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율’ 이정은(36) 대표는 대학생이던 2008년 뉴욕 5번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이곳에 왜 ‘프롬 코리아(from Korea)’는 없을까. 그 무렵 국보 1호인 남대문이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한국 전통이 명품인데 국내에서도 외면받던 시대였어요.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죠. 그래서 나전칠기 같은 전통을 상업화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20대 초반이었지만 마음이 급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채율을 창업했다. 대학 전공인 불교미술이 아닌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미국에 갔다가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온 셈이었다. 채율은 ‘전통의 색을 다스린다’는 뜻. 지방 곳곳을 발로 뛰며 장인을 찾아다녔다. “사업이라는 게 쉽지 않더군요. 운 좋게 서울 강남 백화점 두 곳에 매장을 냈지만 첫 반응이 ‘뭐가 이렇게 비싸?’였어요. 이러다 망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채율이 어느덧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았네요(웃음).”
정부와 기업이 귀빈에게 채율 제품을 선물하고 호응을 얻었다는 소문이 났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수장 중에 채율 제품을 선물받지 않은 분은 아마도 없을 거예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하고 있어 뿌듯합니다.”
◇잊힌 문화유산을 다시 디자인
공예를 전공한 친언니와 2008년 말 채율을 열었다. 시작은 서울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팝업스토어. “처음엔 찻잔, 수저, 함 같은 소품을 선보였어요.” 채율이 디자인과 디렉팅을 하면 장인이 나전칠기, 칠보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전통에 갇힌 물건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해 경쟁력을 높였죠.”
-20대 초반에 또래가 생각하지 못한 길을 걸었네요.
“어릴 때부터 미술사에 관심이 많아 큐레이터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전공(동국대 불교미술학과)을 택했어요. 그런데 막상 그 길을 가도 ‘이게 맞나’란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방황하다가 휴학하고 미국에 갔죠. 박물관, 미술관에 가도 한국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럼 내가 한국의 것을 이어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여기까지 왔어요.”
-나전칠기는 할머니 물건이라고 여기는데.
“올드 패션이라고들 생각하죠. 나전칠기는 또 가짜가 많이 생기면서 진짜가 사라졌어요. 저는 우리 것을 지키는 데 대한 소명 의식이 있었어요. 이 아름다운 걸 왜 잊고 사나. 잊힌 헤리티지(유산)를 다시 디자인하자고 생각했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우리나라는 세계가 주목하는 IT 강국이잖아요. 그런데 5000년 문화, 역사가 더 대단한 거 아닌가요? 더 주목해야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 전통은 박물관에만 머물러 있어요. 현대미술을 하면 ‘멋지다’고 하는데 나전칠기를 한다고 하면 아무도 안 쳐다봤죠. 그때 이 시장을 봤어요. 우리 역사 속에서도 브랜드가 나와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초기 반응은 어땠습니까.
“제가 사업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망할지도 모르지만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해봐’ 이런 입장이었어요. 실제로도 ‘이거 문 닫아야 하나’ 하는 수준이었죠. 찻잔 하나에 100만원이 넘어가니까 그냥 구경만 하고 가더라고요. 해외 명품은 그 정도 값을 주고 사잖아요. 다들 ‘메이드 인 코리아인데 이 돈을 주고 산다고?’ 이랬어요. 그러다가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채율의 작은 항아리를 선물로 받았다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죠.”
-누가 선물한 거죠?
“지금도 몰라요. 청와대인지 어느 기업가인지. 그걸 확인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았거든요.”
-어쨌든 시작은 소문이었군요.
“2010년쯤 배우 전지현씨도 저희 제품을 사 가고, 손예진, 현빈씨도 예물로 사 갔어요. 마케팅비 한 푼 들지 않고 그냥 소문난 거예요.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왕세자(김수현) 방도 채율 제품으로 꾸몄는데, 그때도 관심이 뜨거웠죠. 젊은 층에서 ‘너희 결혼할 때 거기(채율) 한번 가봐’ 이렇게 된 거예요.”
-신기하네요.
“제가 어려서 철이 없기도 했지만 단순하게 ‘전통으로도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출발한 거예요. 사람들은 예쁜 것을 찾잖아요. 저에게는 우리 것이 가장 아름다웠어요. 현대 다음에 전통이 아니고, 전통 다음에 현대가 있는 거예요. 가끔 사람들이 그걸 잊어요.”
-처음부터 백화점에 입점했잖아요. 혹시 금수저인가요?
“유복하게 자란 건 맞지만 재벌도 아니고 백도 없었어요. 밤새워 가면서 열심히 일했더니 운이 따라줬어요. 젊음이 무기였죠. 백화점이랑 ‘우리도 명품이다. 입점시켜달라’고 싸우기도 했고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우리 전통
채율은 코로나 이후 서울 압구정 현대백화점 명품관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국내 생산 브랜드다. “그만큼 독특하다는 뜻 아닐까요?” 전통 공예를 21세기 현실로 가져와 관심을 받기까지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저는 수많은 한국의 공예 기법을 상업적으로 풀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잊히면 안 되잖아요.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을 한 거죠.” 채율은 초기 부진을 딛고 현재 우상향 성장 그래프를 찍고 있다.
-처음으로 팔린 물건을 기억하나요.
