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돼지 삼겹살을 옹호하려다 도지사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서귀포 유명 흑돼지고기 전문점을 찾은 고객이 지난달 28일 ‘비곗덩어리 삼겹살이 나왔다’는 글을 사진과 함께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했다. 지난 1일에도 ‘제주도 흑돼지 저도 비계 테러 당했어요’라는 글이 같은 곳에 올라왔다. 게시글은 소셜미디어를 타고 광속으로 퍼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오영훈 제주지사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돼지고기 음식점을 지도 감독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오 지사가 “식문화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점도 참작돼야 한다”고 덧붙인 게 또 문제였다. “제주도는 비계만 먹는 식문화냐”는 비난에 맹폭당한 것이다.
◇삼삼데이가 촉발한 논란
소비자들이 돼지 비계에 민감해진 건 지난해 3월 3일 ‘삼삼데이(삼겹살데이)’부터다. 유통업계는 이날 삼겹살, 목살 등 돼지고기를 반값(40~50%)에 판매하는 대규모 할인 행사를 열었다. 밥상 물가가 치솟던 시기라 많은 소비자가 몰렸다.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등 대형 마트에서 삼겹살 1800여t이 판매됐다.
하지만 이 행사 후 온라인 커뮤니티에 ‘삼삼데이 구매 삼겹살에 비계가 과도하게 많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한 소비자는 살코기가 거의 없이 비계로만 이뤄진 삼겹살 사진을 올리며 “불판 닦으라는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구매할 때 580g이던 삼겹살이 비계를 제거하자 346g으로 줄어든 경우도 있었다. 살코기보다 비계가 훨씬 많은 삼겹살이 한 지자체의 기부 답례품으로 지급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계 삼겹살 논란은 더 커졌다.
정부는 지난해 10월 ‘삼겹살 품질 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했다. 삼겹살은 지방 두께를 1cm 이하, 오겹살은 1.5cm 이하로 관리하고, 과지방 부위는 제거하거나 폐기를 검토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유통업체들이 인공지능(AI) 선별 시스템 도입 등 품질 점검을 실시하면서 올해 삼삼데이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한 달여 뒤 제주도에서 ‘비계 폭탄’이 터진 것이다.
◇비계는 과연 절대악일까
삼겹살, 목살 등 돼지고기를 본격적으로 구워 먹은 건 1980년대부터다. 육류 마케팅 전문가인 김태경 건국대 식품유통경제학과 겸임교수는 “1970년대 말 소고기 가격이 폭등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물가 안정 차원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던 돼지고기를 국내로 돌린 게 터닝포인트”라고 했다. 국내 돼지고기 소비 역사는 40여 년에 불과한 셈이다.
지나치게 많아서 문제가 됐지만, 비계는 돼지고기 맛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김 겸임교수는 “고기는 풍미·연도·보수력(다즙성) 등 세 가지로 평가하는데, 비계가 일정량 이상이라야 풍미가 살아난다”고 했다.
“돼지고기를 불판에 올렸을 때 냄새가 확 올라오면 맛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이 고기 굽는 향이 비계에서 비롯됩니다. 연도는 구운 고기를 씹었을 때 얼마나 부드러운가이고, 보수력은 구운 고기가 수분을 얼마나 품고 있느냐를 말하는 거예요.” 국내 돼지고기의 경우 삼겹살 부위가 이 세 요소의 밸런스가 가장 잘 맞았다는 것이다. 그는 “인류가 좋아하는 고기의 지방 함량은 20%대로, 소 꽃등심과 돼지 삼겹살이 그렇다”고 덧붙였다.
일반적으로 소비되는 흰 돼지보다는 검정, 갈색 등 짙은 색을 띠는 돼지가 더 맛있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에 소개돼 양돈이 늘어난 품종 중에는 K버크셔, 수입 돼지고기 중엔 스페인 이베리코, 국내 토종 품종으론 제주 흑돼지가 해당된다. 그런데 이들 품종은 모두 비계 함량이 높다.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 양용진 원장은 “옛 제주 재래종 흑돼지는 비계를 먹기 위해 키웠고, 제주 토박이들은 여전히 돼지 살코기보다 비계를 더 선호한다”며 “도지사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제주도민들은 돼지고기를 삶아 먹는 경우가 더 많아요. 흑돼지고기는 삶으면 비계가 특히 고소하면서 식감이 쫄깃쫄깃해 살코기보다 훨씬 맛있죠.”
양 원장은 “문제가 된 서귀포 식당이 손님 항의에 대응한 방식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비계 많은 흑돼지고기에 익숙한 제주도민이 아니라 전국에서 온 관광객을 주로 상대하는 곳이고, 삶지 않고 구워 먹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계를 어느 정도 제거하고 냈어야 한다. “제주 토박이들도 구워 먹을 때는 비계가 너무 많은 돼지고기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낼 경우 제주도 식문화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함께 고기를 덤으로 더 준다든가 하는 방식으로 영업했어야죠.”
◇'비계 1cm’ 정부 지침의 문제점
양돈업계는 “정부가 만든 삼겹살 품질 관리 매뉴얼의 피해가 크다”며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매뉴얼은 권고 사항일 뿐”이라며 한 발 빼는 모습이지만, ‘삼겹살 지방 두께 1cm’는 이미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 육류 유통업체 관계자는 “이전에는 문제가 없던 삼겹살 제품이 지방 두께가 1cm를 넘는다는 항의와 함께 반품이 잇따르고 있어 당혹스럽다”고 했다.
정부는 식당마다 들쭉날쭉이던 고기 1인분 중량에 대한 소비자 불만과 불신을 없애기 위해 1985년 소·돼지·양고기 판매 기준을 200g으로 정했다가 다양성과 자율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1993년 폐지했다. 하지만 ‘고기 1인분=200g’ 등식은 여전히 사회 통념으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지방 두께를 일률적으로,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겉지방’만을 기준으로 정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성토하고 있다. 한 육가공업체 대표는 “지방 1cm는 대형 마트들이 고객 민원 회피용으로 만들었다고 들었다”며 “민간 대기업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세운 기준을 정부가 취합해 매뉴얼로 확정했다면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삼겹살 지방 두께를 1cm 미만으로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크다. 육가공업계에서는 “과지방을 제거하는 것과 삼겹살을 한 줄씩 지방 두께를 1cm로 맞추는 작업 비용은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김태경 교수는 “정부 매뉴얼에 맞추려면 삼겹살 수율이 6% 하락하고 이로 인한 손실은 연간 약 500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결국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지방이 많고 풍미가 진한 돼지고기를 선호하는 소비자도 분명 존재한다. 김태경 교수는 “돼지 삼겹살도 세분화해 판매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 등심을 윗등심살·꽃등심살·아래등심살·살치살로 나누듯 삼겹살도 지방 함량 20·30·40% 식으로 브랜딩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비계 없는 돼지고기를 먹고 싶다면 목살을 선택해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