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상수시 궁전은 베를린 우리가 살던 곳에서 거리가 얼마나 되나요?” 아들의 질문을 듣고 내심 흐뭇했다. 어릴 때 인연 맺은 도시를 궁금해하다니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내가 한마디 던진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 배경으로 나왔잖아요. 남녀 주인공의 독일 촬영 장소가 여성들에게 요즘 얼마나 인기인데요.”
이런 것을 ‘누나 현상’이라고 하던가? 누구나 아는데 나만 모르는 현상 말이다. 한때 콘텐츠 플랫폼 기업의 대표로 활동했고 한류 드라마 수출을 위해 출장 다녔으며 베를린 대학에서 한류 강연도 하고 한국문화원 한류 포럼에서 발표했던 사람으로서 영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리하여 주말과 휴일의 1박 2일을 16부작 드라마를 보는 데 온전히 바침으로써 ‘빈지 와칭(Binge watching)’, 몰아보기 대열에 동참했다. 재벌가의 손녀 홍해인(김지원)과 결혼한 사위 백현우(김수현)의 갈등 속에 악성 뇌종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사랑의 의미를 찾아간다는 전형적인 로맨틱 판타지. 다소 뻔해 보일 수 있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해외 로케이션 장소다. 내 젊은 날의 열정을 바쳤던 코스였기에 그 길을 따라가 본다.
남녀 주인공이 맹세하며 사랑의 자물쇠를 걸었던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에 있는 보행자 전용 아이젤너 다리는 노을이 질 때 특히 아름답다. 드라마의 신혼여행지 베벨 광장은 베를린의 중심 운터덴린덴 거리에 있으며 나치가 유대인 등 불온 서적을 불태우던 불쾌한 기억도 남아 있지만, 주변에 거장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던 슈타츠오퍼, 훔볼트 대학이 있는 유서 깊은 장소다. 신혼여행의 키스 장면을 담은 넵튠 분수는 마리엔 교회와 베를린 시청사 사이에 있다. 건강 회복을 간절히 기도하는 장소는 베를린 돔으로 웅장한 외형 때문에 가톨릭 성당처럼 보이지만 프로이센 왕들이 묻힌 프로테스탄트 교회다. 네잎 클로버를 산 곳은 빈터펠트플라츠의 시장이다.
그렇다면 여주인공이 뇌종양 수술을 받는 장소는 어디일까? 드라마에서는 그륀발트 병원이라 나오는데 가공의 이름이다. 병원 사정에 정통한 베를린 지인에 따르면 세트장에서도 촬영했지만 샤리테 병원을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1710년에 문을 연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학 종합병원으로 분단 시절에는 동베를린 훔볼트대학 병원이었다가 통일 뒤에는 서쪽의 자유베를린 대학병원과 통합되어 네 곳에 캠퍼스가 있다. 그중 루돌프 비르쇼브 클리닉은 인공심장과 심장 질환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이며 김정일의 심장 치료를 위해 의료진이 방북해 유명해졌다. 화면에 나오는 장소는 슈테글리츠 지역에 있는 벤저민 프랭클린 클리닉, 드라마에서뿐 아니라 내 지인에게도 기적의 장소다. 신장 이상으로 투석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한국 유학생에게 신장 이식이란 극적인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간호사 등 병원 관계자들은 요즘 한국인을 만나면 드라마의 영어명 ‘Queen of Tears’가 화제에서 빠지는 법이 없으며 드라마 배경 음악도 인기라 한다. 한류 현상이 상대적으로 차분했던 독일조차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특파원 임기를 끝내고 귀국할 즈음인 20년 전 베를린에 한식당은 4~5곳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50여 개에 이를 정도로 K푸드는 인기다. 여주인공이 한국 컵라면 먹는 장면은 튀르키예의 케밥, 커리부어스트(카레 가루 뿌린 소시지)와 함께 베를린의 3대 간편식 풍경이 될 조짐이다.
마침내 포츠담의 상수시 궁전. 신혼여행, 극적인 재회,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요한 장소다. 포츠담은 서울과 분당처럼 베를린의 이웃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상수시 공원이 유명한데, 상수시란 ‘근심 없는(sans souci)’이란 뜻의 프랑스어로 모국어보다 프랑스어를 즐겼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혼이 숨 쉬는 곳이다. 플루트 연주와 책을 좋아했으며 철학자가 되고 싶었으나 왕이 된 후 평생 수많은 전쟁터를 누벼야 했으며, 독일을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놓아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결합한 대접을 받는 군주다. 인생 후반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근심 없이 예술과 철학에 전념하겠다고 지은 바로크풍의 아담한 상수시 궁 옆에 소박한 그의 무덤이 있는데 그곳에 감자가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왕의 솔선수범 덕분에 독일인이 감자 먹게 된 습관을 기리는 것으로 그 옆 11개 작은 묘비석에 사랑했던 11마리 반려견 이름이 적혀 있는 것만큼이나 특이한 풍경이다.
상수시 궁은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제맛이다. 남녀 주인공이 오르던 132개의 계단 옆에 있는 식물의 주종은 포도나무, 고대 그리스 문화를 동경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소망이었다. 포도가 으깨져 포도주로 다시 탄생하듯 자신도 그러길 원했던 왕의 영혼 덕분일까? 아니면 그곳에 특별한 지기(地氣), 땅 기운이라도 있는 것일까? 독일이 2차대전 패배의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한 포츠담회담 장소가 인근에 있으며 대선에 패배한 뒤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치적 재기를 결심한 장소이기도 하다. 30년 전 첫 인연을 맺은 뒤 인생의 폐활량을 넓히고 여러 권의 책을 쓰며 ‘글로생활자’로 활동하고 있으니 내게도 영감의 원천인 건 분명하다.
우리는 왜 드라마에 열광하는가? 무언가 결핍을 느끼기 때문이다. 누구나 좌절과 상처가 있고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다시 일어나길 소망한다. 치유의 공간 베를린에 두고 온 가방을 찾으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또 떠나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