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일랜드 수녀는 낯선 땅을 처음 밟은 일시를 정확히 기억했다. 1975년 9월 10일 오후 2시 10분. 김포공항이었고 가을볕이 뜨거웠다. 아일랜드는 여름 최고기온이 영상 20도를 넘지 않는다. 옆에 있던 호주 사람이 말했다. “입국 심사가 굉장히 딱딱하고 까다로울 텐데 그래도 들어가서 살아 보면 좋은 나라예요.”
그렇게 선교사 겸 간호사로 한국에 도착한 지 약 50년. 전남 목포에서 명도복지관 등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는 제라딘 라이언(76) 수녀는 이제 “내 고향은 목포”라고 말할 만큼 한국 사람이 다 됐다. 삼성호암재단(이사장 김황식)은 목포 지역 장애인과 그 가족을 돌보며 인류애를 실천한 공로로 라이언 수녀를 호암상 사회봉사상(상금 3억원) 수상자로 선정했다.
“어제 전화하신 분? 아이고, 뭘 여기까지…”
지난 25일 목포 명도복지관. 수녀복을 입은 백인 할머니가 “아이고” 하며 기자를 맞았다. 딱 우리네 할머니 말투였다. 모든 행동을 종교와 연관짓고 숭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이라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날 라이언 수녀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그냥”이었다. 예컨대 이렇게. “눈앞에 닥친 일을 그냥 했어요.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 하게 돼요. 어제 하던 일을 오늘도 계속하다 보니 그냥 반세기가 흘렀을 뿐이에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을 50년이나 보살폈지만 지친 기색은 없었다. 표정에 행복감이 드러났다. 라이언 수녀는 “장애인은 불우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라고 했다. “저는 그 친구들을 ‘부러운 사람’이라고 해요. 장애인들은 막 싸우다가도 다시 포옹하고 ‘사랑해’라고 말하기까지 1분이면 돼요. 우리는 ‘10분 전에 그 사람이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 곱씹으며 괴로워하잖아요. 어느 쪽이 부러운 사람인가요?”
◇부러운 사람들과 50년
-호암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나요?
“휴대전화를 두고 미사 드리고 왔더니 ‘부재중 전화’가 있었어요. 연락했다가 ‘악’ 소리를 질렀습니다. 한동안 말이 안 나왔어요. 담당자한테 ‘저 심장마비 걸릴 뻔했다’고 했지요(웃음).”
라이언 수녀는 1966년 아일랜드 성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에 입회했다. 이 수녀회는 6·25전쟁 후 1953년부터 목포에서 의료사업을 해왔다. 라이언 수녀는 영국 런던에서 간호대를 졸업하고 한국에 파견돼 제주 성이시돌 복지의원, 서울 시립 아동병원과 목포 성골롬반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봤다.
-1975년에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됐나요.
“외방선교수녀회니까 해외로 파견되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한국에 가라고 하니까 좋다고 왔지요. 당시 아일랜드에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많아서, 나라 이름이 낯설지는 않았어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신 이유라면.
“그 시대 아일랜드에선 흔한 일이었어요. 솔직히 처음엔 일생 동안 수녀를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수녀회에 들어가 봐서 잘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이었죠(웃음).”
-거창한 뜻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내 눈앞에 놓인 일이 이거구나’ 한 뒤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한국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더웠어요. 동양의 더위와 서양의 더위는 다르거든요. 박정희 대통령 때였지요. 살아보면 좋은 나라라더니, 이제 목포가 내 고향이 됐어요.”
-한국어도 할 줄 아셨나요?
“아뇨. 처음엔 말도 못 알아듣는데, 대학생들이 영어를 써보고 싶은지 자꾸 말을 걸었어요. 아일랜드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붙이지 않는데, 사실 귀찮았지요. 제주는 ‘옵서’ ‘갑서’ 이러니까 한국말도 아니고 외국어도 아니고, 어휴. 처음엔 귀찮았지만 힘들 텐데 함께 어울리자는 뜻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죠. 결국 그 사람들이 저를 이해해준 거예요.”
-당시 한국에 어떤 환자가 많았나요?
“제주도에서는 홍역·소아마비 예방접종을 많이 하러 다녔어요. 가난한 나라의 질병이었죠. 제주도에는 또 간질 환자가 많았어요. 회 같은 날것을 비위생적으로 먹어서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목포에서는 뇌염모기 때문에 뇌성마비 환자가 많았지요.”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만.
“그때는 밖에 장애인이 잘 보이지 않았어요.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다 보니 가족들이 집에 가둬놓은 거예요. 장애인이 학교에 가봐야 놀려 먹고 따돌림받느니 안 가는 게 나았고요. 지금은 거리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자주 마주칠 수 있잖아요. 장애인이 많아진 게 아니라 사회가 성숙된 거예요.”
-외모가 다른 수녀님을 낯설어하진 않던가요?
