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그래픽=송윤혜

재벌 회장 대 전직 대통령 딸 간 ‘세기의 재판’ 2라운드가 끝났다. 결과는 ‘딸’의 압승이다. 재산 분할만 1조4000억원에 육박하고, 위자료도 역대 최고인 20억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이번 재판 ‘결과’에는 관심이 없다. 이미 헌법재판소는 2015년 간통죄 위헌 판결에서 “혼인과 가정의 유지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애정에 맡겨야지 형벌을 통하여 타율적으로 강제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혼은 ‘사생활’이다. 이들의 혼인 관계 유지나, 재산 분할과 위자료 액수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번 2심 판결 ‘과정’을 보니 적이 걱정된다. 적어도 세 측면에서 이번 판결의 기초가 되는 원칙이 무엇인지 불명확해 보이기 때문이다.

첫째 걱정은 이번 판결이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판결이냐는 것이다. 2심 판결에 따르면 노소영씨의 부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1년 300억원을 사위인 최태원 회장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 돈으로 현재의 SK그룹을 일구었으니, 이제 이혼하게 된 마당에 돌려주라는 것이다.

1991년의 300억은 현재 가치로 최소 수천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돈이 어디서 났을까? 그 답을 우리는 알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배임 수뢰 혐의로 1995년 구속 기소되었으며, 1997년 대법원 확정판결로 징역 17년 및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그간 노태우 대통령 측은 이 추징금을 모두 납부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만약 그 딸이 법정에 제출한 증거가 사실이라면 아직 추징되지 않은 비자금이 있었던 것이다.

이 돈은 국민에게 갔어야 할 돈을 권력으로 가로챈 부정(不淨)한 돈이다. 이 돈이 만약 이혼 시 재산 분할 형식으로 배임 수뢰 범죄인의 딸에게 전달된다면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범죄 수익 은닉’ 사례로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재산 분할인가?

둘째 걱정은 이번 2심 판결이 과연 ‘형평’에 맞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혼하면 재산을 절반씩 기계적으로 나누는 것이 ‘국제 표준’이라고들 오해하는데, 우리 민법의 기초를 제공한 일본은 물론 영국, 호주, 미국 대부분 주 등 여러 법 체계에서 이혼 시 재산 분할 원칙은 ‘공동 재산 기여분’, 이혼 후 생계 유지 필요성 등 여러 요소를 종합 고려한 ‘형평의 원칙’이다.

그런데 2심 판결은 노소영씨의 작고한 부친이 SK그룹에 여러 혜택을 주었다면서 이를 기여분 산정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SK가 이동통신 사업에 진출한 것은 노태우 대통령 퇴임 후일뿐더러,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구속되거나 병석에 있는 등 무슨 특혜를 줄 만한 힘도 없었다.

지난 5월 31일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사옥의 모습. 서울 고등법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 3800억원과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 장련성 기자

반면 2심 판결은 최태원 회장 일가의 기여분은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 회장이 형제자매나 사촌들에게 이미 증여한 부분 역시 모두 최태원·노소영 공동 재산으로 간주하여 재산 분할 대상으로 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가족 기업 성격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재산 형성이 수대에 걸쳐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형제자매는 물론 사촌 등 방계 혈족도 기업 활동에 기여하곤 한다. 실제로 SK 경영권 방어 차원에서 일부 가족이 상속 지분을 양보하거나 실제로 기업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주식 가치 형성에 기여했다. 그런데 이들의 기여는 모두 부인하면서 반대로 노소영씨는 그 부친의,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여 주장까지 모두 인정하여 일률적으로 재산을 나누었다. 이것이 과연 형평에 맞는 셈법인가?

끝으로 이번 판결은 법적 안정성 측면에서 우려된다. 우리 법원은 위자료 산정 때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다. 불륜에 혼외자까지 있어도 위자료는 기껏 수천만 원이 상한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20억? 급격한 위자료 증가의 배후에 있는 법 원칙은 무엇인가? 가해자가 돈이 많아서? 그렇다면 앞으로 피해액 산정 시 가해자 재산 규모를 고려할 것인가? 아니면 피해자가 돈이 많아서? 그러면 이제 부유층의 정신적 피해는 일반인에 비해 수백 배 가치를 갖게 되나?

위자료 결정에 법원의 재량이 허용된다 해도 그 역시 일정한 한계를 벗어나선 안 된다. 더욱이 2015년 간통죄 위헌 판결 당시 헌재는 “간통 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상당히 낮아졌고, 세계적으로 간통죄는 폐지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불륜의 가벌성이 낮아지면 불륜에 대한 위자료도 폐지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마저 있었다. 실제로 영미권을 비롯해 세계 많은 나라에서 불륜에 대한 정신적 피해 배상으로서 위자료라는 개념이 아예 없다. 영어의 ‘alimony’는 우리 법의 위자료가 아니라 ‘이혼 후 생계 지원금’을 의미한다. 우리 법의 ‘위자료’는 일본 민법의 잔재로서 영어로는 ‘consolation money’로 번역한다. 일본에서 위자료는 많아야 수백만 엔 선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영미권은 물론 일본과도 다르게 불륜에 따른 정신적 피해 배상 상한을 일거에 수백 배 올리겠다는 것인가? 성공 보수가 늘어날 변호사들만 좋아할 일이다. 불륜 피해자에게 거액 위자료를 주는 것이 대중의 법 감정에는 부합할지 모르나, 우리 사법 체계의 안정성 측면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판결이 걱정된다. 다툼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숙제를 던진 것 같다. 가사 문제만 고려하다 더 큰 문제들을 놓친 것은 아닐까? ‘더 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제 대법원이 현명한 해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