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의사이자 ‘의사 외교관’으로 뛰는 김훈 인제대 교수가 연수 중인 가나·에티오피아·캄보디아 전문의들과 함께 지난 4일 일산백병원 앞에 섰다. 이 외국 의사들은 정부의 보건의료 분야 소프트파워 확대 사업인 '이종욱 펠로우십' 일환으로 왔다. 안에선 붕괴 위기라는 한국 필수 의료, 세계에선 선망의 대상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우리는 많은 직업인의 사명에 빚지고 산다. 손에 꼽는 집단이 의사다. 개혁 대상으로 지목되고 일부의 파업으로 갈등이 치솟는 지금도 대다수 의사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전히 그들을 믿고 내 생명을 맡긴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김훈(49) 인제대 일산백병원 교수는 한국 의사의 사명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생사를 다투는 환자가 쏟아지는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 23년째 뛰고 있다. 그리고 의료 여건이 낙후된 개발도상국에 병원을 세우고 현지 의사를 가르치며 ‘K 필수 의료’를 전수하는 일을 17년째 병행해 왔다.

한 달의 절반은 응급실 밤낮 당직을 서고, 의대 강의를 하고, 나머지는 30~40시간을 날아가 멀고 더운 외국에서 보낸다. 이 의사는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대륙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간다.

편한 길도 많은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명쾌한 달변가인 그는 이 질문엔 멋들어진 답을 하지 못했다.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재미있으니까요” “저보다 훌륭한 의사 많습니다”....

김 교수는 4시간 인터뷰 말미에야 소명(召命·calling)이란 단어를 찾아냈다. 종교가 없다는 그는 “의사라는 숭고한 직업의 부름을 받들 뿐”이라고 했다.

응급실이 가슴을 뛰게 했다

-왜 응급 의사가 됐습니까?

“처음엔 남들처럼 비필수 인기과를 지망했어요. 그런데 인턴 시절 응급의학과를 돌아보니, 다이내믹한 환경에서 뛰며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는 일이 성격에 맞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보통 인턴은 따라다니며 시키는 서류 작업이나 하는데 응급실에선 직접 진료하고 간단한 결정도 내릴 수 있었어요. 주위에선 말렸지만 내 가슴이 뛰는 응급실로 돌아갔습니다.”

의대 증원 갈등으로 초토화된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김훈 교수. 23년째 응급실을 지키는 그는 "응급실이 내 성격에 맞아 택했다"며 "생명을 다루는 의사다운 의사라는 자부심으로 버틴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금 백병원 응급실장인데 어떻게 일하고 있습니까.

“응급실에 하루 100명쯤 왔는데 전공의 파업 이후 50~70명으로 줄었어요. 그래도 손이 부족하죠. 응급의는 낮 10시간, 밤 14시간씩 당직을 섭니다. 그런데 교수 3명만 남게 되니 버틸 수 없어 계약직 전문의들을 모셔 왔어요. 저는 응급실장이라 매일 출근하면서 당직도 똑같이 돌아요. 혼자 응급실을 커버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응급실이 좋은가요?

“후회막심이죠(웃음). 농담이고요, 지금도 인턴 시절과 마찬가지예요. 사람의 생사를 다루는 의사다운 의사라는 자부심이 크죠. 3평짜리 진료실에 앉아 매일 같은 환자 봤다면 후회했을 거예요.”

-조용한 진료실은 갑갑합니까?

“거기 매몰되는 게 싫어서요. 의사는 자신의 의학 지식, 병원 내부나 의료계 논리에 갇히기 쉬운데 그래선 안 돼요. 주위를 돌아볼 줄 알아야죠.”

-그런 생각을 언제부터 했습니까.

“(인하대 의대) 본과 2학년 때 러시아 연해주로 대학생 해외 의료봉사를 처음 갔어요. 역마살의 시작이었죠. 고려인 할머니에게 교수님이 만성질환 약을 처방해 줬는데 며칠 뒤 그 댁에 가봤더니 약이 그대로 남아 있더군요. 복약 지도를 제대로 못 한 거예요. 진료실에서 의사 혼자 말한다고 치료가 끝나는 게 아니구나, 사회 전체 맥락에서 환자를 봐야 하는구나 느꼈지요.”

해외 재난 구호 현장서 깨달은 것

김 교수는 응급 전문의가 되고서 해외 의료 현장에도 수시로 달려갔다. 2008년 미얀마 사이클론,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KDRT)로 파견된 게 시작이다.

지금은 20여 개도국의 보건·의료 인프라를 지원하는 정부 사업과 백병원의 자체 해외 사업을 맡아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 김 교수는 ‘역마살’이라고 했지만, 그가 하는 일을 정확히 설명하려면 ‘의사 외교관’이라 해야 온당해 보인다.

