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돼지 삼겹살도 아니고, 송어회도 아니고, 하모 샤부샤부도 아니다. 단팥빵, 소보로빵, 크림치즈빵일 뿐이다. 하지만 요즘엔 그 빵을 사 먹기 위해 시간을 내서 일부러 그곳에 간다. 몇 시간이 걸려도 상관없다. 전날 밤 기차를 타고 가서 줄을 서는 ‘오픈런’도 마다하지 않는다. 원하는 빵을 손에 쥐면 이왕 돈과 시간을 들인 김에 그 지역 관광지나 맛집도 찾아 들어간다. 지금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이런 ‘빵의 경제학’이 쓰이고 있다.
그 중심에 대전의 동네 빵집 ‘성심당’이 있다. 빵 맛을 본 MZ세대는 “대전이 왜 노잼 도시냐”고 되묻는다. 대전역에서 일단 성심당의 튀김소보로를 잔뜩 산 뒤 조금씩 떼 먹으면서 걸으면 어딜 가도 꿀잼이라는 농담까지 한다. 어느덧 대전은 노잼 도시를 탈출했다. 대전 사람들조차 “성심당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고 입을 모은다. 빵이 이 도시를 살렸다.
◇빵 때문에 KTX 탑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사진 한 장이 화제였다. 대전역 물품 보관함에 성심당 빵 봉투가 가득 채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대전에 도착하자마자 역내 성심당 분점에 들러 빵을 잔뜩 사서 보관한 것. ‘돌아갈 때 사도 될 텐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뭘 모르는 참견이다. 현명한 관광객들은 ‘품절돼서 못 먹느니 보관료 1000원 내고 맡기는 쪽’을 택했다.
1956년에 문을 연 성심당의 대표 메뉴는 1700원짜리 튀김소보로, 2000원짜리 판타롱부추빵이다. 과일이 수두룩하게 들어있는 딸기시루, 망고시루 케이크는 줄을 서야만 살 수 있다. 과일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이 케이크는 주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과일을 가득 넣었다. 그러니 몇 시간이 걸려도 이걸 먹겠다고 대전에 간다.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이 케이크를 산 사람이 가격을 2~3배까지 올려 되팔이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는 사람이 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성심당 가려고 대전 갔다”는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대전에 갔다가 한밭수목원, 엑스포 과학공원 등도 들렀는데 볼거리가 꽤 있다는 얘기도 많다. 한 유튜버는 “대전 엑스포가 열린 게 한옛날인데 꿈돌이 굿즈숍에 가니 너무 반갑더라”며 “정신이 팔려 몇 만원을 썼다”고 했다. 성심당 효과가 지역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 성심당의 작년 매출은 1243억원. 전년(817억원) 대비 50% 넘게 늘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를 빼고 빵집이 1000억원을 넘긴 첫 사례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도 104.5% 늘어난 315억원. 매장 수천 개를 가진 파리바게뜨(3419개), 뚜레쥬르(1316개)의 영업이익을 추월했다.
전북 군산의 이성당도 비슷하다. 작은 항구도시쯤으로 각인돼 있는 이 지역에서도 생선회가 아니라 빵이 대표 음식이 됐다. 군산에 들르면 밥은 안 먹어도 이성당 빵은 먹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단팥빵은 2000원, 야채빵은 2500원. 1945년에 문을 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으로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지 않으면 원하는 빵을 살 수 없을 때가 많다. 20여 년 전에 대기업 프랜차이즈 빵집이 당당하게 군산에 상륙했다가 이성당에 밀려 문을 닫는 굴욕을 겪었을 정도. 이성당 빵 맛에 익숙해진 주민들이 프랜차이즈를 외면했다. 이성당도 작년 매출 266억원을 찍었다. 지역에선 “군산이 ‘먹방’ 여행지가 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게 이성당”이란 말까지 나온다.
이 밖에 경북 안동 맘모스제과의 크림치즈빵, 전북 전주 풍년제과의 초코파이, 광주(光州) 궁전제과의 공룡알빵·나비파이도 그 도시에 가면 꼭 맛봐야 하는 메뉴로 꼽힌다. ‘빵지순례’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특정 브랜드라기보다 지역을 대표하는 빵도 있다. 충남 천안 호두과자, 경북 경주 십원빵, 경남 통영 꿀빵, 경북 울진 대게빵 등이다. 이 빵을 먹기 위해 이 지역을 찾진 않지만 이 지역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이 빵을 사 먹지 않고는 못 배긴다. 역시나 줄을 서야 할 때도 더러 있다.
◇왜 하필 빵일까
빵은 흔하다. 호불호가 없는 음식 중 하나다. 요즘엔 편의점에만 가도 수십 종류의 빵이 진열돼 있다. 눈만 돌리면 프랜차이즈 빵집이 즐비하다. 그런데 구태여 ‘그 빵’을 먹겠다고 지방까지 달려가는 이유가 뭘까.
희소해서다. 대전에 가야만 성심당 빵을 먹을 수 있고 군산에 가야 이성당 빵을 즐길 수 있다. 이성당은 서울 등 몇 군데 지역에 분점을 냈지만 성심당은 오로지 대전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일부 빵집도 마찬가지다. 한 여행 블로거는 “빵이 맛있는 거야 말하면 입 아프지만 그렇다고 미쉐린 스리스타를 줄 만큼의 특출난 맛은 아니지 않냐”면서 “그 빵집에 가면 그 빵집의 역사와 스토리를 맛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람들이 끌리는 것”이라고 했다.
성심당이 이달 서울에서 열리는 팝업 행사에 참여하면서 “빵은 안 판다”고 선언한 것도 영리한 마케팅이란 말이 나온다. 외식업계 관계자는 “장사가 좀 되면 2, 3호를 내는 식의 문어발식 확장을 하거나 돈 가지고 가족끼리 싸움이 나기 일쑤”라며 “희소성이 사라지면 소비자도 등을 돌린다”고 했다.
싼 가격도 한몫했다. 먹거리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데 빵 값은 아직 누구나 부담 없이 사 먹을 만한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관광지에선 바가지요금에 쉽게 지갑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몇 천 원이면 빵도 사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건질 수 있다. 실제 인터넷에는 “서울 여자 3명이 20만원으로 대전 가서 1박2일 여행하기” “군산에서 3만원으로 빵만 먹고 데이트하기” 같은 글이 올라와 있다. MZ들은 돈을 아끼려고 1시간 정도 걸리는 KTX 대신 새마을호를 탄다고 한다. 한 직장인 20대 남성은 “밥을 먹고 나면 2차로 카페에 가서 커피와 디저트를 먹는 경우가 많은데, 빵과 커피를 함께 먹으면 꼭 2차를 가지 않아도 된다”며 “돈을 아끼는 길”이라고 했다. 특히 MZ에게 가격은 큰 메리트다.
빵의 신분 상승은 식습관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이미 우리나라의 쌀 소비는 급격히 줄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970년과 비교해 반 토막 났다. 먹거리 소비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2030의 쌀 섭취 빈도가 가장 낮다. 끼니 해결을 위해 밥을 찾지 않고 빵이나 면류 등 대체 식품을 찾는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일부 지역은 ‘제2의 성심당’을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지역 빵을 개발해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대전관광공사는 작년 말 성심당 인기 열풍을 등에 업고 빵 축제를 열어 ‘대박’을 쳤다. 전국에서 12만명이 찾았다. 이 모델과 비슷하게 충남 천안시도 ‘빵빵데이’를 열면서 “전국의 빵돌이와 빵순이들을 기다린다”며 대대적으로 홍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