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진정한 기사의 임무이자 의무. 아니!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노라.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중략) 불가능한 꿈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세르반테스 소설 ‘돈키호테’를 번안한 뮤지컬의 한 대목이다. 세계 문학인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 ‘돈키호테.’ 미치광이 기사지만 미워할 수 없는 모험가. “믿음을 갖고 별에 닿으려는” 무모한 도전을 일삼지만 그 어떤 세속적 관습에서도 자유로운 영혼. 하나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 복합적 인물. 그런 돈키호테의 광기는 어쩐지 예술가와 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화가 중에는 돈키호테를 그린 이가 많았다. 피카소·달리·도미에…. 한국에도 유독 돈키호테를 즐겨 그린 이가 있었으니, 석은(石隱) 변종하(1926~2000)였다.

◇변씨 집안 막내아들

1946년작 ‘자화상’.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변해옥(1890~1962·본명 변성규)은 서예가였는데, 삼성 창립자 이병철에게 우리나라 골동에 대한 안목을 처음 일깨운 사람이었다. 변해옥은 자식으로 삼 형제를 뒀으니, 첫째 아들은 해방 후 대구 최고 영화관인 ‘만경관’ 주인이었고, 대구에서 가장 힘센 장사(壯士)로도 유명했다. 둘째 아들 변종수는 그 시절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출신 치과의사로 이승만 대통령 주치의였다. 이승만이 매우 신뢰해 호신용 권총을 직접 선물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고. 그리고, 막내아들이 바로 화가 변종하였다. 변종하가 한번은 밤하늘의 별을 빨간색으로 그렸다가 ‘빨갱이’로 몰려 잡혀간 일이 있었는데, 둘째 형이 대통령이 하사한 그 권총으로 책임자를 위협해 동생을 빼 왔다는 일화가 있다. 삼 형제는 대단히 호기롭고 의협심이 강했고 글씨를 잘 썼다. 아침에 일어나면 신문지 한 면을 먹글씨로 빽빽이 채워야 아버지가 학교에 보내줬다고 한다.

변종하의 호는 석은, 즉 ‘숨은 돌’이라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두각을 드러냈기에, 오히려 너무 재주 부리지 말고 숨은 돌처럼 지내라고 부친이 붙여준 것이다. 변종하는 그림을 잘 그렸고, 체육 방면으로도 재능이 많았다. 대구 계성중학교 시절 수구(水球) 선수였을 만큼 수영을 잘해 해군사관생도로 선발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해군사관생도는 적의 잠수함에 뛰어들어 폭탄을 투척하고 같이 죽는 역할이었다. ‘숨은 돌’처럼 지내야 할 처지가 되자, 변종하는 혼자 만주로 피신했다. 이른바 ‘학도병 세대’의 비애였다.

◇변종하의 스승 서진달

1975년작 ‘들꽃’. 삼각형의 기하학적 구조물은 태양을 숭배한 마야 문명 건축의 영향을 반영한 것이다.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

만주에는 계성중학교 시절 미술 교사였던 스승 서진달(1908~1947)이 먼저 와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변종하는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의 미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진달은 변종하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 좀 더 소개가 필요하다. 서진달 또한 매우 걸출한 인물로 ‘자유로운 영혼’의 화신이었다. 국채보상운동 주도자 중 한 명인 서병규의 손자로, 장장 10년 동안 도쿄에서 미술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대구(계성중학교)와 인천(소화여고보)에서 동시 출강하며 열정적으로 학생을 가르쳤다. 1941년에 이런 광폭 행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의 열정 덕분인지, 짧은 기간임에도 서진달을 따르는 제자 화가가 많이 배출됐다. 일제 말에는 한반도를 떠나 하얼빈 공과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는데, 이때 변종하를 다시 만난 것이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했던 방랑 화가 서진달은 해방 후 부산에서 활동했으며, 홀로 무절제한 생활을 지속하다가 1947년 폐결핵으로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추모 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의 눈길은 산마루의 노루가 골짜기의 물소리를 바라보는 듯한 향수에 젖어 있었음을 기억한다.’

◇편력기사 변종하

한동안 돈키호테에 심취했던 변종하가 1973년 완성한 '돈키호테 이후'.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

일종의 방랑 기질, 낭만과 모험심은 변종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해방 이후 변종하는 고향 대구로 돌아와 6·25전쟁을 맞았다. 전쟁 중 개인전을 열었고, 피란지 대구에 몰려든 문예인과 어울려 활기차게 활동했다. 1952년 대구에서 창간된 ‘학원(學園)’이라는 잡지가 있다. 훗날 ‘학원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대 청소년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학생 교양지. 여기 변종하는 이원수가 번안한 소설 ‘돈키호테’ 삽화를 그렸다. 돈키호테와의 첫 인연이었다.