22만명이 숨진 2010년 중미 아이티 대지진 당시 대한민국 해외긴급구호대(KDRT)의 일원으로 파견돼 현지 부상자를 치료하는 의사 김훈. /KDRT

-해외 의료봉사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2008년 미얀마에서 태풍으로 14만명이 사망했는데 군부가 서구의 도움을 거부했어요. 아세안 위주로 구호대가 꾸려지고 반기문 UN 사무총장 출신국인 한국이 추가됐지요. 정부가 국격에 맞는 외교를 한다며 해외 공적개발원조(ODA)를 본격적으로 늘리던 때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전 ‘봉사’라는 말 싫어합니다.”

-왜요?

“당시 자원한 의사들과 소방대원이 급히 출국했는데 준비가 엉망이었어요. 의료용품들이 라면 박스에 대충 담겨 공항에 왔는데, 그마저 수하물 한도가 넘쳐 절반은 놔두고 이륙했어요. 가서 열어보니 항생제도 없더군요. 수도 양곤에 가서 지갑 털어 중국·인도산 약품을 쓸어 담았죠. 봉사는 선의만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실력 없고 준비 안 된 봉사는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어요.”

-어설픈 보여주기식 봉사가 못마땅했군요.

“귀국해 ‘이런 식으론 안 된다’ 항의했어요. 정부가 받아줘 홍은석 울산대 교수와 함께 국제 재난 구호 행동 규범을 도입하고 구호 장비 키트와 교육과정도 만들었습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도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준비한 약품을 현지에서 전달받지 못해 또 도미니카공화국에 급히 가서 약품을 사 왔죠. 22만명이 죽었는데 한쪽에선 각국 진보 셀럽들이 몰려와 봉사 인증샷을 찍더군요.”

2023년 10월 대구에서 열린 유엔 국제탐색구조자문단 주관 대한민국해외긴급구호대(KDRT) 평가에서 119대원들이 지진 피해 상황을 가정해 인명구조를 위해 콘크리트 잔해를 해체하고 있다. 한국해외긴급구호대는 2011년 처음 최상위 등급(heavy)를 획득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당시 의료팀장이 인제대 김훈 교수다. /뉴스1

-이후 한국 해외 긴급 구호 역량은 크게 발전했죠. 2011년 UN 최고 등급을 땄습니다.

“유엔은 강진 건물 붕괴 같은 상황을 주고 72시간 테스트합니다. 제가 의료팀장이었는데요, 잔해에 깔린 사람을 언제 빼낼지, 무슨 처치부터 할지 등을 판단해요. 한국은 그때 처음 최고(heavy) 등급을 받아 지금까지 유지 중입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2013년 해외 야전병원 배치·운영을 디자인했다. 세월호 참사 후엔 국내 대형 재해·테러·전쟁에 대비한 이동형 병원을 설계했다. 이를 함께 만든 응급의학계 거목 고(故)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은 2019년 연휴 근무 중 순직했다.

김 교수는 “긴급구호대와 야전병원 가용 훈련은 주기적으로 한다. 실제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라고 했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을 지낸 고(故) 이종욱 박사가 2003년 아프리카 앙골라를 방문했을 때 모습. 개도국 한센병과 감염병 치료, 글로벌 의료 불평등 해소에 헌신하다 2006년 별세했다. 정부는 이 박사의 유지를 이어 2007년부터 개도국 의사들에게 한국 의술을 전수하는 ‘이종욱 펠로우십'을 운영하고 있다. 30개국 1500여명의 의료진이 K 의료를 배웠다.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이태석·이종욱 정신을 K 의료에

-개도국 환자 치료에서 의료 인프라 지원으로 눈을 돌린 계기는 뭡니까.

“중국이 민주 콩고에서 구리 캐 가려고 고속도로를 깔았더니, 교통 안전 문화가 없는 이 나라에서 교통사고 사망자가 급증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콩고에 한국 119 구급 시스템을 통째로 전수했어요. 구급차, 이동 검진 차량, 119 번호와 유니폼까지요. 당시 제가 119 운영 노하우를 전수하다 보니, 현지 병원이 지역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중장기 시스템을 바꾸는 데 눈을 뜨게 됐습니다.”

-개도국 의료 현실은 어떻습니까?

“일상이 재난이죠. 의료 기술부터 인력, 병원 시스템 등 모든 게 열악해요. 세계 교통사고의 90%가 개도국에서 일어납니다. 감염병 사망률, 모성 사망률도 높고요. 평균수명이 늘며 만성 성인 질환도 급증하고 있어요. 검진이 어려워 암이 발견됐다 하면 말기예요.”

