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는 말이 살인의 방아쇠가 될 줄은 몰랐다. 수능 만점을 받았다는 의대생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를 흉기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3월 경기도 화성시에서 전 여자 친구와 그의 어머니에게 흉기를 휘두른 김레아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다.
연인 관계였거나 연인인 사람이 폭행 등을 저지르는 ‘교제 폭력’ 신고는 작년 7만7150건으로, 2020년(4만9225건)보다 56.7% 증가했다. 검거된 피의자 수 역시 같은 기간 55.7% 늘었다. 작년 한 해에만 1만3939명이 교제 폭력 피의자로 입건됐다.
일상의 철학자로 불리는 알랭 드 보통은 ‘안전 이별’이라는 책에서 “이별 자체는 비극이 아니다. 이별에서 아무것도 깨우치지 못하는 게 진짜 비극”이라고 했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우울의 늪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안전하게 헤어질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
◇데이트 폭력? 교제 폭력입니다
우선 정의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연인을 폭행하는 등의 행위를 데이트 폭력이라 부르고 있지만, 최근엔 이를 ‘교제 폭력’이라 명명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연인 간에 이뤄지는 폭력·살인 등은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는 범죄임에도 ‘데이트’라는 단어가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한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검찰청은 작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데이트 폭력을 교제 폭력으로 바꿔 쓰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등 여성 단체들도 교제 폭력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교제 폭력은 ▲일정을 통제하고 간섭 ▲위협을 느낄 정도로 소리 지르기 ▲데이트 비용 청구 등 지불 강요 ▲원하지 않는 스킨십 등 폭언·폭행과 통제나 경제적 요소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해외에서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IPV)’이라 부른다.
‘사랑싸움’쯤으로 치부하는 것 역시 폭력적이다. 전문가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연인이었기 때문에 집 주소나 가족 관계, 친구 등 노출된 정보가 많아 가해의 범위가 확산하기 쉽고, 신고에 대한 두려움 또한 더 클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 법원은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를 아직 인정한다. 2021년 대선 후보이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 여자 친구와 일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조카의 범죄를 ‘데이트 폭력’이라 지칭해 소송을 당했다. 딸과 아내를 잃고, 자신마저 중태에 빠졌다 살아난 아버지는 “일가족 연쇄 살인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데이트 폭력이라 표현해 허위 사실을 적시하고, 정신적 고통을 안겼다”며 이 대표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하지만 당시 1심과 2심 법원 모두 “데이트 폭력이라는 단어가 연인 간 발생하는 다양한 범죄를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며 이 대표의 손을 들어줬다. “연인 간 발생하는 범죄를 데이트 폭력이라 지칭하는 것이 범행으로 인한 피해를 축소·왜곡하지 않는다”는 해석도 곁들였다.
◇시작은 ‘통제’… 사회적 교류 줄어들며 가해자 늘어
교제 폭력의 공포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21년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에서 남자 친구에게 폭행당해 사망한 고(故) 황예진씨 사건이 공분을 일으켰고, 작년에는 교제 폭력으로 조사를 받고 나오는 길에 동거녀를 살해한 서울 금천구 사건과 경기도 안산시에서 20대 남성이 여자 친구를 목 졸라 죽인 사건이 하루 간격으로 벌어졌다. 올해도 살인으로 이어진 교제 폭력 사건이 잇따른 가운데 지난 13일에도 제주에서 여자 친구를 감금해 폭행하고 흉기로 자살 협박을 한 20대가 체포됐다. 통계를 보지 않고도 발생 빈도가 잦아진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상대의 부재(不在)’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왜 가해자로 돌변할까? 전문가들은 “교제 폭력 가해자들은 강한 소유욕을 기반으로 연인을 통제하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걱정이 된다거나 보호한다는 이유로 “누구랑 만나는지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 “몇 시까지 들어가 연락을 하라” “특정 인물은 만나지 말라” 같은 요구를 한다면 교제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는 대표적 징후다.
교제 폭력이 늘어나는 배경은 다양하다. 혼인 건수가 줄면서 과거였으면 가정 폭력을 저지를 사람이 교제 폭력의 가해자에 머물기도 하고, 인간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교정심리학과 교수는 “의대생 사건처럼 평소 ‘자살’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것도 상대의 행동을 조종하기 위한 통제에 해당한다”며 “코로나 이후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거나 대인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고 참아내는 경험이 적은 사람이 많아진 것도 최근 교제 폭력의 증가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상대방과 상호 작용으로 이뤄지는 인간 관계를 혼자 통제하길 원하고, 그 목표가 좌절될 경우 복수심에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대인 관계를 원만히 해결해 나가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연인과의 이별을 ‘극복할 수 없는 문제’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극단적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반드시 남성은 아니다. 작년에 가정 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피해 등을 상담하는 여성긴급전화 이용 건수는 총 29만4000여 건이었는데 남성 상담 건수가 1만7000건으로 전년보다 2300건 이상 증가했다. 비율로 보면 전체의 5.9%에 이른다. 김도연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장은 “교제 폭력 상담을 신청하는 10명 중 1명 정도는 남성이지만 피해 신고를 꺼려 공식적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했다.
◇법안 처리 손 놓은 국회에 피해자만 늘어
교제 폭력은 스토킹처벌법이나 가정폭력처벌법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 스스로 안전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21대 국회(2020년 5월~2024년 5월)의 법안 처리율은 36.6%. 역대 최악이었다는 20대 국회(37.9%)보다 낮은 수준이다. 교제 폭력과 관련된 특별법이 계류돼 있지만 임기가 며칠밖에 안 남은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작다.
전문가들은 법안 통과와 더불어 올해 1월부터 수사·재판 단계에서 스토킹 범죄 가해자에게 부착하는 위치 추적 전자장치를 교제 폭력 가해자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제 폭력이 살인이라는 강력 범죄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가해자와의 분리가 최우선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제 폭력은 여전히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음’ 같은 강요나 ‘연인 간 치정 싸움’이라는 편견 뒤에 숨어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다.
관련 법과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안전하게 이별하는 방법은 뭘까? 전문가들은 ‘마지막 한 번만 만나달라’거나 ‘얼굴을 보고 이별하자’는 말도 받아들이지 말고 접촉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변에 피해 상황을 알리고 경찰 등에 신고하고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지내는 것도 권고한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연구관은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상대방에게서 우위를 점하고, 자신의 권위를 확인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논리적 설득에도 ‘이별’이라는 상대방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며 “현재 상황에서는 접촉을 피하고, 가해자와 분리하는 게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이라고 했다.
사랑이 죄가 아니라는 말은 그것이 사랑 그 자체로 안전하게 끝났을 때만 성립한다. 타인에 대한 통제부터 폭력·살인까지 나아간다면 명백한 범죄다. 이들이 구속된 경우는 입건된 피의자의 2.2%에 불과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은 사라져야 한다. 선행돼야 할 교제 폭력 범죄자의 구속이 없는 게 답답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