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앞둔 자식들의 고민은 어떤 선물을 고를 것이냐가 아니다. 답은 정해져 있다. 선호도 1위 현금. 얼마나, 어떻게 드릴지가 관건이다. 그래서 돈을 잘 포장하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예쁜 돈 봉투는 명함도 못 내민다. 돈 총, 돈 케이크, 돈 꽃다발, 돈 피자, 돈 티슈, 돈 방석, 돈 부채, 돈 풍선…. ‘돈 선물 이벤트’ ‘현금 포장’이란 태그를 달고 온·오프라인 쇼핑몰, 꽃집과 떡집, 공방에서 수백 가지 이색 돈 포장용품이 쏟아진다.
생화나 비누 꽃을 5만원권 지폐로 한 송이씩 감싸 돈다발을 만들고, 계란 판에 1만원권 30장을 계란 모양으로 말아 넣는다.
방석 위에 돈을 깔아 “돈 방석 앉으시라” 하고, 돈 부채 촥 펼쳐 돈 바람을 일으킨다. 떡판이나 한우 세트에서 비닐 밀봉된 돈이 줄줄이 나오고, 지폐 수십 장을 돌돌 말아 3단 케이크를 쌓기도 한다.
우산을 펼치면 돈 비가 내리고, 천장에서 리본 달린 돈 벼락이 내리친다. ‘돈이 보약’ ‘금융치료’라 적힌 한약 파우치마다 지폐가 들어 있다.
금괴, 현금지급기, 소주병, 사과 박스, 굴비 두름, 피자 박스, 산삼, 아이스크림, 분재나 수학책 ‘효도의 정석’을 열면 신사임당이나 세종대왕 수십 명이 얼굴을 맞대고 미소 짓는다. 선물 상자에서 돈 나비가 날아오르고 돈 분수가 솟구치기도 한다.
‘효도의 완성은 현금’ ‘꽃보다 돈’ ‘△△△ 여사님 이제 돈길만 걸으세요’ ‘아빠 하고 싶은 거 다 해’ 등 익살스러운 문구도 넣는다. 매개·지불 수단일 뿐인 화폐가 경탄과 감상의 대상이요, 궁극의 선물로 등극한 것이다.
군포의 40대 자영업자 김정명씨는 3년 전 모친 칠순에 형제들이 100만원씩 걷어 돈 꽃다발과 돈 부채, 돈 케이크 3종을 선물했다. 그는 “달랑 봉투만 드리면 성의 없어 보일 뻔했는데, 부모님이 좋아하시며 한동안 거실에 전시해 두시더라”고 했다.
서울 노원구 주부 이진영씨도 “양가에 돈 총, 돈 방석 등 유행하는 건 다 해드렸다”며 “단점은 같은 이벤트를 또 써먹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가족끼리 기념일에 현금을 주고받는 건 1990년대 IMF 외환 위기 이후 본격화된 현상이다. 사회·경제적 욕망의 선택지와 취향이 복잡다단해지면서 그 선택의 자유를 상징하는 현금에 대한 선호가 강해졌다. 상대의 기호나 필요를 짐작해 특정한 물건을 선물한다는 건 주제넘는 일이 됐다.
지난해 LG CNS 설문에서 전국 50대 이상 부모들은 어버이날 받고 싶은 선물로 현금(66%)을 1위로 꼽았고, 상품권(28%)이 2위였다. 다른 조사에선 부모가 받기 싫어하는 선물 1위가 책, 2위는 케이크, 3위는 건강식품이었다.
어린이날 선물로도 완구나 책, 핸드폰을 제치고 현금성 선물이 1위로 올라섰다. 축의금과 부의금, 용돈 액수가 인간 관계를 규정하는 시대다.
돈 포장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건 코로나 팬데믹부터다. 이동이 제한돼 현물·서비스 거래가 꺼려지고, 안전 자산 선호 심리로 현금 확보열이 강해졌다.
그러나 가족 간에 화폐를 선물하는 건 서구 자본주의 종주국에서도 볼 수 없는 문화다. 미국·영국에선 평생 간직할 뜻깊은 물건이나 취미 생활 용품, 함께 시간 보내기를 최고의 선물로 여긴다. 화려한 돈 포장은 한국과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일부에서만 나타난다.
2021년 퓨 리서치가 선진 17국 국민에게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물었다. 미·유럽·일본 등 14국이 ‘가족’을 1위로 꼽은 반면, 한국만 ‘물질적 안녕’을 1위로 꼽아 설왕설래를 낳았다.
김석 건국대 철학과 교수는 “한국에선 자본주의와는 다른, 돈에 집착하는 배금주의 풍조가 짙다. 부자는 존경하지 않으면서 돈과 부를 선망하는 이중 심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돈 선물 포장에 대해서도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라며 “돈이 가진 가치를 과대 포장하고, 돈 자체가 마치 부적처럼 물신(物神·fetish) 숭배의 대상이 된 현실을 보여준다”고 했다.
에이, 우리도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거 안다. 자식을 돈으로 평가하는 부모는 없다. ‘현금이 최고’란 건 바쁜데 선물 고르느라 애쓰지 말라고, 다 웃자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