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6만8000여 명, 인구 감소 지역인 경북 문경이 인기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얼마 전 24.9%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 시청자들 사이에서 말이다. 주요 무대 중 하나이던 백현우(김수현)의 본가 ‘용두리’가 실제 문경의 조용한 마을인 용연리에서 촬영했다는 게 알려지고, 드라마 속 명장면에 문경의 대표 여행지가 노출되면서 종영 후 ‘눈물의 여왕 촬영지 투어’로 관심이 이어진다.
촬영지 모두 문경의 정체성과 오랜 역사가 담긴 명소들이어서 ‘눈물의 여왕’을 몰라도, 시청자가 아니었어도 찾아가 볼 만한 곳들이다. 드라마 속 백현우와 홍해인(김지원), 일명 ‘백홍 커플’이 데이트를 즐긴 구랑리역부터 위치를 알 수 없어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된 최종회 속 벚꽃 터널 뒷이야기도 공개한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목격할 수 있는 문경의 숨은 여행지는 덤이다.
◇'눈물의 여왕’ 효과?
지난 5월 ‘눈물의 여왕 촬영지 투어’를 다녀와 체험기를 블로그에 올린 김현미씨는 “그동안은 교통이 편리하고 즐길 거리가 다양한 대도시 위주로 여행을 하다 드라마를 핑계로 문경에 처음 가봤는데 소도시의 매력을 한껏 느꼈다”고 전했다. 드라마 종영 후 여행 수요가 증가하는 계절적 영향이 더해지고 재방송도 인기를 끌면서 눈물의 여왕 촬영지 투어 후기가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사극 촬영지로 유명한 문경이 현대 연속극의 배경이 된 건 ‘눈물의 여왕’이 처음이다. 드라마 방영 후 문경 여행객의 분위기도 사뭇 달라졌단다. 문경시 측은 “여행객 연령층이 낮아졌고, 나들이를 즐기는 가족 단위 여행객, 데이트 커플이 눈에 띄게 늘었다. 수치를 확인해볼 수 있는 촬영지들은 드라마 노출 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방문객이 20~30%씩 늘었다”고 했다.
◇'백홍 부부’가 탄 철로 자전거
드라마로 ‘고백 맛집’이란 별칭을 얻은 충주의 일몰 명소 ‘건지마을’을 비롯해 천안 ‘이화정’, 아산 ‘신왕리’, 대구 ‘사유원’ 등 눈물의 여왕 촬영지 리스트가 공유되고 있는 가운데 문경이 여행지로 더 주목받은 이유는 시골의 소박한 풍경과 정겨운 이웃의 이야기를 풀어간 용두리를 비롯해 시골 동네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기찻길,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복고풍 분위기의 놀이공원 등 지방 소도시의 매력을 담은 공간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해진 곳은 ‘구랑리역’. 개천에서 용 난 격인 용두리 슈퍼집 아들 백현우와 퀸즈 그룹 출신 후계자 홍해인, ‘백홍 커플’이 홍해인의 수술을 앞두고 마지막 데이트를 즐겼던 장소다. 폐철로를 활용한 철로 자전거(레일 바이크)는 드라마 덕을 톡톡히 보며 로맨틱 데이트 명소로 떠올랐다.
구랑리역은 탄광 산업 역사와 함께한 가은선의 기차역이었다. 1956년 영업을 시작해 탄광 산업이 쇠락하자 2004년 가은선 폐선과 함께 없어졌다. 지금의 구랑리역은 2013년 문경 철로 자전거가 조성되며 옛 구랑리역에서 진남 방향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새로 지은 것이다. 철로 자전거 매표소, 승하차역으로 활용하고 있다. 철로 자전거 탑승 구간은 진남역~구랑리역, 구랑리역~먹뱅이 구간 등이 있는데 백홍 커플이 달린 구간은 구랑리역~먹뱅이 구간이다.
왕복 6.6km 철로를 천천히 달리다 보면 백홍 커플이 앉아 대화를 나눈 소담스러운 담벼락 벽화, 주먹만 한 장미가 만발한 드라마 속 장미 터널 등 낯익은 배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속도에 따라 30~50분가량 철로를 따라가며 하내리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과 소박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2·4인용 바이크는 전동식이라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작동돼 남녀노소 부담이 없다. 평일에는 구간마다 속도를 조절하며 여유롭게 탈 수 있다. 이용료는 2인 1만5000원, 4인 2만5000원. 금액에 따라 ‘문경사랑상품권’을 준다.