“외국인에 대한 편견은 비장애인들이 더 심해요. 제주에선 어떤 할머니가 제 손을 덥석 잡으며 “사람이야?” 했어요. 외국인을 처음 봤으니 그랬겠죠. 비장애인들은 길 가다가도, 버스에서도 제 머리를 막 만져요. ‘머리 만지려면 1000원 주세요!’ 했더니 안 만지더라고요. 하하. 장애인분들은 그러질 않아요. 그냥 ‘이렇게 생겼구나’ 하지.”
당시 전남 목포에는 재활치료시설이 전무했다. 뇌염으로 인한 뇌성마비 환자들이 치료를 포기하는 것을 본 라이언 수녀는 1981년 아일랜드로 돌아가 특수 교육 공부를 시작했다.
-다시 돌아올 결심으로 가셨던 건가요?
“목포에 뇌성마비 환자가 많았는데 재활 치료도, 특수 교육도 없으니 집에 마냥 가둬놨어요. 저는 눈앞에 놓인 일은 ‘그냥’ 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그들을 돌보려면 특수 교육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호암재단에 제출된 추천서에는 “제라딘 라이언 수녀는 수십 년을 한결같이 한국의 장애인을 돌보며 살아왔다” “그는 ‘장애인들의 어머니’이자 ‘장애인 복지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고 적혀 있었다.
◇”길거리 쫓겨나도 ‘그냥’ 하면 돼요”
1983년 한국에 돌아온 라이언 수녀는 국내 최초의 지적·자폐성 장애인 전문 복지 시설인 광주 엠마우스 복지관에서 봉사를 하다가 1985년 목포에서 ‘생명의 공동체’를 설립했다. 장애인 직업 훈련을 돕는 곳이었다. 복도식 아파트 23평 남짓한 공간이 작업장이자 훈련장, 공부방이 됐다.
-직업 훈련은 어떤 것이었나요?
“당시만 해도 목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도시였어요. 장애인들이 뭘 해야 사회에서 쓸모가 있을까 고민했죠. 어버이날에 쓰는 조화를 만들어 개당 200원 정도에 판매했어요. 크리스마스엔 카드도 만들어 팔고요. 그렇게 번 돈으로 제품 재료를 사고, 장애인들에게 주급으로 1000원씩 줬어요. ‘일하면 돈을 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거든요.”
짜장면이 평균 616원(한국물가정보 통계)이던 시기였다. 장애인들에게 ‘받은 돈을 가지고 수퍼, 잡화점에 가서 필요한 것을 사라’고 등을 떠밀었다.
-왜 그렇게 하셨나요.
“돈이 있어도 쓰는 법을 모르는 데다 소유에 대한 집착도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사달라’는 경우가 많았어요. 가게에서 손님으로 대접받는 법도 몰랐죠. 누가 사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걸 가르친 거예요. ‘돈을 벌고 쓰는 것’도 사회 교육인 셈이죠.”
-장애인 시설이 들어온다고 하면 주민들이 반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다행히 많은 분이 도와주셨어요. 임대 아파트가 복도식이었는데, 우리가 점심에 산책이라도 나가면 ‘이리 들어오라’며 손짓을 해요. 어떤 할머니는 성당에서 떡을 받으면 몇 조각이라도 꼭 나눠줬어요. 우리가 ‘떡 할매’라고 불렀죠. 장애인들을 불편해하던 상인들도 나중엔 ‘손님’으로 대해줬습니다.”
어느 날, 아파트 임대를 준 회사가 부도났다. 당장 보증금 600만원을 잃고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며 신을 원망해 본 적은 없으신가요.
“힘들 때도 있었죠. 다행히 1980년대 후반에 집값이 많이 올라 보증금은 돌려받을 수 있었어요. 또 운전학원을 운영하던 분이 ‘창고 두 칸이 있으니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몇 개월만 있겠다고 들어가 3년을 살았지요. 창고 한 칸은 작업장으로 쓰면서 슬리퍼를 만들었어요. 하던 일을 ‘그냥’ 계속하고자 하면 돈도, 방법도 생겨요.”
또 ‘그냥’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그냥 앞에 놓인 일을 하고, 그냥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된다”고 했다. 하늘을 원망해본 적은 없는 사람 같았다.
◇장애인 인권부터 보호까지
2년 전 한 중년 여성이 라이언 수녀에게 인사를 왔다. 라이언 수녀의 소개로 22세 때 하와이에서 수술을 받은 사람이었다. 화상으로 다리가 굽은 이 여성에게 한국 병원들은 “절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1980년부터 18세 미만 아동·청소년 장애인들(누적 100여 명)을 미국 하와이로 보내 무료 수술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온 라이언 수녀는 하와이 병원에 연락해 “제발 수술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라이언 수녀는 그가 1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날을 기억했다. “하와이에 있는 커다란 꽃 있잖아요, 그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더라고요. 눈물이 핑 돌며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고마운가요?