그는 문학적인 도취와 서정성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기질적으로 돈키호테 같은 도전 정신이 상상을 초월했다. 29세에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최연소 교수가 됐지만, 불문과 학생들과 어울려 불어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프랑스에 가기 위해서였다. 1960년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 파리로 갔다. 거기서 르네 드루앵이라는 유명 화상의 눈에 들었다. 르네 드루앵은 김환기가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그의 작품을 샀던 ‘눈 높은’ 화상이었다. 칸딘스키, 장 뒤뷔페 같은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다뤄 영향력이 상당했다. 변종하는 영국·독일 갤러리에 출품했고, 프랑스와 독일 친선전에 프랑스 대표 화가로 뽑히기도 했다. 1965년에는 유네스코 파리 본부 연구비 지원을 받아 멕시코 마야 문명지를 두루 답사했다. 뉴욕에서도 체류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대, 변종하는 세계 곳곳을 누비며 당당하게 활약했다.

◇나만의 예술을 찾아서

‘돈키호테 이후-독재자’(1971). 제목의 ‘독재자’가 박정희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른 작품이다.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

1965년 그는 잠시 한국에 들러 가족을 데리고 다시 파리로 갈 계획이었지만,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주저앉고 말았다. ‘편력기사’의 안착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동안 ‘돈키호테’ 연작을 그렸다. 때로는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천진하고, 때로는 거의 성스러운 인상을 주는 다의적 돈키호테였다. 그런데 1971년 작품에는 손을 번쩍 들고 확신에 찬 돈키호테를 그리면서, 그의 그림자에 군인의 실루엣을 넣어 ‘돈키호테 이후–독재자’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일종의 풍자화였다. 남산에 잡혀가 우리 대통령을 가리키는 것이냐고 추궁받자 “그렇다”고 말해 버렸다. 위기에 놓인 그를 육영수 여사가 구해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분은 건드리면 안 되는 분”이라고 했다고.

변종하의 화풍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1970년대 중년에 접어들면서는 더 깊이 있는 고민에 빠졌다. 자기만의 독자적인 미술 세계를 이루는 일. 세계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회화를 창작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인 화가로서, 한국 전통에서 영감의 원천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는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 공예의 미학에 심취했다. “우리 것은 멍청스러우면서도 사람을 쥐고 놓지 않는 마력이 있어, 가슴을 서늘하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우리 전통이 그러하듯 고귀한 정신을 지녔으면서도 겉으로는 그저 천진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변종하의 오랜 숙제였다.

먼저 자신만의 양식을 찾기 위해 캔버스를 2차원 평면이 아닌 입체로 만드는 방법을 고안했다. 캔버스 위에 석고나 종이를 붙여 울퉁불퉁한 요철 형상을 만든 것. 여태껏 누구도 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 위에 올이 거친 마대 천을 밀착해 입히는데, 그 천에다 불을 가해 잡실을 모두 제거하고 뼈대가 되는 실오라기만 남기는 작업을 한다. 마포를 불에 그슬고 사포로 문지르는 작업을 반복해 표면이 정리되면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선보인 장장 17m짜리 벽화를 제작할 때도 수개월에 걸쳐 이 작업을 했다.

어마어마한 시간과 공력이 들어가지만, 결과적으로 작품은 얼핏 단순한 형상으로 보일 뿐이다. 새, 구름, 하늘, 꽃, 나비처럼 그저 그런 우리 주변의 흔한 대상들 말이다. 원래 그런 대상들이 아름다운 것이다. 뭐 그리 더 대단한 아름다움이 있으랴. 변종하의 작품은 대중적 인기가 매우 높았다. 1980년대 미술 시장에서 변종하는 가장 각광받는 화가 중 하나였다.

◇말년의 자화상

연도 미상 ‘자화상’. 말년에 겪은 마비로 밥을 먹으면 줄줄 흘렀다. 매번 거울을 보면서 음식을 입에 넣어야 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일기 쓰듯 자화상 연작으로 남겼다.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

그러나 변종하의 말년은 더 이상 여행을 떠나지 못한 돈키호테의 최후만큼이나 불우했다. 1987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 일부가 마비됐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온갖 국책 사업 회의에 불려 다닐 때였다. 바르게 앉을 수도, 손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에서 재활 치료밖에 답이 없었다. 자꾸 주저앉는 몸과 손을 끈으로 묶어, 넘어지려고 하면 아내가 끈을 잡아당겨 자극을 줬다.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줄 긋기 연습만 2년간 했다. 가만있으면 자살할 것 같아서, 그림을 안 그릴 수 없다고 했다.

불굴의 투혼으로 화필을 다시 잡게 되자 그의 작품은 많이 달라졌다. 결과적으로는 어린아이같이 더 순수해지고 솔직해졌다. 말년에 그린 129점의 울고 웃는 그의 자화상은 눈물겹다. 아내에게 “당신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을 그려 보여주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는 2000년 숨을 거뒀다. 마지막 13년 동안 그는 호 그대로 ‘숨은 돌’처럼 지냈다.

변종하의 사후, 아내는 그가 수집한 유물을 국립중앙박물관에 대거 기증했다. 2008년 기준 50억원에 달했다. 변종하가 15년간 살았던 서울 성북동 집과 작업실도 공공 유산으로 남겼다. 자식들은 상속포기 각서를 썼다. 예약을 통해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석은변종하기념미술관’에서는 변종하가 마치 동굴처럼 원시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고안한 회색 돌벽 안에서 생애 마지막 작업을 하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밤하늘, 별에 닿으려 날갯짓하는 새 그림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