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휴가는 어디로 가니?” 휴가를 계획하는 직장인들은 “어디를 갈 것이냐”를 두고 일할 때보다 더 치열하게 고민한다. 휴가의 사전적 의미는 ‘직장·학교·군대 따위의 단체에서, 일정한 기간 동안 쉬는 것’이다. 어디로 떠나느냐보다 ‘어떻게 쉬느냐’가 휴가의 본질에 더 부합한다.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섬과 함께 세계 3대 석양 명소로 꼽히는 코타키나발루,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섬인 가야섬은 ‘자연 속 쉼’과 같은 장소다. 말레이시아 대형 호텔 그룹인 YTL호텔이 2012년 7월 문을 연 ‘가야 아일랜드 리조트’는 황홀한 석양을 보며 자연을 즐길 수 있다. 그곳에 푹 빠져 보았다.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5시 30분쯤. 어둠과 빛의 경계가 보이고 있었다. 검은 하늘 끝자락에 어스름한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20여 분 달려 선착장으로 이동했다. 퉁, 하고 튕기듯 물살을 가르는 스피드 보트를 타고 10여 분을 더 갔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배의 꿀렁거림에도 탑승객들은 별말이 없었다. 어제까지 업무에 치이다 밤샘 비행을 한 탓이었으리라.
사람들의 탄식이 터져 나온 것은 가야섬으로 들어가는 선착장에 내려서였다. 파란 바다 위의 초록 섬에 사바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그림처럼 박혀 있었다. 어느새 밝아진 하늘은 코타키나발루에서 제일 높은 키나발루산 뒤에서 일광을 뿜어냈다. 투명한 하늘빛 바다와 높은 산, 이 모든 걸 비추는 주황색 햇빛이 긴 파장을 그리며 내리쬐었다.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설레는걸?
◇황홀한 석양을 머금은 바다
사방이 트인 로비에서 바다를 보고 있으니 어느새 해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웨인 리 가야 아일랜드 리조트 부지배인은 “일출은 오전 6시쯤, 일몰은 오후 6시 30분~7시쯤이 절정”이라고 했다. 뜨는 해를 뒤로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바다를 끼고 있는 오솔길은 울창한 숲 사이로 이어졌다. 들어서자마자 바람이 선선해졌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길도, 로비나 수영장을 가는 길도 모두 싱그러웠다. 뿌리가 복잡하게 얽힌 맹그로브 나무와 모기를 쫓는 데 효과적이라는 야생 생강나무, 동남아 하면 떠오르는 커다랗고 하얀 꽃잎의 플루메리아가 곳곳에 있었다.
숲속에 있는 빌라 형태의 방 121개는 울창한 나무 숲이나 바다, 맹그로브 숲 등 세 가지 전경으로 나뉜다. 노트북만 보던 눈이 청량한 초록색 숲을 보는 것만으로 맑아지는 것 같았다. 방을 안내해 준 직원은 “문을 잠그지 않으면 원숭이가 들어올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손놀림이 정확한 원숭이들이 문을 열고 방 안을 휘젓는 걸 원치 않는다면 열쇠를 밖에 꽂아두면 안 된다고. 원숭이라니! ‘일부러 문을 열어둬도 될까’ 잠시 고민했다.
뭐니 뭐니 해도 코타키나발루의 핵심은 ‘황홀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석양. 선셋 크루즈에 몸을 싣고 지는 해를 쫓아갔다. 머리 위에 있던 해가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에 다가가자 주황색으로 빛나는 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파란 하늘은 붉은 태양과 만나 보랏빛으로 변하고, 하얀 털 구름은 분홍색으로 염색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바다마저 장밋빛이 됐다. 로제 샴페인 같은 투명한 장밋빛.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며 선착장으로 돌아왔더니 해를 숨긴 바다는 어느새 검게 어두워져 있었다.
이 리조트를 찾은 사람들은 로비를 지날 때마다 칠판을 살폈다. 그날 가능한 액티비티가 적혀 있었다. 가야섬은 말레이시아 대표 휴양지 코타키나발루의 자연 보호 지역인 툰쿠 압둘 라만 해양국립공원을 이루는 다섯 섬 중에서도 가장 큰 섬. 다양한 해양 동식물이 서식할뿐더러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다. 시내에 머무는 관광객들은 제셀턴 선착장에서 현지 업체에 예약한 뒤 입장료를 내고 섬에 들어와 물놀이를 한다. 하지만 가야 아일랜드 리조트에서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로비 앞 잔디밭에서 요가, ‘뎅~’ 하는 소리를 내는 싱잉볼(명상을 위한 종)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평안을 찾는 명상, 보르네오 지역의 치킨 커리와 사바 지역 스타일 세비체를 만들어보는 요리 강습까지. 이런 프로그램을 즐기지 않더라도 전통 가옥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에 있는 도서관에서 바다를 보며 책을 읽거나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는 것도 좋은 ‘쉼’의 한 방법이다.