◇드라마 속 놀이공원에서 석탄 역사를
구랑리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에코월드’는 ‘문경석탄박물관’과 ‘가은오픈세트장’ 등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는 생태 영상 테마파크다. ‘눈물의 여왕’에서 퀸즈 그룹의 로맨티스트이자 ‘민폐 아이콘’인 홍수철(곽동연)과 천다혜(이주빈)가 아들 건우를 데리고 나들이를 즐긴 놀이공원이 에코월드다. 이곳 직원은 “방영 후 드라마 장면처럼 간판을 배경으로 뒷모습 인증 샷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며 웃었다.
폐광한 은성광업소 부지 위에 개관해 올해 25주년을 맞은 문경석탄박물관은 리모델링 후 지난달 9일 재개관했다. 광물, 화석, 광산 장비 등 석탄 산업과 함께한 유물 6900여 점과 은성갱도 실감체험관, 탄광사택촌을 둘러볼 수 있다. 광부들의 실물 사진과 생생한 채굴 현장 이야기를 담은 전시물들이 뭉근한 감동을 준다. ‘거미열차’를 타고 폐광을 둘러보는 체험도 인기다. 재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기획전시실에선 문경 출신 서양화가 지태섭 초대전 ‘잊혀진 산업영웅을 기억하자’(~7월 8일)를 열고 있다.
석탄박물관에서 나와 모노레일을 타고 언덕을 올라가면 가은오픈세트장이 기다린다. 촬영이 없을 땐 개방해 둘러볼 만하다. 3곳에 조성된 세트장에선 ‘태조왕건’ ‘성균관스캔들’ ‘추노’ ‘해를 품은 달’ 등을 비롯해 최근 3년간 1년에 10여 작품씩 촬영했다. 고증한 고건축 복원 공법으로 재현해 놓은 사극 세트장은 고구려궁, 신라궁, 경복궁의 근정전, 성내 마을도 실물처럼 꾸며놓았다. 모노레일, 거미열차 탑승료 포함 입장료는 성인 1만원, 청소년·어린이 9000원. 키즈월드 이용료는 별도.
철거된 용연리의 ‘용두리 슈퍼’도 곧 에코월드에 ‘복원’될 예정이다. 문경시 측은 “드라마가 종영해도 여전히 넷플릭스 등에서 인기를 끌면서 용두리 슈퍼를 에코월드 안에 재설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용연리는 마을 주민들이 실제 거주하는 공간이고, 용두리 슈퍼가 있던 자리는 사유지여서 존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며 “에코월드에 용두리 슈퍼 세트장까지 들어서면 누구나 드라마를 추억하며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잉카마야박물관 캠핑장’도 최종회에 등장했다. 용두리 주민과 퀸즈 그룹 가족이 함께 어울려 캠핑을 즐긴 장면 속 그곳이다. 폐교였던 옛 문양초등학교를 활용한 박물관 겸 캠핑장은 은행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가을에 특히 아름답다. 잉카제국 유물 등 김홍락 전 볼리비아 대사의 소장품을 전시해놓은 박물관 관람은 덤이다.
에코월드, 잉카마야박물관 캠핑장과 가까이 있는 ‘가은 아자개 장터’도 지나치기 아쉽다. 아자개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아버지 이름. 가은읍은 아자개의 고향이다. 아자개 장터 주변에선 매달 4·9일로 끝나는 날 오일장이, 토요일마다 토요 시장이 열린다. 오일장에도 손님보다 상인이 더 많은 분위기다. ‘육남매호떡집’의 고소한 기름 냄새를 시작으로 뻥튀기, 모종 노점 등이 이어진다. 돼지고기 고추장찌개 같은 ‘족살찌개’를 파는 ‘수정식당’, 40년 전통의 3대(代) 냉면집인 ‘별미냉면전문점’ 등 맛집도 모여 있어 시골장 구경에 재미를 더한다. 소도시 감성에 빠져볼 수 있는 ‘가은 아자개 벽화 거리’도 가까이 있다.
문경새재도 ‘눈물의 여왕’에 마치 엑스트라처럼 출연했다. 백홍 커플이 걷던 벚꽃길의 정체가 문경새재의 한 구간. 드라마 촬영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정규태 문경시 관광진흥과 마케팅팀 주무관은 “입구에서 제1관문인 ‘주흘관’ 방향으로 가는 단풍길에 벚꽃 CG를 입혀 탄생한 장면이라 그곳이 문경새재 길이라는 걸 알아보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고 설명했다. 찾아간다면 벚꽃 대신 단풍이 물들기 전 초록 단풍나무만 보고 올 수 있다. 대신 MBC ‘연인’, KBS ‘고려거란전쟁’ 등을 촬영한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이 문경새재 길 코스에서 기다린다.