-외국 의사가 보기에도 안타까운가요.

“동아프리카 모잠비크의 두 살배기 화상 환자 줄리아가 생각납니다. 심한 화상도 아닌데 소독을 못 해 중증이 되더군요. 한국에 데려오려고 알아보는데 갑자기 사망했어요. 그 일을 계기로 현지에 화상 전문 센터를 만들게 됐습니다.”

2016년 동아프리카 모잠비크 수도에서 최대 종합병원인 켈리만중앙병원 개원 행사에서 기념비를 제막하고 있다. 이 정부 사업을 김훈 교수가 이끄는 인제대 국제개발협력팀이 맡아 지금까지 후속지원 하고 있다. 사회주의 전통이 강해 쿠바와 북한 의사만 받아들였던 모잠비크에 자유진영 대한민국의 외교 영토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클럽오브모잠비크

세계 10위 경제대국 한국의 국민총소득 대비 개발원조(ODA) 비율은 0.18%. 선진 공여국 클럽 중 꼴찌 수준(28위), 액수로는 일본의 6분의 1이다.

보건·의료 원조는 코로나 이후 확대됐다. 정부는 개도국에 병원과 의대를 세워주고 의료진을 교육한다. 글로벌 의료 불평등 해소에 헌신한 고 이종욱 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유지를 이은 복지부 산하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KOFIH)과 외교부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이 담당한다.

이 사업 상당수를 김 교수가 10여 년간 맡았다. 그가 이끄는 인제대 국제개발협력센터에서 의대 교수진과 직원 수십 명이 함께 일한다. 인제대 의대 출신으로 남수단에서 환자를 돌본 ‘울지마 톤즈’ 주인공 고 이태석 신부를 기리는 사업도 여기에 합쳤다.

-국내외 빈곤층 진료에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계보가 있지요. 장기려, 이영춘, 문창모, 박병출, 안영모, 유덕종, 이태석, 안수현.... 그런 의사들이 롤모델인가요?

“제가 그런 반열은 아니고요. 훌륭한 의사의 헌신은 칭송받아 마땅하지만, 개인의 희생을 이상화하고 의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이 없더라도 좋은 의료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죠.”

인제의대 출신으로 남수단에서 헌신한 '한국의 슈바이처' 고 이태석 신부는 세계에 감동을 줬다. 그의 제자로 인제의대에 입학, 지난 2월 10여년만에 한국 전문의 자격까지 딴 토마스 타반 아콧(왼쪽)과 존 마옌 루벤이 이 신부 흉상 앞에 섰다. /인제 백병원

-지금 가동 중인 사업이 몇 개죠?

“10개쯤 됩니다. 모잠비크 최대 종합병원 켈리만 병원 건립, 캄보디아와 라오스 국립의대 설립, 카메룬 응급의료센터 구축, 의료진 연수생은 가나·에티오피아에 이어 엘살바도르와 방글라데시에서 올 예정이고....”

김 교수의 스마트폰엔 각국 메신저 앱이 종류별로 깔려 있다. 지구가 도는 한 그의 업무도 24시간 돌아간다.

한국판 미네소타 프로젝트

-그런 사업은 보통 돈 많이 들고 성과는 잘 안 나잖아요.

“예산 많이 들고 학교도 손실이 크죠. 이 의료 대란 와중에 저희 산부인과 교수가 라오스 경찰병원에 파견 갔어요.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귀한 돈이라 최대한 아낍니다. 출장 땐 이코노미석만 타요.”

-왜 한국이 개도국 의료를 도와야 합니까?

“첫째, 인도주의적 차원이죠. 둘째, 우리도 의료 후진국이었다가 선진국 도움으로 성장했습니다.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이 된 유일한 나라죠. 받은 만큼 갚는 게 도리 아닐까요? 셋째, 한국은 교역으로 사는 나라예요.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 내려면 평소 친밀감 높이는 활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한국 소프트파워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분야가 의료라고 봐요.”

6.25 전쟁의 잿더미에서 의사도 약품도 의술도 부족한 한국에 자유진영은 병원선과 대규모 의료진을 파견했다. 당시 독일 의료진이 한국 어린이 환자를 돌보는 모습. /전쟁기념사업회

6·25 전쟁 당시 부상 군인과 영양실조 걸린 고아가 넘쳐나는 한국에 자유 진영은 아낌없는 지원을 펼쳤다. 독일·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이탈리아·인도가 의료진을 보냈고, 이 중 스칸디나비아 3국은 1958년 국립중앙의료원을 지어줬다.

미국은 1950~70년대 서울대 의대·공대 교수 등 수백 명을 데려가 교육하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벌였다. 한국 의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마중물이 됐다.

