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각기 다른 매체로 세계 일주를 경험한다. 요즘엔 주로 영상으로 세계를 간접 여행할 것이다. 나는 만화를 통해 처음 세계를 알았다. 한때 세계 여행과 역사를 다룬 만화책이 정말 많았다. 세계 일주 만화의 국내 시초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멍텅구리 세계 일주’가 아닐까. 1920년대 최고의 신문 연재만화 ‘멍텅구리’ 연작은 세계 일주를 148회나 주제로 다루면서 대히트를 쳤다. 네 컷짜리 짧은 만화였지만, 지금 그 어떤 매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인상과 충격을 사람들에게 안겼을 것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고 믿어서, 지구 반대편 사람은 전부 파리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냐고 묻는 이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모험가 ‘천리구’ 김동성

김동성이 기획하고 노수현이 그린 1924년 10월 13일자 네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조선일보DB

조선일보에서 ‘멍텅구리’를 처음 기획한 이는 김동성(1890~1969)이었고, 내용은 이상협과 안재홍이 조력했다고 전한다. 이 셋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기자’로 통했던 언론계 기린아였다. 이 역량 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앉아 만화를 기획하느라 낑낑대는 장면은 상상만으로 흥미롭다. 만화는 당시 새로운 매체로 급부상하면서 엄청난 파급력을 지녔다. 신문 판매 부수를 결정 짓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핵심 인물은 단연 천리구(千里駒) 김동성이었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이라는 호(號) 그대로, 대단한 여행 편력을 지녔다. 미국에서 10년간 유학한 후 돌아와 조선 땅에 최초로 미국식 코믹 만화를 도입한 만화가였다. 그는 노수현을 비롯해 이상범·안석주 등 1920년대 신문 만화 전성기를 이끈 이들에게 만화를 가르쳤다.

김동성은 황해도 개성 사람이다. 고려 충신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가 개성 갑부였다고 한다. 다만 그의 세대에 이르러 가세가 기울었고, 부친마저 일찍 돌아가시면서 김동성은 매우 독립적으로 자랐다. 당시 개성은 일본 상인이 장악하지 못한 유일한 도시라 할 만큼, 민족적 자존감과 결집력이 대단한 곳이었다. 김동성은 정몽주의 고택에 있던 서원(숭양서원)에서 이준 열사의 강연을 감명 깊게 들었고, 황성신문을 읽으며 애국심을 불태웠다. 1906년 미국 남감리교에서 학교를 창립하려는 움직임을 알고, 윤치호를 직접 교장으로 모셔 와 한영학원을 설립할 만큼 교육열도 높았다. 한영학원은 민족사립 송도고보의 전신이다.

김동성은 한영학원에서 수학한 후 모친에게 알리지도 않고 중국 쑤저우로 가서는 둥우대학(東吳大學)에서 유학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중국에서 배를 타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유럽을 경유해 뉴욕항에 당도하는 경로였다. 1909년 열아홉 살 때였다. 정말 만화 같은 모험이었다.

◇“20세기는 그림의 시대”

김동성이 ‘동양인의 미국인상기’에 그린 삽화.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이 보이는 뉴욕항에 다가가는 모습을 그렸다.

김동성은 개성에서 알고 지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헨드릭스대학·오하이오 주립대학·신시내티 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처음에는 교육학과 농학을 배웠으나, 점차 언론의 중요성에 눈떠 나중에는 언론학 이론뿐 아니라 ‘잉크 펜 회화’까지 익혔다. 그는 “20세기는 그림의 시대”라고 썼다. 언론 매체는 글로만 돼서는 대중 접근성이 떨어지기에 그림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일찍부터 인식했다. 1916년 미국 체류 중 ‘동양인의 미국 인상기’라는 영문 서적을 출간했는데, 여기에도 직접 만화를 그려 넣어 독자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글에서도 만화에서도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1919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3·1운동 직후라 조선인의 민간 신문 발행이 허용된 시점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주요 일간지를 두루 거치며 언론계를 주름잡았다. YMCA에 있던 고려미술회에서 ‘잉크 펜 회화’를 후배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1923년에는 최남선이 만든 잡지 ‘동명’에 ‘만화 그리는 법’을 연재했는데, 연필 쥐는 법, 책상에 앉는 자세, 인물 해부학, 원근법까지 자세한 설명과 그림을 곁들였다. 조선 최초의 만화 교육 자료였다.

1923년 잡지 '동명'에 실린 김동성의 '만화 그리는 법' 1화. /국립중앙박물관

그런 김동성으로 인해 ‘멍텅구리’가 가능했다. 이 연재만화는 최멍텅과 윤바람이 기생 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각종 에피소드를 익살스레 풀어냈고, 때로 세태를 풍자하거나 은연중에 교양을 높이는 역할도 했다. 특히 세계 일주 연작은 여러 나라 풍물과 유적을 소개하면서, 일반 대중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만화로 문맹(文盲)을 퇴치하는 데에도 일조했을 것이다. ‘멍텅구리’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세상에 ‘멍텅구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눈부신 삽화가 노수현

1924년 6월 잡지 ‘부인’에 실린 노수현의 표지화.