“내가 봉사하는 게 아니에요. 이분들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들을 어떻게 해외로 보내게 된 겁니까.
“연세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울 때 서울에 있는 고아원으로 봉사를 다녔어요.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목사님이 소아마비나 화상 치료를 전문적으로 하는 미국 아동 재활 병원과 연계돼 있는 분이셨죠. 저에게는 치료가 필요한 아이들을 구원하는 ‘동아줄’과 같았어요.”
1992년 명도복지관을 설립한 그는 명도어린이집의 모태가 된 장애아동전담 보육 시설(1998년)과 지금의 명도 자립센터인 장애인 보호 작업장(1999년), 장애인 정보화 교육센터(2002년), 명도 아동 지원센터(2013년) 등을 만들며 장애인 재활과 교육을 확대해 나갔다. ‘영유아부터 성인까지 명도로’라는 문구처럼, 명도어린이집부터 복지관까지 시설을 이용하는 인원은 연간 800여 명. 프로그램별로 수십 명이 대기 중이다.
-2015년에 ‘인권침해 피해 장애인 쉼터’를 열었습니다.
“전남에 섬이 많잖아요. 염전 같은 곳에 장애인 데려가 일 시켜놓고, 보수도 제대로 주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쉼터는 법원에 이들을 연결해주고, 법적 해결이 될 때까지 머물 수 있게 하는 곳이에요.”
-장애인 가족을 위한 단기 보호센터도 운영 중인데.
“장애인들은 아침에 갈 곳이 필요하고, 가족들에게도 자유 시간이 필요해요. 장애인 가족들은 몸이 아플 때 입원도 마음 놓고 못 해요. 장애인 보호자들이 경조사 등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장애인들을 맡아주는 곳이 단기 보호센터예요.”
◇일찍 죽는 게 효도? 억장이 무너진다
국내 장애인 10명 중 9명(88.1%)은 병이나 사고 등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됐다. 원래는 비장애인이었다는 뜻이다. 장애인의 날이던 지난 4월 20일, 장애인 단체들은 지하철 역사에 드러눕는 시위를 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철회하라”고 외쳤지만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장애인들이 피해 끼치는 걸 이해해달라고만 하면 안 되죠. 어느 날 길을 가는데 장애인 친구가 사거리에서 큰 소리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거예요. 그 친구는 행복하고, 즐겁겠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싫어해’라고 알려줬어요. 우리 장애인들도 배려하는 마음을 배워야 해요.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교육하면 바뀝니다.”
-1970~80년대에 비하면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지요?
“장애인은 불쌍한, 학대받는 존재라는 인식은 여전해요. 최근 우리 친구 한 명이 몰래 빠져나가 길을 배회하고 있어서 직원들이 데리러 갔어요. 차에 억지로 태웠더니 벌써 누가 경찰에 신고했대요. 한 장애인은 ‘섬에 잡혀 있다’고 신고가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가족처럼 돌본 사람이었어요. 그 친구도 섬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경찰 조사로도 문제가 없어 돌려보냈지요.”
-장애인들에 대한 사회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가 뭔가요?
“어느 날, 밤에 횡단보도를 건너던 장애인 친구가 뺑소니 사고로 사망했어요. 장례식장에 모인 부모들이 ‘그래도 참 효자다’ 말하더라고요. 부모보다 먼저 갔으니 효자라는 겁니다. 그 말 듣고 제 억장이 무너졌어요. 아직 고등학생인데, 비장애인이었으면 자식 죽었다고 난리가 났을 거예요. 여전히 장애인 부모들은 ‘내가 죽고 나면 우리 아이는 어떡하냐’ ‘자식보다 딱 하루만 더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장애인 사회 교육을 하는 이유지요.”
현재 명도복지관 출신으로 자립 생활을 하는 장애인은 10명 정도다. 명도복지관은 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반찬을 제공하거나 생활 공간을 살피며 자립을 돕는다. 라이언 수녀는 “명도어린이집에 입소해 고교까지 나온 뇌성마비 쌍둥이가 있는데, 자립해 원룸에서 살고 있다”며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는데, 성적도 좋다”고 자랑했다. 억장이 무너진다던 그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라이언 수녀가 복지관 1층 ‘카페 세아로’에서 내린 커피를 건넸다. 특수학교에 제빵·바리스타 수업이 생기면서 요즘 장애인들의 희망 직종이 파티셰와 바리스타로 바뀌었다고 한다. “세상의 유행보다 한 발짝 늦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빵빵!” 누가 경적을 울렸다. 낡은 흰색 모닝에 탄 수녀님이 방긋 웃고 있었다. “표는 끊었어요? 친절히 맞아주지 못해 미안해요. 조심히 가요!” 명도(明道)는 밝은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다. 그 이름처럼 눈부신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