◇자연을 지키며 즐긴다
다음 날부터 자연 즐기기에 나섰다. 리조트 뒤편 산으로 이어지는 트레일 코스에서는 날것 그대로를 만날 수 있다. 리조트에 연결된 등산로라고 무시하지 말라.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등산로에는 바닥에 깔린 야자수 매트도, 미끄럼 방지를 위해 고무 판을 덧댄 계단도 없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전날 쏟아진 비로 진창이 된 내리막길에서 집중력을 잃었다간 다리 대신 엉덩이로 내려가기 십상이다. 휘청거리다 나무를 잘못 잡으면 뾰족한 가시가 있는 라탄 나무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발걸음에 집중하다 보니 회사에 두고 온 일도, 집에 두고 온 청소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딛는 걸음 옆에는 얼음이 된 채 멈춰 선 갈색 도마뱀과 탈피한 껍질을 버려둔 채 어디론가 떠난 매미의 울음소리만 남았다. 운이 좋으면 부인만 넷, 자식은 열일곱을 둔 긴코원숭이 대장의 콜링(호출)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가야 아일랜드 리조트의 특징은 바다 생태계 복원을 위한 자체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 스피드 보트를 타고, 리조트 관광객만 이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비치 ‘타바준 베이’로 이동해 작은 오두막에 들어서자 대형 수조로 내부를 두른 공간이 나타났다. 바다 생태계 복원에 대한 교육을 하고, 해양 생태계의 근간이 되는 산호초 심기 체험을 한다. 온난화로 인해 바닷물 온도가 상승하면서 바다가 사막화되고 있다. 이 리조트는 꾸준히 바다에 산호초를 심어 가꾸고 있다.
산호초를 심는 방법은 간단하다. 파란빛을 내뿜고 있는 수조에서 어느 정도 자란 산호를 꺼내 자른다. 바다의 꽃이라 부르는 산호의 묘목이 될 산호는 커다란 새송이 버섯처럼 생겼다.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고양이 혓바닥처럼 까슬했다. 이렇게 자른 산호초를 조개 껍데기 같은 곳에 단단하게 묶어주면 끝. 수조에서 일정기간 키운 뒤 바다에 다시 심는다. 산호초는 물고기 놀이터이자 휴식 공간, 거북이 먹이가 있는 선반 역할을 하며 바다를 정화할 것이다.
◇거북이와 대화하고, 맹그로브 숲 가꾸고
이 섬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보트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부표를 향해 달려갔다. 코비드와 바바라라는 이름의 거북이를 만나는 ‘터틀 토크’ 프로그램. 코비드와 바버라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구조됐다. 등 껍데기와 다리에 상처를 입고 떠돌던 거북이들은 리조트 직원들에게 구조돼 치료를 받은 후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터틀 미팅도 아니고, 터틀 토크라니. “거북이와는 대체 어떻게 대화를 하느냐” 했더니 “강아지와 감정을 나누는 것처럼”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표 위에 올라서서 작은 오징어들을 뿌리자 바닷속에서 쑤욱하고 커다란 거북이가 올라왔다. 바바라였다. 먹이를 먹은 바버라가 유유히 헤엄치는 사이 몸집이 더 큰 거북이가 올라와 ‘푸우’ 하며 수면 위로 세차게 숨을 뿜었다. “바버라가 오징어를 다 먹어 화가 났다”는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코비드는 또다시 ‘푸우, 푸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스노클링 물안경을 챙겨 바다로 풍덩 빠졌다. 발끝에 모래가 닿는 지점을 지나 물고기 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니 깊은 바닷속에 화려한 산호초 군락이 펼쳐졌다. 애니메이션으로 익숙한 물고기 ‘니모’가 산호초 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바닷속을 유영하다 보니 나 또한 거북이가 된 것 같았다. 아침부터 울리는 스마트폰, 잠들 때까지 마주하는 노트북 따위는 모두 육지에 있으니 바닷속에서는 그저 여유롭게 떠돌았다.
마지막 밤.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가느다란 원형 막대기 모양의 알로에 잎처럼 생긴 것이 놓여 있었다. 맹그로브 묘목이었다. 다음 날 이 묘목을 들고 카약에 올랐다. 노를 저어 바다를 지나 정글 같은 맹그로브 숲으로 들어갔다. 정글 탐험을 하듯 맹그로브 나무 사이로 난 물길을 요리조리 피해 깊은 숲으로. 바닷물에 잠기는 염성 습지에서 자라는 맹그로브는 열대에서 아열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양의 나무. 문어발 모양의 뿌리가 복잡하게 얽힌 맹그로브 숲에서는 물 위로 드러난 뿌리를 빠르게 오가는 게나 물 밑에서 호흡하는 조개의 공기 방울이 수면 위로 올라와 터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의 수질을 정화하고, 탄소를 흡수해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하는 맹그로브 숲을 보호하기 위해 맹그로브 묘목도 심었다. 1년 뒤 이곳에는 어린 맹그로브 나무가 사람 키만큼 자랄 것이다.
이렇게 자연 속 ‘쉼’이 끝났다. 황홀한 석양도, 에메랄드빛 바닷속 물고기와 산호도, 사람 몸만 한 거북이와의 유영도 모두 자연 속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 다시 도시로 떠나는 보트 안에서 멀어지는 초록빛 섬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