‘멍텅구리’ 기획자가 김동성이라면, 직접 만화를 그린 이는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이었다. 조그만 네 칸짜리 박스에 등장인물의 동작과 표정까지 완벽히 구현해낸 노수현의 기술력은 만화의 인기를 끌어올린 또 다른 비결이었다. 물론 김동성에게 배운 미국 만화의 기법적 영향이 강하긴 했지만, 그토록 빨리 익힐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놀라운 재능이었다.

노수현도 황해도 출신이었다. 고향은 곡산인데 개성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의 부친도 일찍 돌아가셔서, 노수현은 조부 노헌용 밑에서 주로 자랐다. 노헌용은 천도교 계열의 3·1운동 민족대표 중 한 명이다. 조부의 심부름으로 노수현은 어릴 적 천도교 지도자이자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손병희에게 직접 자금을 전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잡지 '개벽' 창간호에 실린 노수현의 삽화 '개척도'(1920).

노수현은 천도교 잡지 ‘개벽’의 창간호에 기념화를 그리기도 했다. ‘개척도’라는 제목의 이 삽화는 커다란 원목을 등에 짊어지고 화면 앞으로 걸어 나오는 개척자의 고군분투를 담은 작품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같은 개척자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절 아닌가. 놀라운 건 21세의 젊은 노수현이 이미 이런 삽화에서 서양식 음영법과 단축법을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수현이야말로 이런 삽화 제작 분야의 개척자였다.

노수현의 만화가, 그리고 삽화가로서의 경력은 눈부셨다. 김동성이 이상협과 함께 신문사를 옮길 때마다 노수현도 동행했다. 김동성은 고향 후배 노수현을 내내 챙겼던 듯하다. 그리고 이들은 ‘멍텅구리’로 대박을 터뜨렸다. 노수현은 이외에도 ‘마리아의 반생’ ‘연애경쟁’ 등 여러 신문 만화를 그렸다. 신문사에 소속된 전속 화가였기에, 신문 소설에 딸린 삽화도 그의 몫이었다. 최독견의 ‘탁류’, 이태준의 ‘딸 삼형제’, 유진오의 ‘화상보(華想譜)’ 등 수많은 소설 삽화를 노수현이 그렸다. 소설가 이광수는 여러 삽화 중에서도 노수현의 동양적 색채가 느껴지는 동양화식 필치의 삽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안중식 수제자, 화가 노수현

1940년 완성한 ‘망금강산’. 노수현은 바위가 많은 산을 좋아해 금강산을 최고의 산으로 쳤다. 파노라마적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웅장하게 담은 역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대중적으로 노수현은 만화가이자 삽화가로 유명했지만, 사실 노수현의 ‘본질’은 화가였다. 이광수 말대로, 노수현의 삽화 스타일이 ‘동양적’인 것은 본래 그의 전공이 한국화였기 때문이다. 노수현은 15세 때 안중식 문하에 들어가 한국화를 정통으로 배웠다. 안중식의 수제자였다. 스승의 호 ‘심전(心田)’에서 ‘심’자를 딴 ‘심산(心汕)’이라는 호를 하사받을 정도였다. 신문사 취직 전부터 노수현은 대형 미술 프로젝트를 소화했다. 21세였던 1920년 창덕궁 경훈각에 5m가 넘는 화려한 채색 벽화를 그렸다. 현재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신록’이라는 대작도 1920년대 작품이다.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작품들이다.

해방 후에는 더 본격적인 화가로 활동했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교수로도 재직했다. 한국화단의 실질적인 주축이었다. 1950년대가 되면 노수현은 자기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이룩하는데 그 특징이 조금 의외다. 한때 신문에 조그마한 만화를 그리던 이가, 산수화를 그릴 때는 그 규모와 느낌이 압도적으로 크고 웅장했다. 흙산보다는 바위로 가득한 험준한 산을 좋아해서 기암괴석이 화면에 앞뒤로 솟아올라 웅혼한 기상을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산수화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관을 담았다. 그는 “울분을 푸는 데는 산수화만 한 것이 없다”는 얘기를 종종 했다. 현실의 울분을 달래는 수단으로, 신선이 노니는 듯 신비하고 황홀한 세계에 더욱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노수현의 전형적인 화풍이 잘 드러난 1957년작 '계산정취(溪山情趣)'.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술 좋아하고 주도(酒道)에 철저했던 노수현에게도 특이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잔뜩 술을 마시고 남대문 앞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빠르게 남대문으로 혼자 뛰어가더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남대문 앞에서 ‘끼~익’ 멈춰 서기에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남대문을 멀리서 볼 때는 마치 뛰어넘을 수 있을 것처럼 작아 보여 실제로도 그런지 한번 시험해 본 것이라고.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를 저울질하며, 뭔가 뛰어넘어야만 할 대상과 내적 씨름을 많이 해야 했던 시대를 살았다.

김동성이나 노수현 모두 ‘최초’의 기록을 여럿 가진 근대문화사(史)의 선구자들이다. 이들의 모험심과 개척 정신은 높이 살 만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시대에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노수현의 그림값은 왜 또 그리 터무니없이 낮은지. 그래도 다행히 고(故)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에 노수현의 작품이 상당수 포함됐으니, 언젠가 더 많은 그의 명작들이 대중 앞에 공개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