“함이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함을 버릴 수가 없어요. 가장 자신 있는 제품도 함이고요. 옻칠은 동아시아에서만 볼 수 있어요. 에르메스, 루이비통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만큼요. 충분히 이길 자신도 있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고객이라면.
“최근에 2000년생 손님이 작은 소반을 사 갔어요. 정작 함께 온 어머니는 관심이 없는데 ‘엄마, 여기 물건은 앞으로 하나씩 모아야 할 거 같아’ 하더라고요. MZ에겐 우리 전통품이 오히려 신선한 거예요.”
-사업을 접고 싶었던 적은 없나요?
“(고개를 저으며) 5년마다 고비가 왔죠. 사람한테 상처 받은 적도 많았고요. 그럴 때마다 기회가 저를 잡았어요. 그래서 운이 좋다고 하는 거예요. 정부 쪽에서 귀빈 선물 주문이 들어온다든지, 백화점이나 호텔 팝업 오퍼가 온다든지, 그런 일이 계속 생겼어요.”
-창업하길 잘했구나 생각한 적이라면.
“지금요. 한국이 잘나가는 지금, 채율도 세계로 나갈 기회거든요. 사훈이 ‘킵 헤리티지, 스테이 트렌디’예요. 전통이 과거 어디쯤에 머물러만 있으면 안 돼요. 그럼 박물관에 가야죠. 저는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늘 꾀합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장인 정신, 기업가 정신이에요.”
-왜 채율을 찾을까요?
“지금은 세계의 눈이 한국, 또 한국적인 것에 쏠려 있어요.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등 유명 인사가 묵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은 콧대 높기로 유명해요. 로비에 해외 명품만 전시해 왔는데 2018년쯤 연락이 왔어요. 내세울 만한 한국만의 브랜드가 필요해 찾다 보니 채율이 보였던 거죠.”
-전통 공예품은 일반인에겐 접근성이 떨어지는데.
“채율도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부유층을 겨냥한 하이엔드 브랜드로 시작했지만 이제 대중의 것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2년 전에 가로수길에 로드숍을 낸 이유도 그래요. 제가 돈만 벌 생각이었다면 청담동이나 한남동으로 갔겠죠.”
-왜죠?
“저는 복합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MZ 세대, 외국인 누구든 워크인으로 들어와서 채율과 만날 수 있도록요. 우리가 프랑스, 이탈리아에 가면 에르메스, 샤넬, 구찌 같은 명품점에 줄을 서서 들어가잖아요. 그게 그 나라를 대표하는 명품이니까요. 이제 한국도 만들어야죠. 가장 한국적인 명품을. 외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을 체험하고 싶을 때 채율에 오길 바라요. 물건은 안 사더라도요.”
◇21세기 럭셔리를 꿈꾸다
한국을 방문한 귀빈이 채율 제품을 하나쯤은 소장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시진핑 중국 주석,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의 부인, 유럽, 남미, 아시아 나라 대통령이나 총리 등등 귀빈 선물은 비밀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저희가 대놓고 홍보하지 않아요. 그런데 정말 많이 만들었어요.”
-제일 생각나는 국빈 선물이라면.
“기시다 일본 총리에게 간 선물이에요. 과거에 일본이 많이 약탈해 갔잖아요. 우리 손기술이 그만큼 좋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일본에 가면 멋진 공예품이 많아요. 그래서 일본에 없는 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케를 마시는 은 칠보 술잔 세트였어요. 더 정성 들여 만든 기억이 있습니다.”
-반응은 어떤가요?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선물 받은 분들이 또 주문해요. 매우 흡족하다는 뜻이겠죠? 외국에도 소문이 나서 해외 배송도 꽤 합니다.”
-전통 수공예품은 비쌀 것 같은데요.
“텀블러, 잔 받침대 등 5만~10만원 선도 있어요. 함은 20만원대에서 수백만원까지 있고요. 귀빈 선물용은 30만원에서 500만원까지 다양해요. 기업에선 1000만원짜리를 주문하기도 해요.”
-하기야 수십만 원 하는 에르메스 찻잔은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도 있어요.
“채율은 디자이너와 장인, 작가가 다 함께 상생하는 구조예요. 무조건 싸게 만들면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나전칠기 등 우리 전통 공예가 특별한 점이라면.
“AI 시대에 수공예는 ‘느림의 미학’이죠. 사람이 귀해진 때에 장인, 작가들과 함께 사람 장사를 하는 거고요. 게다가 우리 전통 재료는 전부 자연에서 나와요. 흙에서 도자기가, 옻나무에서 옻칠이, 바다에서 자개가 나오죠.”
-세계적 명품으로 이끌어갈 자신이 있나요?
“명품은 퀀티티(양)가 아니라 퀄리티(질)예요. 그래서 대량생산하는 대기업이 아니라 저희 같은 작은 기업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중국, 일본, 한국 중 어느 나라에서 명품이 나올 가능성이 크겠어요? 이 자원 풍부한 나라에서 저는 지휘자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획이라면.
“채율은 해외에 진출해야만 하는 브랜드예요. 저는 사명감과 애국심이 있어요. 선한 기업을 만들고 싶고요. 저 역시 출산하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을 때 저희 제품을 보면서 힐링이 됐거든요. 누군가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선한 영향을 받는다면 그게 21세기 럭셔리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