◇'자연 다큐’ 만나는 습지도
드라마 촬영지는 아니어도 습지가 왕성하게 호흡하는 계절에 가볼 곳이 있다. 지난 2월에 우리나라 25번째 람사르습지로 지정된 ‘문경 돌리네 습지’다. 돌리네(doline)는 석회암지대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녹으면서 형성된 접시 모양의 웅덩이. 문경 돌리네 습지는 연중 일정 수량이 유지되는 희귀한 습지에 속한다. 담비, 삵, 수달 등 멸종 위기 야생동물 8종을 포함해 932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
입구에서 전동차를 타고 가 탐방로 초입에 들어서자 희귀종인 ‘꼬리 진달래’가 먼저 몸을 흔들며 인사한다. 산책로를 따라 400m 정도 걸으면 습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닿는다. 온갖 풀벌레, 새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고, 이따금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바람에 실려온다. 가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는 습지 특성상 하루살이도 많다.
습지를 구석구석 둘러보려면 스탬프투어에 도전해볼 일이다. ‘문·경·돌·리·네·습·지’ 글자를 찾아다니면 된다. 글자 주변엔 주요 관찰 거리가 숨어 있다. ‘문’자에선 전망을 감상하고, ‘경’자에선 석회암 바위를, ‘리’자 부근에선 문경 돌리네 습지의 마스코트인 수달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 토박이인 김한웅 자연환경해설사는 “굶주린 시절에는 마을 주민에게 열매나 나물 등을 내어준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고 했다. 벚나무와 신나무 줄기가 서로 엉킨 연리목을 지나 ‘산국정원’ 방향으로 가는 길, 인기척에 놀란 담비 한 마리가 숲으로 몸을 숨겼다.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한 자연 다큐멘터리 생방송의 시작을 알리듯.
[ 드라마 세트장 같은 간이역 찾아가볼까? ]
폐철로 따라 간이역 여행
소도시 간이역은 감성 여행의 상징. 폐역 후 다양한 모습으로 호흡을 이어 가는 문경의 간이역들도 드라마 세트장만큼이나 인기다. 모두 석탄 산업 쇠퇴로 인해 석탄을 실어나르던 철로가 폐선되고 덩달아 폐역이 된 곳들이다.
1955년 개통돼 문경선(가은선)의 첫 출발지였던 ‘가은역’은 은성광업소에서 캔 석탄을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驛舍)다. 개통 당시는 ‘은성보통역’이었다. 1994년 은성광업소 폐광 후 2004년 폐역됐다. 지금은 ‘카페 가은역’으로 변신해 문경 특산물인 사과와 오미자를 활용한 사과밀크티, 오미자에이드 등 음료와 커피를 맛볼 수 있는 휴식처로 자리 잡았다. 역무원들이 입었던 제복 등이 전시돼 추억 속 간이역 풍경들을 소환한다. 박공지붕 형태의 목조 건물은 세로로 긴 창문과 출입문, 문설주가 그대로 남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불정역 폐역은 중심지에서 다소 떨어져 있다. 철로자전거를 운행하는 구랑리역에선 차로 10여 분 거리다. 낡은 철로 사이에 노란 금계국이 만발하는 요즘 문경의 인생 사진 명소로 인기가 급상승 중. 새재 자전거길 구간에 있어 자전거 동호인들에겐 제법 알려진 곳이다. 인근 영강의 강돌 등을 활용해 지은 독특한 외벽이 눈길을 끈다. 한때 철거 위기까지 처했으나 희소성을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빨간색 페인트로 쓴 예스러운 글씨도 그대로 남아 있다. 2017년 9월 역사를 활용한 ‘문경 아라리오 인형 오페라하우스’가 개관해 이따금 공연을 열기도 한다. 불정역과 가까운 문경사격장 쪽 옛 철길 터널도 감성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찾고 있다.
‘진남역’은 1968년 역사가 준공되고 1969년 ‘진남신호소’로 영업을 개시했다. 역시 문경 탄광산업 흥망과 함께 폐역됐다가 지금은 철로자전거 코스의 또 다른 승·하차 지점인 ‘문경철로자전거진남역’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발하면 조령천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기암절벽과 울창한 숲을 곁에 두고 철로자전거를 탈 수 있다. 경북 제1경으로 꼽히는 ‘진남교반’도 가까이 있다. ‘고모산성’은 진남교반 일대 물돌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다. 오를 땐 계단 대신 숲 그늘이 이어지는 오솔길을 이용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