지 못하는 편으로 두 쪽 났다. 특별조사위가 세 번 활동했지만 일부 생존자와 유족은 아직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고, 특정 세력이 계속 정치 쟁점화한다. 참사 때 울던 국민 상당수는 “이제 그만하라”며 돌아섰다. 세월호 이후 극단적 정치 대립은 뉴노멀이 됐다. 박씨에게 물었다.
– 세월호 후에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이태원 참사,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안전 재난 사고가 이어졌습니다.
“사고가 안 났던 해가 있었나요? 모든 게 예상치 못하게 벌어져요. 크고 작음의 차이죠. 어떤 사고가 더 심각하고 어떤 목숨이 더 소중한 건 아닙니다. 진상 규명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게, 나더라도 피해를 줄이려 하는 건데 그러지 못했죠.”
– 세월호를 선뜻 추모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저로선 ‘지겹다’는 말이 상처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 하는 분들도 피해자와 유족에게 공감 못 해서라기보단, 특정 집단이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끌고 간 데 대한 반감 때문일 거예요. 의미가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세월호는 추모하고 천안함·목함지뢰 같은 북한의 대남 도발 피해자에겐 눈감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봉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세월호 때 정권 퇴진 삭발 시위까지 한 사람인데, ‘DMZ에서 지뢰 밟으면 목발 경품을 주자’는 막말을 했어요.
“(침묵) 일개 정치인의 말 한마디에 관심 주고 싶지 않습니다. 책임은 자신이 지겠죠. 우리 장병을 헐뜯는 말들이, 전체 군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 두 사건 모두 2차 가해가 심각했죠.
“악의를 가진 이도 있지만, 그게 아니어도 답답하곤 합니다. ‘죽은 사람 봤느냐?’ ‘너랑 비행기 같이 타면 안 되겠다’ ‘혜택 받았겠네’란 말도 들었어요. 웃어넘겨요. 제가 더 언행을 조심하고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지요.”
– 한국이 어떤 나라가 되길 바라나요.
“세월호나 목함지뢰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나라, 그리고 아픔 겪은 사람을 낙인찍지 않고 순수한 관심을 갖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저는 혼자 이겨내려 하는 성격이지만, 보호와 관심이 필요한 분들도 있거든요.”
– 자신이 특별한 운명을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운세’도 안 봐요.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모두 상처와 좌절이 있고, 자기만의 지옥에서 살더라고요. 저만 특별할 건 없어요.”
– 괴로움을 견디는 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나요.
“가족과 친구가 도와줄 수도 있지만, 삶을 버티는 힘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애쓰며 버티는 여러분이 다 대단하다, 멋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