김 교수는 “미·유럽이 돈 아깝다고, 성과 안 보인다고 포기했으면 오늘 한국이 있었겠느냐”며 “이제는 한국이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펼칠 때”라고 말했다.

6·25 전쟁 후 미국은 한국 의학·공학·농학 등 필수 학계 재건을 위한 1000만달러 규모의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20여 년간 펼쳤다. 1955년 미네소타주립의대에서 연수하던 서울의대 교수진. /홍창의 전 서울대병원장 제공

-한국은 이제 의료 강국입니다.

“기술부터 진단, 치료, 연구 모두 선진 의료를 리드하고 있죠. 암 수술, 장기 이식, 복강경 로봇 수술 등은 세계 최고입니다. 또 이렇게 병원 문턱 낮고 의료비 저렴한 나라도 드물죠.”

-외국 의사들이 무척 선망하겠군요.

“각국에서 한국 연수 경쟁이 치열해요. 혹시 돈 되는 기술만 배워 갈까 봐 선발 단계부터 ‘당신 나라의 공공 의료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서를 받고 철저히 교육합니다.”

개도국 의사들의 품격에 눈물이

-개도국 의사들의 자질은 어떻습니까?

“열악한 조건에도 의사로서 훌륭한 자질을 가진 분이 많습니다. 가르치는 제가 감동받고 겸손해질 때가 있어요. 아프리카에서 온 임상교수에게 ‘귀국해서 학생들 가르치면 어떤 보상을 받나’ 물었어요. 그랬더니 저희를 이상하다는 듯 보며 ‘의사가 다음 세대 의사를 키워내는 데 무슨 보상이 필요한가? 내 모든 시간을 바쳐도 모자란데’ 하더군요.”

김훈 교수가 센터장을 맡고 있는 인제대 국제개발협력센터에서 4일 아프리카 의사 연수생들과 함께 한 모습.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일한 개도국 의사 중 훌륭한 자질을 가진 분들이 많아 감동을 느끼곤 한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정부는 파업이 장기화하면 외국 의사도 투입하겠다는데, 가능할까요.

“언어·문화 장벽 때문에 외국 의사가 단독 진료하긴 어려울 거예요. 다만 요즘 각 의대에 외국 연수생들이 많아졌는데요, 그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줬으면 합니다. 환자들이 ‘왜 후진국 의사가 내 몸에 손대냐’ 화내는 경우가 있어요. 그저 가까이서 보고 배울 수 있게 아량을 베풀기 바랍니다. 옛날 한국 의사들도 그렇게 선진국에서 배워 왔어요.”

-의대생과 전공의 중 이런 국제 협력 분야에 투신하려는 이들이 있습니까?

“무대가 부족할 뿐, 관심 가진 후배는 많습니다. ‘이태석 과정’ ‘국제보건’ 강의를 해보면 열의가 대단해요. 의사는 보건소와 오지 근무, 해외 봉사를 많이 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직업을 이해하게 돼요. 특히 지구촌 기후변화와 대형 팬데믹으로 의사들이 국경을 넘어 협력할 영역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선진국 의대생은 이미 그런 공공 의료 경험을 많이 하고 있어요.”

-고 신좌섭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사는 공공재’라고 했지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에요. 그런데 2005년 의학전문대학원 도입 이후 전인적 의사를 키울 토양이 좁아졌습니다. 힘든 일을 나눠 맡는 동료 의식은 줄고, 의사직의 ‘본전’부터 빨리 뽑으려는 이들이 많아졌죠.”

의대 증원을 둘러싼 갈등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응급실을 지키는 김훈 교수는 "보건소, 오지 등 공공 의료 경험을 많이 해봐야 전인적인 의사가 된다"며 “우리에겐 그냥 많은 의사보단, 넓은 시야와 공감력을 가진 양질의 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필수 의료와 지방 의료 붕괴를 막기 위해 의대 증원이 결정됐는데요.

“정원만 늘면 자동으로 필수·지방 의료에 남을까요? 바이털 의사를 우대하는 구조 개혁이 있어야죠. 잠 못 자며 필수 의료를 지키던 의사들이 울컥한 건 매도당했다는 모욕감 때문입니다. 그들의 명예를 어떻게 지켜줄지 고민했으면 합니다.”

-의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뭡니까.

“공부 잘한 의사, 돈 버는 법 아는 의사는 많아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공감력 있는 의사가 귀하지요. 단순히 많은 의사보단 가슴이 따뜻한 양질의 의사를 키워내야 합니다. 저는 앞으로 거기에 집중할 겁니다.”

[아무튼 주말] 응급 의학과 김훈교수 인터뷰_영상미디어 김용재 (아무튼 주말 개제 전 사용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