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유현호

‘인생은 젊어서 죽거나 나이가 드는 것 두 가지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한 노인 의학 전문가의 명쾌한 진단이다. 지금 살아 있는 한국인 절대다수는 초(超)장수 사회를 살게 된다. 사고사나 병사 외엔 유년·청년·장년기 이후 건강한 젊은 노인, 고령 노인, 초고령 노인의 길을 밟아가게 된다. 길고 긴 노년이라는 생(生)의 지평선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인류 역사 초유의 도전이다.

장수하는 삶은 축복과 재앙 앞에 모두 열려 있다. 세계적 장수 국가인 일본도 남성 노인 10명 중 7명은 75세에 노쇠가 본격화하고 90세엔 건강이 ‘바닥을 친다’. 여성 노인은 좀 다르지만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순 없다. 백세 시대라고 해도 건강하게 활동하는 백세 장수인은 많지 않다. 104세 초고령에도 활발하게 강연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김형석 교수 같은 분은 아주 귀한 사례다. 그것이 노년의 엄혹한 진실이다.

많은 이가 그렇듯 나이 듦과 질병, 임종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것은 부모님이 처음이었다. 건강하던 분들이 병을 앓고 점점 쇠약해지면서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드는 생로병사 과정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몇 년 전 관여한 ‘호스피스·완화의료 국민본부’ 운동은 노년과 죽음 문제를 현장에서 확인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대학 병원에 가보면 아픈 이가 많은 데 놀라고 요양원에선 노년의 실제 모습 앞에 처연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장례식장에서 잠시 숙연해하다가 곧 잊고 만다. 사람들은 대부분 몸도 가눌 수 없는 자신의 노년을 상상조차 못 할 뿐 아니라 죽음을 멀고도 먼 사건으로 여긴다. 한국 사회에선 묘지나 노인 관련 시설은 외진 데 있거나 기피 시설로 취급한다. 대중문화는 삶과 젊음의 아름다움만을 찬미한다. 현대 문명에서 늙음과 죽음은 ‘낯선 것’으로 여겨지고 추(醜)함과 동일시되면서 대중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다. 공론장에서 추방된 나이 듦과 죽음의 화두를 평소에 ‘자기 문제’로 체감하면서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로마 사상가 키케로(BC 106~43)는 달랐다. 책 ‘노년에 대하여’에서 그는 노인을 사회 활동과 신체 능력이 줄고 쾌락조차 잃은 채 죽음을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사회적 통념을 단호히 거부한다. 오히려 노년엔 몸의 민첩함은 줄어도 판단력은 깊어질 수 있다. 쾌락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듦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죽음은 청춘에게도 불시에 올 수 있다는 게 키케로의 논지였다. 강력한 ‘노년 긍정론’이 아닐 수 없다.

노년을 축복으로 바꿀 가능성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위대한 성취다. 키케로는 고대 로마의 부호이자 귀족이었지만, 평범한 한국 시민들도 안정된 노년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어느 정도 건강과 재산이 확보되고 기본적 욕구가 충족된 후엔 자족하는 마음의 습관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70대 노년의 행복감이 청·장년보다 높다는 사실은 최신의 과학적 연구로 입증된 바 있다. 노년에 누리는 마음의 평화는 평생 노력과 단련의 열매이고 각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증명하는 결정적 지표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자기 장례식을 가정한 글쓰기 과제를 내준 적이 있다. 조문객들이 읽을 유서를 써보라고 한 것이다. 20대 청춘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흥미로워했다. ‘죽음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라고 믿는 평소의 확신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청소년 의무교육은 죽음의 문제도 다뤄야 한다. 공원으로 가꾼 묘지나 노인 요양 시설이 우리네 일상 공간과 함께 있어야 건강한 사회다.

우리는 나이 듦과 죽음까지 책임질 수 있을 때 존엄한 존재가 된다. 좋은 삶(well-being)은 성숙한 나이 듦(well-aging)과 품위 있는 죽음(well-dying)으로 완성된다. 아주 가끔은 노년과 죽음을 떠올려야만 오늘 이곳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삶이 이토록 고귀한 것은 행복한 노년과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